성경적상담

인생, ‘멜랑콜리’(Melancholia)한가?

이요나 2009. 9. 30. 15:10

인생, ‘멜랑콜리’(Melancholia)한가?

혹시 여러분은 필리핀 영화 ‘Melancholia’ (2008 베니스영화제 수상작) 라는 영화를 본 일이 있는가? 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무한한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연약한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행복이란 실존되지 않는 개념일 뿐이라는 허무한 답변을 듣게 된다. 과연 인간은 이처럼 멜랑콜리한 것인가? 흥미롭게도 우울증이란 멜랑콜리’ (Melancholia)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정신장애를 나타내는 저하된 감정의 징후를 의미한다.

이 단어가 철학적인 용어로 사용된 것은 11세기 중반 아랍권 문헌에서 소개되면서 멜랑콜리’(Melancholia)라는 말이 우울증을 언급하는 단어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처음 이 단어가 사용될 때에는 인체에 미치는 부정적인 견해로 사용되었는데 후세 유명한 철학자, 시인, 예술가들이 겪는 우아병이 되면서 18세기에는 천재들이 겪는 성스러운 광기로 불리기도 했다.

우울증이 인간문제로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인류가 우울한 증세를 정신심리학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1917년 정신분석학의 대가라고 불리는 프로이트가 그의 저서에서 인간의 슬픔과 우울함을 구별하면서 거론되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대상을 잃을 때 발생하는 비애는 오랜 시간에 걸쳐 나타난 슬픔의 표현으로 이는 다시 다른 대상을 사랑하게 될 때 자연적으로 해소되지만 이와 달리 멜랑콜리곧 우울증의 경우는 인생의 성장과정 속에서 생성된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난 불쾌감과 자책, 자조의 행동들은 자아가 견디지 못할 증오로 변하여 자살과 같은 행동을 유발하게 된다고 정의하였다.

이 부분만 읽을 때 어떻게 보면 그의 논지는 맞는 것 같다. 그러나 프로이드의 심리학의 모순은 인간의 정신 곧 마음의 병을 인간의 원초적인 죄성에 근거를 두지 않고 인간의 타고난 본능이 출생으로부터 잘못된 성장과정 속에서 제한되고 또 훼방을 받아 본성과 역방향으로 결정된 것이라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아를 해방 시키므로 인간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런가? 자아를 자유케 한다고 사람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성경은 이미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 17:9)라고 증거하였다.

l   심리학의 모순

흥미롭게도 성경은 인간의 창조로부터 시작된 인간사와 아직도 오지 않은 세상의 종말을 다루면서도 한번도 우울증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우울증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은 우울한 것은 질병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인간의 영의 문제이며, 마음()의 문제이며, 생활의 문제로서 신체에 미치는 영향인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적 원리에 입각하여 먼저는 그 영혼을 회복하기 위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야 하고 그 다음으로 죄의 유혹에 얽힌 마음을 다스려야 하며 죄의 습성에 빠진 육체를 다스려야 한다.

오늘날 정신과 의사나 심리 상담사들은 현대인들은 대부분 한 두 가지의 정신적 질병이나 장애를 갖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아마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정신병환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이 바로 정신적 문제를 가진 환자인 것이다. 그들이 잘못된 지식에 대한 사고의 결정을 갖고 있는 이상 그들은 그 잘못된 지식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로봇에 불과하다. 그들의 의식을 총괄하는 이성과 감정이 모두 그들의 생각에 사로잡혀 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그 사고를 스스로 버리기 전까지 정신병환자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내가 염려하는 것은 그들이야 너무 많은 세상 지식을 믿고 사느라 문제가 된 것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크리스천들이 이들의 무지에 농락을 당하고 있다는데 있다. 이는 우리 교회들이 성경의 불충분성을 생각하면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철학자가 심리학자들이 개발한 심리치료(psychotherapy)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성도들은 전문가에게 보내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심리 치료법이 심리학이라는 가면을 쓰고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새로운 종교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심리치료란 심리학적 이론을 근거로 사람들의 느낌과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행동을 포함한 인간의 정신 및 정서적 문제를 치료하고 변화 시키고자 하는 인간적 방법이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도 다스릴 수 없는 죄인 된 인간이 다른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다룬다는 것은 모순이다. 엄격히 말하여 인간의 비물질 기관에 속한 정신과 마음을 다루는 것을 종교라고 할 때, ‘심리학은 과학이다라고 말하는 그들의 주장은 마치종교는 과학이다라는 모순과도 같다.

l  정신학적 물리학?

