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22:31,32) 너의 아침에 닭이 우는가?
(눅 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I. 유월절의 의미(1-13)
(눅 22: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A. 예수님의 유월절 준비
주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성내로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라’ 하시며, 흥미롭게도 주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며 ‘보라 너희가 성내에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의 들어가는 집을 따라 들어가서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먹을 객실이 어디냐 물으신다 하면 저가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하라’(눅22:10-12) 하셨다.
지난번 나귀를 풀어 끌고 오라 하실 때와 같이 주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과 관련된 일들을 스스로 진행하셨다. 어떻게 보면 미리 짜고 한 일처럼 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 말씀은 항그대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일을 성경에 미리 말씀하신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 행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흥미로운 말씀을 보게 된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앉으사 “내가 고난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15)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하여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하셨다. 이 말씀은 오늘 이후로 유월절 의식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르기까지 한시적으로 중단 될 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유대인에게 유월절은 매우 특별한 종교의식 중에 하나이다. 성경에서 유월절의 기원은 출애굽기 12장을 그 근거로 하고 있고 그로부터 유대인은 해마다 어김없이 유월절 절기를 축제로 기념하였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출12:14) 이르셨기 때문이다.
B. 여호와의 유월절
유월절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 하던 때에 그의 백성들을 돌아보신 하나님께서 종살이하는 자기 백성들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베푸신 구속의식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유월절을 창설케 하시며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하라’ 하시며 ‘이달 열흘에 가족의 수대로 어린양을 취하되 식구가 적으면 이웃과 함께 인수를 따라 하나를 취하여 이 달 십사 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나물과 함께 먹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출12:3-10) 하셨다.
계속하여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하시며 다시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출12:25) 하셨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천지가 무너져도 지킬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절기이다.
또한 하나님은 유월절을 행하는 기간을 무교절로 정하여 ‘너희는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 동안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15) 명하셨다.
무교병이란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빵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밀가루 반죽에 누룩을 넣어 부풀려 만든 빵을 초에 찍어 먹었는데 그날은 무교병이라 하여 칠일동안 누룩없는 빵을 먹게 하셨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아직도 유월절이 이르면 온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 누룩을 제거하는 행사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일들은 예레미야로 하신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셔 그날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후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이르면 가족의 숫자에 맞춰 어린양을 잡고 무교병과 쓴나물을 준비하여 무교병을 먹으며 지난날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던 일들을 자녀들에게 상세히 가르쳐 대대로 유월절을 기념하게 하셨다.
II. 하나님의 계획(14-23)
A. 유월절이 완성될 때까지
그러나 흥미롭게도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 하신 후 막상 유월절 식탁을 준비하자 ‘이 유월절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다.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 두 가지가 내포되어 있다.
사실 유월절은 유대인에게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온 인류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는 관계가 없는 의식인 것이다. 십계명을 주신 것도 이스라엘 민족이고 또 율법도 유대인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신 것이며 또 생애 마지막 유월절의 자리를 빌어서 새 언약을 하신 것이다.
또 다른 의미는 유월절을 하나님 나라에서 먹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이것은 장차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스라엘 민족이 모두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에게 돌아 올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일은 상당히 오랜 후의 일이다. 이 땅에서 교회의 사역이 완성된 후 교회가 들림을 받고 이 땅을 심판하는 7년 대환난 후에 이 땅에 펼쳐질 천년왕국 때의 일이다. 그 때 주님은 유월절을 제자들과 함께 다시 드시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오늘 제자들과 나누는 유월절 식탁은 사실상 주께서 말씀하신 그날이 오기까지 그 막을 내린 것이다. 수천년 동안 유대인의 구원의 표징이 되어 왔던 유월절 의식의 그 의미가 끝난 것이다. 이제 주께서 친히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 위에 고난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B. 중단된 이스라엘의 섭리
계속하여 예수님은 잔을 받으신 후 사례하시고 ‘이것을 갖다 너희끼리 나누라’ 하시며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18) 하셨다.
