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23:28) 만왕의 길
(눅 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목격하게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데 그 하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그리고 부활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에 관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뜻으로 성취된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 것이다.
만약 이 두 가지 사실이 없다면 성경은 그 존재 가치를 말할 수 없으며 기독교 또한 이념과 철학을 가르치는 다른 종교들과 다를 바 없다 하겠다. 변할 수 없는 이 두 가지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유이자 또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영광의 토대가 된다.
유대교의 공회로 끌려간 예수님은 백성들의 장로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심문을 받았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네가 그리스도어든 우리에게 말하라’ 욱박질렀다. 이에 주님은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눅22:67-69) 답하셨다.
주의 말을 들은 그들은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반문하였다. 이에 예수님은 거침없이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눅22:7) 대답하셨다. 이 말을 들은 그들은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한가 하며 예수님을 유대 총독인 빌라도에게 끌고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총독에게 끌고 나아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곧 그리스도라 하였다’ 고소하였다. 하나는 단일 유대교 국가인 이스라엘의 종교적 이단성을 언급한 것이고 두 번째는 로마 속국으로서의 정치적 논쟁을 고소의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었다. 이에 주님은 “네 말이 옳도다” 답하였다. 1차 심문을 마친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고소인들에게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다’ 하였다. 빌라도의 이러한 결론을 내린 것은 ‘유대인의 왕’ 이란 명분은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문제로서 로마정부가 끼어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당시 로마정부는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자주권을 승인하는 것으로 정치적 구속력을 갖고 있었다. 이에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이슈에 말려들기 싫어 예수께서 갈릴리 사람인 것을 알고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에게 다시 보냈다.
I. 유대인의 왕
(눅 23: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A. ‘유대인의 왕’ 이란 이름의 전래
성경에서 ‘유대인의 왕’이란 말은 신약적 개념이다. 물론 구약에서도 유대인의 왕에 대한 뉴앙스를 가진 내용들은 많이 소개되었지만 이 호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복음서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유대인의 왕이란 다윗의 위를 이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뜻한다.
구약의 선지자 스가랴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예언하였다. 우리는 이미 20장 38절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이 말씀을 스스로 성취하신 것을 보았다.
또한 복음서의 시작을 살펴 보면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나타나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1-33) 전하였다.
이 말씀이 성취되어 마리아가 그 남편 요셉을 따라 베들레헴에 올라가서 아들을 낳았고 그 이름을 천사가 전한 말을 따라 예수라 칭하였다. 이 때 동방의 박사들이 메시야의 별을 보고 예루살람에 찾아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마2:2) 하였다. 이와 같이 유대인의 왕이란 유구한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이상의 등불로 각인되어 온 이름이었지만 정작 유대인의 왕이 탄생하자 그를 찾아 나선 것은 이방인 선각자들이었다.
B. 예수님의 증거
예수님은 달란트의 비유, 열므나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하여 많은 소개를 하셨으며 이미 우리가 누가복음 19장에서 본 것과 같이 후일 예수께서 왕이 되기를 원치 않았던 많은 사람들은 모두 멸망을 받았으며, 인내로 그리스도의 나라를 소망하여 자기 위치를 지킨 종들에게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는 권세를 받았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천국 백성들의 삶에 대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3)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10) 말씀하셨으며 제자들에게 “나라가 임하옵소서” 기도하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가르치셨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 들어갈 조건을 말하여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20) 하시며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2) 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말씀은 모두 그리스도의 왕국의 개념 속에서 나온 말씀이다.
C. 반대자들의 증거
흥미롭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인 것은 예수를 반대하는 자들의 입에서도 증거되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가 그가 자칭 왕 곧 메시야라 하였다고 고소하였을 때, 빌라도는 예수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들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요18:34,35) 물었다. 이때 주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요18:36) 대답하셨다.
이에 빌라도가 ‘그럼 네가 왕이 아니냐?’ 묻자 주님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해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18:37) 대답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분명하게 자기를 가리켜 ‘유대인의 왕’이라 증거하셨다.
빌라도의 심문을 받은 후 군사들은 예수께 자줏빛 겉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씌우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리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조롱하였다. 군중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내어 주며 “보라, 너희의 왕이라.”고 말하고 십자가에 못 박을 때 히브리어와 로마와 그리스말로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을 달았다.
D. 유대인의 왕의 포괄적 의미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유대인의 왕과 이방인이 우리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에 대한 의문이다. 성경의 증명과 같이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이라 할 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에게 있어 유대인의 왕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역사적 사실로 밖에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유대인의 왕이란 기록을 가지고 설왕설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유대인의 왕이란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갭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이유이다. 이에 바울은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엡2:13-15)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만의 왕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왕 곧 만 왕의 왕이신 것이다.