여기서 잠깐 그리스도의 삶의 세계와 세상과의 물리적인 관계를 살펴보자. 이 두 세계는 엄격히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이지만 분명하게 동일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 다만 서로 완전히 다른 분자 구조를 가진 두 세상이 상호 교류하면서 동일 장소 동일 시간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이르면 이 구조가 그대로 존속될 것인지 하나의 세계로 연합 될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동일시간 동일 공간 안에서 서로 완전히 다른 분자구조라면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는 원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이러한 연고로 만약 우리 몸 속의 모든 원자를 양자 덩어리로 축소 시킨다면 모든 전자는 양자와 합쳐져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 내에 모든 공간이 없어질 것이므로 우리 몸은 현미경으로 보아야 할 정도로 축소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몸무게는 현미경 속의 작은 먼지 입자 곧 양자덩어리의 무게와 같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중(density)의 문제로서,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인간의 몸은 부풀린 분자 덩어리에 불과 하다.

그러나 인간의 주체는 물질기관인 육체에 있지 않고 비물질 기관인 주체인 영(spirit)과 이성과 감성을 주관하는 혼(soul)에 있다. 물질기관인 육체는 소모적이라서 그 수명이 다하면 흙으로 돌아 갈 것이지만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천사의 영(사단의 영도 포함)과 같이 영원한 존재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이 인간에게는 짐승의 혼에는 없는 미래적 사고력, 아름다움의 감성, 도덕과 윤리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는 혼(soul)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증거이다.  오늘 우울증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처럼 거창한 부분까지 들쳐 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오늘날 현대인에게 만연된 우울증이라는 증세의 주체를 언급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의학에 있어 우울증은 영혼의 감기라고 칭할 정도로 가장 돈을 잘 벌어 주는 효자병에 속한다. 우울증은 감기와 같이 시도 때도 없이 걸리면서도 의사의 상담에 따라 계속 새로운 팩트로 발전 시키면서 평생을 관리할 수 있다. 또한 우울증이라 명명한 이 병은 세상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이 장수하면 할수록, 인간이 잘 살면 살수록 세상의 학문과 문화의 영역과 철학적 풍조와 사상들이 난무할수록 우울증은 그 영역을 넓혀 간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우울증을 질병으로 관리하는 의사들조차 우울증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밝혀 내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각국 저명한 의학서적이나 의학 논문을 다루는 인터넷 싸이트에서 조차 연일 가설을 쏟아 낼 뿐 이것이 바로 우울증을 만드는 원천적 근원이다라는 명확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고작 생물학적, 유전적 원인, 사회, 환경적 원인, 심리적 원인, 문화적 충동, 개인적 문제의 원인, 약물 의존증에 의한 원인 등 많은 이론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아직까지도 이것이 우울증이다라고 검증 된 학설은 없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매일 우울증 상담을 하고 또 우울증 치료를 위한 약물을 처방한다. 이는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을 놓고 임상실험을 하는 것이다. 나으면 좋고 낫지 않는대 해도 책임없다. 그들은 통장을 보며 웃으면서 계속 관리만 하면 된다.

현대의 의학의 가장 모순된 오류는 인간의 영과 혼에 속한 비물질 기관에 손을 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정신병이고 그 초기 단계가 영혼의 감기라고 불리는 우울증이다. 물론 육체와 영혼이 합일체로 창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기관에 문제가 생기면 유기적인 현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이는 국가에 문제가 생기면 온 국민이 혼란에 빠지듯이, 자식에게 문제가 있는데 부모가 평안할 수 없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사람의 물질기관인 육체에 문제가 생기면 그 정신에 이상증상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럴 때는 고장난 육체를 바로 잡아 정신적 고통을 멈추게 하면 된다.

그러나 일상에서 발생하는 정신적인 문제는 육체로 인하여만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 마음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정신적인 문제는 그 마음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마음에 속한 것을 인간이 다룰 수 있느냐 물을 때, 사람들은 인간이 이 땅에 살아 온 이래 수천년 동안 마음의 문제를 다루어왔지만 그 누구도 증명하지 못했다. 이에 인간들이 발견해 낸 것이 바로 철학과 종교이다. 해답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정신과 마음에 속한 것은 철학으로 영적인 것은 종교로 해결해야 한다고 결론을 지은 것이다.