포도나무는 사실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한다. 이사야는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사5:7) 하였으며 다시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를 판단하라 사람이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이 무엇을 더 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사5:3,4) 기록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주님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의 남은 한 이레가 이를 때까지 그들을 향한 은혜의 시간을 잠정적으로 마감하신 것이다. 다니엘은 이미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단9:26a) 라고 기록하였다. 이제 그 말씀이 시작되는 순간인 것이다.
C. 성령과 믿음의 일치
계속하여 주님은 빵을 들어 축사하신 후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사 후에 잔을 들어 동일한 말씀으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20) 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끝과 시작을 다시 이어가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시대를 마감하고 이제 새 교회의 시대를 열어가시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깨뜨려 그 살과 피를 마시는 자들에게 주시는 새로운 언약인 것이다.
여기서 기념하라는 말씀은 회상하라는 말씀으로 주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나누어진 공동체임을 상기시키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이 땅에 세워질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직 하나인 것을 상기 시키신 것이다.
후일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성령을 말하며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록 만유를 통일 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엡4:4) 증거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식탁의 의미를 상고해 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식탁은 가족이 되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가족이 모여 빵과 포도주를 나누며 유일하신 하나님의 자녀 됨을 감사하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나누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 있어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세리들과 함께 식탁을 하는 것을 보고 어찌하여 죄인들과 식탁을 같이 하느냐 책망하였다. 이 때 주님은 그들에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셨다.
또한 사도행전 15장에는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에 바울과 함께 있을 때 그곳 성도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 때 유대에서 지도자들이라 하는 사람들이 불시에 나타났다. 율법상 유대인이 이방인과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일이 아닌 것을 아는 베드로는 슬그머니 뒤 꽁무니를 쳤다. 이것을 본 바울이 분노하여 베드로의 행동을 면전에서 책망하였다.
이처럼 식탁에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가 되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의 몸과 피로 새 언약을 세우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운 말씀이 뒤 따르고 있음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주님은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한 상 위에 있도다” 하셨다. 이것은 예수를 판 가룟 유다를 지칭하신 것이다. 주님은 ‘인자는 이미 작정된 곳으로 가려니와 그를 파는 자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22) 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자기를 가리켜 인자라 하셨고 또 ‘그를 파는 자’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마지막 만찬 때에 주께서 제자들에게 세족식을 행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의 주인과 스승으로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이 같이 하라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였노라’ 하셨다. 이것은 장차 잘못된 길로 나갈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 교회가 분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당부인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하시며 너희가 사랑하는 그것으로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나의 제자됨을 알리라 하셨다. 오늘날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는 어떠한가? 과연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사랑을 보고 저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고 말할 것인가? 정말 부끄럽기 그지 없다.
이제 주님이 오실 때가 매우 가까웠다. 이제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 가야할 때이다. 모든 다툼에서 일어나 다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음 주에 분열될 교회를 위해 그 강구책을 세우신 주의 계획을 살펴 보도록 하겠다. 부디 성경이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가 기억하시기 바란다.
II. 통치의 유업에 대한 사단의 훼방(24-38)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30)
A. 세상 권세의 원리
흥미롭게도 이러한 와중에 제자들이 저희 사이에서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툼이 일어났다. 참으로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이 눈 앞에 다가 오고 있는데 제자들은 서로 자리 다툼을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계 속을 살아가는 인생들의 모순이라고 하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25,26) 하시며 다시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하셨다.
이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구조와 세상과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있어 통치개념은 권력적 지배가 아니고 희생적 봉사가 되어야 하는 모순적 진리를 설명하신 것이다. 이는 한 나라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백성을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섬기기 위한 것과 같다고 하겠다.
성경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온 것이라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만약 누가 백성을 섬기지 않고 섬김을 받으려 한다면 그는 그 자리를 결코 지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고 잘 살 수 있도록 섬김을 다한다면 그는 명군으로 칭송을 받을 것이다. 이와 같이 권세는 힘 없는 자들을 돌보고 이끌어 주기 위한 것이다.
이 말씀과 함께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28-30)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권세는 시험을 통과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란 통치를 위한 실험적 훈련이라고도 하겠다. 히브리서 기자는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2:8) 하였고 다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기록하였다.