신약성경은 여러 곳에서 장차 예수께서 통치하신 그리스도의 왕국을 소개하고 있다. 바울은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딤전1:17) 증거하였으며 다시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 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딤전 6:15) 증거하였다.
또한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옷과 그 다리에 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쓴 이름’ 이름을 보았으며 (계19:16) 그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한 검으로 만국을 치시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릴 것이라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는 유대인의 왕이시며 만 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심을 알 수 있다.
만약 누가 당신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삶의 왕이며 주이신가?” 묻는다면 당신의 답변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나는 그에게 받은 은혜가 별로 없다. 나는 내 능력과 힘으로 살아왔을 뿐이다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비록 세상에서 풍요롭게 잘 살지는 못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바라보며 믿음을 지켰다 말할 것이다.
II. 십자가의 길(26-38)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A. 구레네 사람 시몬의 강제 봉사
26절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을 향해 올라갈 때 병사가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웠다. 시골서 유월절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군중들 속에서 십자가 행렬을 만나 졸지에 봉변을 당한 것이다. 아마 그는 건장한 몸을 갖고 있어 병사의 눈에 쉽게 뛰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봉변은 그의 운명을 바꾸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잠시 대신 지는 고통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혼의 구주이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후 교회시대에서 그의 이름은 복음의 동반자로 소개되고 있다. 마가는 그에 대하여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막 15:21)라고 그의 출신과 가족을 소상히 소개하였고 후일 바울은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롬 16:13) 소개하여 구레네 사람 시몬이 그의 가족과 함께 복음의 대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기술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는 우연한 일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을 가리켜 새옹지마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B. 예루살렘의 딸들을 향한 염려
또한 오늘 우리는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갈보리 언덕을 향하여 걸어가시는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유대인의 왕이 아니심을 보게 된다. 그는 처음부터 만왕의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셨고 이제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 주님은 스스로 갈보리의 길을 선택하신 것이다. 이제 그의 이름은 온 세상 가운데서 모름지기 만 왕의 왕으로 불리게 된다. 이 역사적인 순간에서 그는 또 다시 장래에 있을 일들에 대하여 예고하며 복음의 대열에 참여한 우리를 깨우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를 보시며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8)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예루살렘의 딸들’이란 호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씀은 스가랴 선지자로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슥 9:9) 에서 언급된 말씀이다.
이미 이 말씀은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친히 성취하신 바 있다. 요한은 후일 이 때 일에 대하여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요12:13-15)라고 증거하였다.
여기서 시온은 예루살렘의 높은 산 봉우리를 지칭하는 것이지만 이는 예루살렘의 핵심을 뜻하므로 예루살렘의 딸이나 시온의 딸은 궁극적으로 같은 의미라고 하겠다. 그러면 이제 이들이 누구를 지칭한 것인가는 확연해졌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된 그의 교회를 뜻한다.
후일 바울은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9:33) 증거하였고 다시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롬11:26)라고 증거하였으며 히브리서 기자도 말하여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12:22-24) 증거하였다.
또한 베드로 사도도 말하여 “성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벧전2:6) 증거하였고 계시록 기자는 후일 하늘에 펼쳐진 영광의 날을 바라보며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것이 있도다” (계14:1) 증거하였다.
계속하여 예수님은 그들을 바라보며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도다 하리라”(29) 하셨다. 이때 예수님은 어떤 날이 이를 것을 전제하셨다. 이 말씀은 매우 역설적이지만 성경 특유의 결과론적 반어법이다. 만약 당신 앞에 전쟁의 날이 임하였을 때를 가정한다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매우 실감나게 들릴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복음적 고민을 로마서에서도 발견하게 되는데 바울은 로마교회를 칭찬하며 “내가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1:8) 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글에서 우리는 바울의 노심초사를 보게 되는데 그로하여 바울은 어떠하던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로마교회로 나아갈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였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생활의 허점을 지적하며 ‘내가 너희를 보기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고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하였다. 이는 마치 집 떠난 어린 아들을 노심초사하는 아비의 마음과도 같다고 하겠다.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를 향해 이처럼 고민하는 것은 그들은 아직 복음의 영역에 도달치 못하여 다른 이방교회처럼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음을 역행하여 생활 속에서 의로움이 나타나지 못하였고 도리여 불의로서 진리를 막는 생활을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길이 로마로부터 시작된 그 시대에 로마교회의 온전치 못한 믿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직시한 바울 사도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그러므로 십자가를 목전에 두신 예수께서 그를 따르며 통곡하는 예루살렘의 딸들을 보시며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장차 교회 가운데 나타날 이러한 비극의 사태를 미리 보시고 하신 말씀일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앞에서 장차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시며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다시 없으리라” (막 13:17-19) 말씀하셨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이 땅 모든 사람들 속에 나타난 대환난의 때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교회의 끝에 나타날 환난의 날을 미리 보고 계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능히 그날을 피할 수 없다면 유대인의 왕을 고대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준 유대인들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계속하여 예수님은 “그때에 사람이 산들에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에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30) 하셨다. 흥미롭게도 이 말씀은 구약의 호세야 선지자로 미리 하신 말씀이다. 호세야는 “이스라엘의 죄 된 아웬의 산당은 패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저희가 산더러 우리를 가리우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호 10:8) 기록 하였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호세아서 10장을 보아야 할 것이다. 호세야는 10장 서두에서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호 10:1) 증거하였다.