물론 신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에서는 영혼의 문제는 사치스러운 것으로 치부하고 이념과 사상을 고취해 다스려 왔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자들에게 있어 그들의 주체사상은 곧 그들의 종교가 된다. 그러면 과연 인류는 종교라는 매개체로 인간의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였는가? 그렇다면 석가는 영혼을 위하여 무엇을 이루었으며 공자는 또 무엇을 완성하였는가? 그들이 이루어 놓은 것이 있으면 그의 후손들이라도 평안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인간의 문제로 골머리 앓다가 후세에 숙제로 남기고 저 세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헬라 철학자들은 진리는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이로서 철학이나 종교로도 인간의 비물질 기관인 영혼을 다스리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증명되었다.

l   인생의 주체와 성경

인간이 자기의 정신의 주체인 마음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내 손과 발과 머리와 궁둥이 후미진 곳까지도 만지고 다스릴 수 있으면서도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시인 괴테가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은 내 것이면서도 내 것이 아닌 것이다. 자기 스스로도 어쩔 수 없고 다른 사람조차 만질 수도 관찰할 수도 없다. 이것인 인간의 지혜로 다스릴 수 없는 비물질 기관인 영과 혼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 ’(a spirit)이란 히브리어는 루아크로서 바람’, ‘숨결로 표시된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숨결생령’(Living Soul)으로 호칭된 인간의 ’(a spirit)은 인간의 의식의 주체로서 이성과 감성을 총괄하며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숨을 코에 불어 넣으심으로 작동케 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첫 사람 아담이 산 영이 되었다”(고전15:45) 기록하였다.

내가 오늘 우울증을 다루면서 영혼의 창조에 관한 장황한 설명을 하는 것은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울증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오늘날 현대인의 가장 큰 질병으로 대두된 우울증이 바로 인간의 의식 곧 이성과 감성을 다루는 비물질 기관인 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항간에 약은 약사에서 진료는 의사에게라는 말이 있다. 나는 동물은 가축병원으로, 사람은 교회로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생활에 사용되는 문명기기들이 고장을 나면 모두 그 제품의 회사로 보내어 AS를 받아야 하듯이 인간의 모든 문제는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보내야 하되 인간에 속한 모든 권세를 거룩한 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으므로 사람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머리인 교회에서 담당을 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목회이며 또한 성경적 상담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자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 9:6) 증거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이름 중에 제일 먼저 나오는 칭호가 기묘자라, 모사라라는 이름이다. 이는  영어로 ‘Wonderful, Counselor’로서 오늘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의 권능이기도 하다.

죄인된 인생이 세상을 살아 가면서 환경과 사람과 일에 부딪히는 것은 당연한 일다. 이때 자기 중심의 인생을 살고자 할 때 이기적인 욕심과 욕정이 솟아 올라 사람과 사회관계 속에서 의사소통에 장애가 생기고 그로 하여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게 되면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게 되어 분노하고 두려움과 염려에 빠지게 된다. 이 때 자연적으로 생기는 정신적 현상이 우울한 마음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지으실 때에 우리 마음 안에 이성과 감성의 센서를 달아 놓으셔서 삶의 조건이 자기가 바라는 기준치에 미치지 못할 때 마음의 변동을 가리키는 센서는 자동적으로 작동하게 된다. 이 센서의 작동으로 기분이 좋아질 수도 기준치 이하로 다운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에게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에덴동산이다. 그들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나타난 현상은 두려움과 수치심이다. 그리고 가인의 때에 와서는 자신을 대하는 하나님의 응답에 까지 대응하여 얼굴색이 일그러졌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냐?” 물으시며,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 앞에 엎드리니느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4:6,7) 하셨다. 이는 가인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분노한 당신에게도 하신 말씀이다. 죄인된 인간에게 선을 행할 의무와 자기 죄를 다스릴 의무가 주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겪는 우울증이라는 것은 대부분 죄와 관련되어 있다. 설혹 하나님을 믿는 자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세상의 것이나 사람이나 명예를 탐할 때 당신은 세상과 다투어야 하고 그 과정 속에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당신은 분노하여 얼굴색이 변할 것이며 마음에 악이 싹터 이웃을 모함하고 해하는 죄를 짓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의 마음에 달아 놓은 센서가 당신의 마음을 짓누르고 강정을 다운시킴으로 당신은 우울한 마음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라도, 주변의 사람들이 당신을 멸시하고 증오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신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인내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의 삶을 평안케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울한 마음을 갖지 말자. 우리가 주의 말씀 가운데 순종하며 성령으로 기쁨의 삶을 살 때 우리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명하였기 때문이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물질문명에 주도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을 생각하자. 그가 그의 사람들을 지킬 것임을 확신하자! 아멘아멘 (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