또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께서 친히 세우신 열두 사도 곧 교회에게 주신 권세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주셨던 권세는 열방을 다스리는 권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일로서 장차 주의 날이 이르면 이 말씀은 그대로 성취 될 것이다.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 곧 교회에 주신 권세는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다스리는 권세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하리라 한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이 서로 다툴만도 하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권세의 다툼으로 하여 사단이 밀까브르듯 하려고 청구한다는 것이다.
B. 사단의 청구(請求)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31,32)
이 말씀은 열두 제자 중 특별히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열두 제자 모두와 관련된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은 주께서 친히 자신의 몸을 깨뜨려 사단이 가지고 있던 이 세상 권세를 탈환하여 제자들에게 주신 후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과 그 전쟁에서 이 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라 하겠다.
주님은 먼저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 하셨다. 이것은 사단이 제자들의 연약한 부분 곧 지도자로서 온전치 못한 점을 고소할 것을 언급한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유다서에서 사단이 천사장 미가엘 앞에 나아와 모세의 시체를 훼방하고 있는 내용을 알고 있다. 사단은 이처럼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주의 형제들을 고소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가리켜 시몬아 시몬아 하고 세상에서 사용하던 히브리식의 이름으로 부르셨다. 이것은 아직 세상의 옷을 벗어버리지 못한 베드로를 의미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스라엘이라 명명하신 하나님께서 ‘야곱아 야곱아’ 하고 부르신 것과 같다고 하겠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께서 열두 제자 중 베드로를 특별히 대하신 것을 알 수 있다. 베드로는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변화산상에 올라 사람으로 보지 못할 하나님 나라와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를 들었으며,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는 것을 직접 목격하도록 허락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께서 메시야 곧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제일 먼저 체험한 사람이었다. 베드로는 주의 부르심에도 흥미를 얻지 못하고 고기잡이에 연연하다가 어느 날 동료들과 함께 밤이 세도록 고기잡이를 하였으나 새벽에 빈 배로 돌아 왔다. 이 때 주님은 깊은 곳에 그물을 넣으라 하셨고 베드로는 주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던졌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 지도록 고기가 잡혔다. 이 때 베드로는 주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고백하였다.
또한 베드로는 모험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 오자 그는 예수께 손을 내밀어 주여 나로 바다로 걷게 하소서 하였다. 그 결과 베드로는 제자들 중에 유일하게 바다 위를 걷는 모험을 한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특별한 경험과 베드로의 독특한 성격은 사단에게 주목을 받을 만하다. 그 이유는 사단은 늘 지도자를 넘어뜨리므로 그 주도권을 탈취하기 때문이다. 사단은 예수께서 복음사역 현장으로 나오셨을 때에도 거침없이 시험하였다. 따라서 사단은 이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교회가 열두 제자들에게 위임되자 그 중에 가장 유력한 베드로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베드로는 용기 있고 강한 리더쉽을 가지고 있었지만 섬세하지 못하였다. 그는 깊은 사려가 결여하였고 즉흥적이고 충동적이었다. 또한 경솔하고 호언장담하며 앞서기를 좋아하였다. 또한 그는 자기에게 불리한 점이 있을 때에는 꼬리를 빼는 비열한 면도 갖고 있었다.
주께서 고난 받을 날이 가까워오자 제자들에게 자신이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팔려 십자가에 고난 받으실 것을 비로서 제자들에게 말하자 베드로가 선듯 나서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간하였다. 이때 주님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분별하지 못하는 베드로를 책망하여 ‘사단아 내 뒤로 물러나라’ 책망하셨다.
또한 주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는 길만이 합리적이고 역동적인 복음사역이 될 것임을 가르치기 위해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려 하자 베드로는 결코 내 발을 씻을 수 없다 하였다. 이 때 주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 하셨다. 이처럼 베드로는 앞뒤 분간하지 못하고 나서는 성격 소유자였다. 이로서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는 비유는 매우 흥미롭다. 사단은 우리로 바람에 날려버리는 쭉정이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C. 예수님의 방법
흥미로운 것은 사단의 청구에 대한 예수님의 대처이다. 주님은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하셨다. 우리 같으면 사단이 제자들을 청구하지 못하도록 미리 손을 써서 막아 놓을 터인데 주님은 우리가 사단에게 밀 까부르듯 하는 것을 허락하신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실수 할 수 밖에 없는 아이를 스스로의 믿음에 맡기고 채벌을 하려고 회초리를 들고 서 있는 훈육선생 앞으로 보내는 것과 같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주께서 사단이 밀 까부르듯이 하지 못하도록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신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로 하여금 경험과 체험을 통하여 스스로 터득하게 하시려는 의도시다. 어차피 사단과의 싸움은 교회 지도자들이 믿음 안에서 스스로 터득해나갈 영적 전쟁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뼈에 사모칠만큼 후회를 할 때가 있다.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아니 지나간 일들을 지워버릴 수 있다면 하고 내가 저지른 일에 통분할 때가 있다. 이때마다 사단은 내 앞에서 그것 봐라 네까짓 것이 뭘 하겠다고 나서냐. 너나 잘하세요 하고 조롱한다.
