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요즘 한국통신의 QOOK 이라는 TV 광고에서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라는 테마가 사람의 배꼽을 잡습니다. 아마 집나간 사람들은 이 광고를 볼 때마다 따뜻한 밥상을 차려 놓고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얼굴을 그리면서 씁쓸한 웃음을 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괜시리 개고생하지 말고...
혹시 여러분은 귀한 물건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일이 있습니까? 혹시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를 잃어 버렸던 기억은 없었나요? 아니면 집을 나가 방탕한 생활을 하는 아들 때문에 근심을 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이러한 일들은 우리 삶 가운데 종종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아마 다시 찾은 기쁨을 경험을 하신 분은 오늘 이야기에 대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나는 이 성경말씀을 읽으며 죠이를 바라보게 됩니다. 사실 죠이는 잡 나간 강아지였습니다. 최전도사가 미장원 앞에서 주어온 지 벌써 일년이 되었습니다. 내가 이놈의 이름을 JOY라고 지은 것은 자식을 키워보지 못한 기쁨을 맛볼까 싶은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죠이를 키우면서 생활에 변수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때마다 먹이를 챙겨 주여야 하고, 목욕 시켜야 하고, 오줌똥 가려 줘야 하고 산책까지 시키자니 이는 삶의 기쁨이 아니고 고역입니다. 죠이는 처음 한두달동안 주인과 집이 바뀌어서인지 먹을 것을 주어도 잘 먹지 않고 피부병으로 극적이고 게다기 오줌똥을 가리지 못하고 밖에만 나가면 저 혼자 달아나는 통에 도로 내다 버릴 생각을 수십번도 더 하였습니다.
말 못하는 짐승도 이러한데 각자의 이성과 성품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겠습니까? 비록 아비라도 자식을 온전케 키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혈육을 가진 사람은 모두 동일한 죄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내가 죠이에게 마음을 뗄 수 없었던 자기 주인을 향한 무조건적인 충성본능 때문입니다. 그동안 망나니처럼 행동했던 것은 죠이의 몸에 배인 습관을 내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죠이를 키우면서 양을 키우는 목자의 세심한 관찰이 생겼습니다.
한번은 저 혼자 집나가더니 교통사고를 당해 만신창이의 몸으로 돌아왔습니다. 죠이는 제 주인에게 오는 것이 사는 길인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후부터 죠이는 이제 혼자 나가지 않습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인 것을 안 것입니다. 세상이 험악하다는 것을 깨달은 죠이는 제 주인의 말에 복종하면 사는 길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것입니다.
오늘 주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림은 양과 목자입니다. 양은 자생능력과 귀소본능이 없어 목자가 없이는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 한 마리를 잃으면 오던 길로 다시 나가 양을 찾아 다닙니다. 그리고 양을 찾으면 어깨에 메고 돌아 옵니다
두 번째 삽화는 여인이 잃어버린 은화 한 잎입니다. 이 은화 한 잎은 열 개의 은화와 함께 꿰어 머리에 장식했던 결혼기념품입니다. 여인이 모머리에 열개의 은화장식을 하고 있다면 그 여인은 한 남편의 아내입니다. 은화 열잎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잃어버리를 수 없는 영광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한 잎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열개를 잃은 것과 동일합니다. 아홉 개로는 결혼의 증거물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삽화는 돌아 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무리 생명같이 귀한 아들이라도 스스로 아비 집을 나가고자 하는 자식의 고집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빗나간 인간의 마음을 사람이 다스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세상의 고통 속에서 자신이 죄인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의 목자 되신 예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의 날을 위해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과 아무리 죄인이라도 한 아들로 여기시는 우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집 나가면 개고생입니다. 우리가 다 함께 주 앞에 있을 때 주의 기쁨됩니다.(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