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출발하신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지나 유대에서 가장 낮은 지역 여리고에 오셨다. 이제 곧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비된 고난을 받으시게 된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느려지고 있는 순간이다.
예수님의 일행이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자 구걸하던 소경이 무리에게 누가 지나가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라 하니 소경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쳤다. 사람들이 꾸짖어 소리를 지르지 말라 하였지만 그는 더욱 소리질러 외쳤다. 이에 주께서 그를 데려 오라 하셨다.
주님은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소경인 것을 아시는 주께서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기 때문이다. 소경은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대답하였다. 소경이 보기를 원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셨다.
오늘 당신은 본문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주께서 그의 믿음을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과연 앞 못 보는 소경이 어떤 믿음을 가졌던 것일까? 이 답은 그의 외침에서 알 수 있다. 이 소경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소리를 외쳤다.
여기서 다윗의 자손이란 족보를 말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말한 바 다윗의 씨로 오시기로 언약된 메시야라를 뜻한다. 그러므로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큰 소리로 외친 것은 이미 나사렛 예수께서 메시아인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유대인들은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없다고 믿고 있었고 그 당시 예수님은 유대교에 의해 사마리아 사람이라 불리고 귀신의 왕이라고 정죄되었던 때이다. 그러나 그는 나사렛 예수께서 성경에 언약된 다윗의 자손 메시야인 것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예수를 가리켜 ‘주여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아는 메시야 되신 예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신다는 고백이다. 앞에서 언급된 율법에 능한 관원은 예수님께 영생을 구하면서도 ’선한 선생님‘이라 부른 것과 얼마나 큰 대조인가?
그는 과연 무엇을 보기를 원했던 것일까? 메시야의 얼굴일까? 물론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의 소망은 오직 메시야의 날이었다. 소경으로서 이 세상에 아무런 소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보기를 원한다는 말에는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누가는 ‘그가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았다’ 기록하였다.
그는 소문으로만 듣던 메시야를 이제 직접 눈으로 확인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홉명의 문둥병자처럼 돌아가지 않고 그 길에서 주를 좇았다. 그는 메시야의 제자가 되기를 소망했기 때문이다. 이 소경은 바로 디메오의 아들 바디에오이다. 바디메오는 ‘명예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는 소경으로 하늘에 속한 최고의 명예를 찾은 것이다.
오늘 주께서 눈뜬 당신에게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신다면 당신은 무엇을 해 달라고 할 것인가? 강남의 고급 아파트 한 채만 달라고 할 것인가? 장동건이와 살게 해 달라고 할 것인가? 어쩌면 분당에 대형교회를 하나 지어 달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서라 차라리 네 눈이 멀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인생의 날이 일장춘몽이거늘 네가 정녕 눈뜬 장님이 아니더냐? 세상의 것을 다 갖는다고 네 영혼의 소망이 성취될 수 있다더냐? 아서라 이 사람아! 네가 무엇을 원하든지 세상에 소경된 나는 오늘도 주를 보기를 원한다. (요나)
이요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