정말 그날 밤은 눈을 감은 체 뜨지 말았으면 하는 고통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터지고 멍든 가슴을 매만지시는 주님의 따뜻한 음성을 듣게 된다. 주께서 ‘요나야 내가 네 마음을 안다. 그러나 너는 일어나 너의 멍든 모습을 바라보고 의기소침해진 네 형제들을 굳세게 하거라’ 하셨다.
후일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2-14) 증거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세상의 시험을 통하여 진리를 터득하게 된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이미 우리가 매끄럽지 못하고 거친 부분 연약하고 비틀린 부분이 있음을 알고 그대로 부르셨다. 사단은 이러한 우리의 약점을 이용하여 우리를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게 만든다.
주님은 내가 오늘 저녁에 집에 들어가서 앞으로 있을 일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텔레비전의 연속극에 빠져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신다. 또 아침에 일어나서 주님께 감사의 기도와 찬송을 드리지 않고 먼저 신문을 펼쳐 들고 밤사이 세상에 일어난 일에 눈을 곤두세울 것도 알고 계신다.
그러나 주님은 내 앞에 사단이 키를 자기고 나오고 있음을 보고도 ‘너 지금 기도하지 않으면 곧 사단이 너를 까부를 것이다’ 라고 미리 말씀하지 않으셨다. 사단이 나를 까부를 때 내가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을 나를만한 위대한 말씀을 발견 하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 만 왕의 왕되시며 우리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교회 지도자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하늘을 나를 것 같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선물도 하고 그를 칭송한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내가 큰 잘못을 해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 나를 책망하고 비웃는 위치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더 이상 그는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가 엄청난 잘못을 해서 사단의 놀이감이 되어 버렸는데도 주님은 나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계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가고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습니다”(33) 하였다. 참으로 베드로는 그 성정이 대단한 사람이다. 그의 의협심은 그 누구도 당할 수 없을 만큼 강했지만 우리는 다음 단락에서 베드로의 이러한 강인한 의지가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34) 하셨다. 이 말씀을 들을 때에도 베드로는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라 작심했을지 모르지만 한치 앞을 내다 보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며 현실 상황이다.
D. ‘전대와 검’에 대한 성경적 이해
35절에는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냈을 때 부족한 것이 있더냐 없었습니다. 말씀하시되 이제는 전대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거라” 기록되었다. 매우 흥미로운 말씀이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9장과 10장에서 제자들을 전도여행을 보내시며 하신 말씀과는 반대되는 말씀이다. 그때 예수님은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 하셨다. 그런데 이제 주님은 그 말씀과 달리 전혀 상반된 말씀을 하셨다.
어떤 목사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이제 교회와 그 사역자들이 복음을 위해서는 재물을 가져야 하며 악한 사단의 세상과 싸우기 위해서는 그에 대항할 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며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 당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드렸던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주여 보시옵소서 여기 검이 둘 있습니다” 하였고 주님은 ‘족하다’고 답하셨다. 그리고 그 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주를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하속의 귀를 자르기까지 하였다. 이 때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51) 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의 말을 듣고 ‘족하다’ 하신 것은 이 말씀 속에는 그들이 주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대한 슬픔의 반어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사실 그들이 지금까지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에 대하여 깨달음이 있었다면 이제는 전대와 주머니와 검을 가지라 하신 말씀을 그렇게 이해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미 부자 청년의 일을 통하여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하셨고 불의한 재물에 충성할 것을 말씀하시며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을 명명백백하게 가르쳐 오셨다. 그러므로 전대와 주머니를 가지라는 것은 복음 사역자들이 재물을 취하여도 좋다는 말씀은 아닌 것이다.
또한 검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 하신 말씀도 세상을 대항하여 싸우라는 말씀이 아니다. 복음서에는 어디에서 세상을 그렇게 대하라고 가르친 일은 한번도 없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도 내어 놓으라 하셨고 오 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는 십 리를 가라고 하셨다.
이미 주님은 앞에서 사단의 청구가 있을 것을 언급하셨고 또 모든 시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상에서 먹과 마시며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다. 이들은 사람으로서 바랄 수 없는 영광으로의 참여에 초대를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세상에서 어떤 영광을 취할 것이 없다. 도리여 그들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시험을 받아야 할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생활을 자족해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비결이며 사단의 청구에 이길 수 있는 방법이다. 만약 제자들이 재물에 얽힌다면 그 모든 재물을 주관하는 세상 신에게 얽혀 넘어질 것이다. 설혹 그들의 전대에 세상의 돈이 있을지라도 그들은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여 친구를 사귀는 일에 쓰여질 것이다. 결코 복음의 제자들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은 자기들의 생활을 위해 자급자족하여야만 한다.
그러면 겉 옷을 팔아 검을 사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베드로가 검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 떨어뜨렸을 때 주님은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 하셨다. 주님은 결코 교회가 이런 방법으로 세상과 대응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바울은 모든 권세에 복종하라 하였고 다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12:20) 증거하였다. 이와 같은 성경의 가르침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해석은 최초의 사용 해석법과 해석의 불변성에 입각하여야 한다.
성경에서 검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는 곧 성령의 검이다. 따라서 이들의 모든 재물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는 일에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을 번역하고 성경을 해석하고 성경을 편찬하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옳게 해석된 성경의 말씀이 널리 전파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세상은 점점 발달한 가운데 복음이 땅끝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방송과 인터넷과 출판이 널리 보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나타낼 모든 것을 팔아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사야 하지 않겠는가?
IV. 겟세마네 기도의 미스테리(39-46)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42)
A. 예수님의 기도
39절에는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라고 기록되었다. 이곳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습관을 좇아’라는 기록으로 보아 주님은 이곳에 가셔서 기도를 하셨음을 알 수 있다. 습관은 사람으로 어떤 일에 집중하게 한다. 나쁜 일에 습관된 사람은 대부분 중독에 빠지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한 일들의 습관은 우리의 삶을 보람되게 하고 좋은 결과를 맞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생활을 비롯한 경건생활이 습관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곳에 이르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40) 하셨다. 여기서 시험이란 말은 유혹의 힘에 대한 경계이다. 어떤 목사들은 자신은 세상에 유혹을 받지 않을 것으로 착각하는데 실제로 많은 목사들이 재물과 성적인 유혹에 빠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그들의 경건한 기도생활이 습관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서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이는 서로의 기도가 엉키지 않고 방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한때 기도생활의 대표적이라고 칭하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일이 있었다. 이 교회는 우리나라 교회에 금요철야 예배와 금식기도를 유행시킨 교회이기도 하다. 이 교회는 성령충만의 생활화를 주창하며 모든 성도들이 방언기도를 하기를 주력하고 철야예배나 새벽기도 그리고 금식기도에서 큰 소리를 내어 방언기도를 외치도록 권장한다.
나도 한때 그들의 말을 따라 다른 사람에게 질세라 큰 소리로 외치며 또 방언이라고 할 수 없는 이상한 소리들을 목청 높여 외치곤 하였다. 옆 사람들이 서로 질세라 큰 소리로 외치게 되니 이는 기도처가 아니라 악을 쓰는 전쟁터처럼 되어 아수라장이되고 만다. 나는 이 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생각된다. 사실 그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발악이었다. 지금도 이런 기도생활이 우리 교회 안에 팽대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과 동산에 오르셔서, 돌 던질 만큼의 거리를 두고 너희도 나와 함께 기도하라고 당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42) 하셨다. 여기서 ‘기도하여’는 ‘계속 기도하심’을 뜻하며,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이란 말도 ‘계속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이라는 조건적 청원이다.
마가복음에는 이 부분을 예수께서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5,36)라고 기록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못박히심을 심히 두려워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인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또 일부 목사들은 그렇게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예수께서 그런 마음을 갖고 계셨다면 성경의 예언의 말씀들을 스스로 실행하시면서 까지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겠는가? 만약 당신이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할 때 스스로 고통의 길을 선택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런 의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일이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모든 영광이 아버지에게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전재로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의 교훈이 아니라 내 아버지로부터 보고 들은 대로 말한다고 하셨다. 그는 창조자이시며 하나님과 그의 성령과 삼위일체 하심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아와 오직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함을 대전재로 하셨다.
그러므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42) 하신 말씀은 겸양을 나타내는 반어법으로서 ‘이 영광의 길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내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마가복음의 기록으로 더욱 분명해 지는데 예수님은 여기서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전능하심을 언급하셨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계획대로 실행하실 수 있으니 이 영광은 내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조차 나의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하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기도하심으로 예수께서 얼마나 힘을 쓰셨는지 알 수 있다. 43절에는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기록하였고 다시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땅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44) 기록되었다. 여기서 사자는 천사로서 주께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신 후에도 나타나 수종을 들었다(마4:11).
흥미롭게도 여기서 사용된 ‘힘쓰고 애써’라는 헬라어 ‘아곤’은 경기에서 유대된 말로서 ‘투쟁’과 ‘경기’를 뜻하므로 예수께서 얼마나 심적 투쟁을 겪으셨는지를 알 수 있다. 어쩌면 이때 사단이 그 마음 속에 나타나 ‘꼭 네가 이 일을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누구라도 또 어떤 방법으로 할 수 있는데 네가 스스로 나서려는 것은 무슨 이유냐? 네가 정녕 사람들 앞에 왕이 되고 싶은 것이냐?’ 하였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모든 시험에서 이기신 아들의 충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하나님 우편에 앉히시고 만군의 주로 세상을 통치하게 하신 것이다. 이에 바울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 나가 하시고”(엡1:20,21)라고 증거하였으며 후일 계시록 기자도 예수께서 받으신 영광을 칭송하여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4:11) 기록하였다.
B. 제자들의 상황
예수께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셨던 제자들의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그들은 슬픔을 인하여 잠들어 있었다. 예수님은 일어나 잠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와 보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번이나 독려하시며 “너희가 나와 함께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26:40) 하시며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다’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 교인들은 새벽예배에 나아가 청산유수처럼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기도에 대하여 많은 고통을 받게 되곤 한다. 다른 목사님들에게는 부끄러움이 될지 모르지만 나는 정말 기도를 못하는 목사 중의 한 사람이다.
나는 어떤 분들처럼 청산유수의 기도를 하지 못한다. 나는 고요한 가운데 주 앞에 나 자신을 드리는 기도를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내가 기도하는 동안 가슴 깊은 곳에서 아픔을 느끼게 되고 나도 알 수 없는 심한 눌림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내 영혼은 깊은 평안을 감지하며 나도 알 수 없는 지극히 깊은 영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
어떤 때는 몇 시간이 흐르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잠시잠시 의식을 가다듬고 무엇인가 가리워진 영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애를 쓰곤 한다. 그러나 결국 내가 정작 바라던 높은 곳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깊은 심연에서 깨어나곤 한다. 그때 나는 마치 모태 안에서 누리던 태아의 평안이 있었음을 내 영이 안다. 이와 같이 기도는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선택의 중대한 결정을 할 때 자기 중심적인 마음의 유혹을 이기기 위한 지혜이기도 하다.
IV. 닭은 아침마다 운다 (47-7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61)
A. 배반과 제자들의 대응 (47-51)
이 내용들은 사실적이고 현장적 실황이다. 이 내용에 더 다른 의미를 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 일은 성경이 미리 말한 바 모든 내용이 현실 속에서 그대로 실현된 증거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무리들을 데리고 예수께 입 맞추려고 가까이 오자 주께서 미리 아시고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하셨다.
제자들은 어찌 될 상황을 알므로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하고 베드로가 칼을 들어 그들 속에 있던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다. 이에 예수께서 “이것까지 참으라”하셨다. 여기서 사용된 참으라는 헬라어 ‘에아오’는 ‘용납하라’는 뜻이다. 이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또 예수께서 스스로 그 뜻을 따른 것이므로 그들을 용납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귀를 만져 고쳐 주셨다. 이 일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 마지막 치유하심이기도 하다. 이는 떨어진 귀를 고치는 외과적 수술에 해당하는 기적으로 의사 누가가 기술한 것이 흥미롭다.
B. 잡히심의 승인(52-53)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52) 물으시며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53) 하셨다. 이로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도덕적 가치는 자발적인 희생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성전에서 공개적인 체포를 하지 못하고 개인 기도시간인 사적인 생활 중에 체포하였다. 이때 예수께서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하신 것은 자신이 그 길을 가는 것은 스스로의 자발적 선택이지만 그들이 예수를 체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 속에 허락하심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처럼 사단이 하는 일도 하나님의 허락하심 없이는 할 수 없다.
C. 죄의 타성과 베드로의 회심(54-62)
그들은 예수를 잡아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 갔다. 이에 베드로도 멀찍이 따라가 사람들이 불을 피고 쪼이고 있는 뜰로 들어가 그들 가운데 앉았다. 그 때 여종 하나가 베드로를 알아보고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 말하니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 여자야 나는 저를 알지 못하네’라고 답하였다.
조금 후 다른 사람이 그를 보고 ‘너도 그 당이다’ 말하니 ‘이 사람아 나는 아니야!’라고 부인하였다. 또 한 시간 후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자 베드로는 거듭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겠다!’ 말하였다. 마태복음에는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부인하였다고 기록되었다. 그때에 닭이 울었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닌가?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은 그 어떤 상황에 이르지 않으면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번연히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인하는 것이 습관화 되었기 때문이다. 기도하고 정직한 말과 행동이 습관화 되지 못하고 거짓말하고 죄를 부인하고 죄를 감추는데 습관화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성경이 깨우쳐 주지 않으면 결코 돌아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에서 다윗에 밧세바를 범하고도 그 죄를 숨기고자 그 녀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 앞에 세워 죽게 하였다. 그런 일을 할 때 성령의 충만한 생활을 하던 다윗이 자신의 행동이 죄악인 것인 줄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죄의 습관은 항상 자기 중심적인 관점에 있어 스스로 그 부끄러움을 가리우려는 습성에 젖어 있게 된다. 그때 선지자 나단이 나타나 그의 죄를 고하였을 때 그때서야 다윗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단이 너를 청구하였으나 내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닭이 울기 전에 내가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 미리 말하여 이 일이 이룰 때에 베드로로 회개에 이르게 하신 것이다.
나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치면서도 현실 속에서 내가 범하는 죄에 대하여 둔감하다. 목사로서 당연히 하지 못할 말과 행동을 하고도 천연덕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다 어느날 내가 행한 죄와 비슷한 일로 누가 망신을 당하는 것을 보던가 어떤 때는 테레비 드라마를 보다가 나의 수치를 발견하게 되어 회개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지금도 주를 믿는 우리에게 닭은 울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닭은 오늘도 내일도 또 언제까지라도 아침마다 울 것이다.
D. 공회심문 (백성의 장로들 – 대제사장과 서기관)
대제사장의 뜰에서는 예수를 수직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때리며 선지자 노릇하는 자여 너를 친 자가 누구냐고 희롱하였다. 날이 새자 백성들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공회로 끌어 내어 “네가 그리스도냐?”고 물었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않을 것이다” 하시며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69)하셨다.
이에 그들이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물으니 예수께서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로다’ 하셨다. 이 또한 주님은 누구의 권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들의 올무에 드신 것이다. 이에 그들은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으니 무슨 증거를 더 요구하겠는가 하고 공회의 심문을 마쳤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며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의 마음을 억제하고 스스로 성경에 미리 말씀하신 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신 것이다. 또 이 과정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권세로 하나님의 뜻을 피하여 스스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 된 우리가 자신에 대한 그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으나 그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항상 삶 가운데서 닭이 울 때마다 돌이켜 회개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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