여기서 말한 ‘열매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는 말할 것도 없이 이스라엘을 뜻한다. 또한 예수님과 그의 몸인 우리 교회를 말한다(요15장 참조). 하나님은 죄의 세상에서 의로운 삶의 모범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고 율법을 주시고 많은 선지자를 통하여 선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하셨다. 이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이 그 후손의 삶 속에 온전하게 이루어지기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포도나무의 열매를 자신의 산업을 쌓는데 급급하였다.
그러므로 호세아는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고 책망하였다. 이는 앞에서 바울이 말한 바 로마교회의 딜레마이다. 다시 말하여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교회성장에만 급급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하심을 얻지 못하는 결과라고도 하겠다.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것은 “산들에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산들에 대하여도 우리를 덮으리 하리라”(30)고 하신 말씀이다. 이는 재물과 하나님을 향한 두 마음을 품은 이스라엘 이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게 됨을 보고서도 더욱 마음이 완악하여 회개치 않고 자기들이 믿고 따르던 산을 향하여 더욱 힘을 쓰고 있음을 책망하신 것이다.
계시록 기자는 이 말씀이 그대로 성취될 것을 미리보고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6:15-17) 기록하였다.
이 말씀과 관련하여 오늘 우리 교회들의 실태를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어떤 교단에서는 교회 가운데 누룩처럼 퍼져나가는 ‘알파코스’에 대하여 말하기를 알파코스 중에 내적치유 원리만 제하면 나무랄 것 없이 가장 좋은 전도 프로그램이라고 공표하였다. 그렇다면 앞으로 문선명이의 원리강전이나 여호와 증인의 파수대 조차 한국교회 안에 자리잡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고후 6:14,15) 하였으며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은 서로 대적한다 기록하였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들을 다시 예증하며 “푸른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한탄하셨다. 잠언서 기자는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잠 11:31) 경고하였으며, 또한 바울도 이를 염려하여 자긍하는 이방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롬 11:21) 경계하였다.
C. 인류를 위한 예수님의 간구
이 말씀을 하신 후 갈보리 언덕에 오르신 예수님은 두 행악자와 함께 사형에 집행되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이때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입니다”(34) 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마지막 그 순간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신 것은 오리라 하신 왕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에도 군병들은 예수의 입은 제비 뽑으며 백성들을 서서 구경하며 또 종교지도자들도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조롱하며, 군병들도 신 포도주를 마시우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조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께서 자기의 왕됨을 거절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그들이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함을 용서해달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으며 나는 과거의 때에 나의 가는 길과 나의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한체 방황하던 시절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만약 하나님의 계획과 그로 인하여 나의 나 됨을 알았다면 그처럼 세상을 허망하게 살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예수를 알지 못하는 영혼들은 자신이 안개와 같은 존재임을 알지 못한 체 오직 자기를 위하여 먹고 마시고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기의 영혼을 자기 스스로 지옥되게 하는 것이다.
III. 유대인의 왕의 최후(39-5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43)
A. 최후의 구원자(39-43)
예수님은 두 행악자를 좌우편에 두고 십자가 못박히셨다. 그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걸렸다. 이 때 행악자 중의 하나가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비방하였다. 이에 한 사람이 그를 꾸짖어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안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였다. 이처럼 영혼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깨닫는 자와 깨닫지 못하는 자로 나누인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다시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42) 간구하였다. 그는 감히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달아 자신의 영혼의 구원하여 달라고 하지 못하고 자기를 생각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이에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다. 여기서 낙원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잠시 잠들어 쉬고 있는 영혼의 대기소이다.
이로서 행악자 중 한 사람은 낙원에 들어 갔고 한 사람은 지옥 곧 하데스로 들어간 것이다. 이처럼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예수를 믿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예수께서도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를 향하여 그의 날에 우리가 잠든 자들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할 것이라 증거한 것이다.
B. 유대인의 왕을 마치심(44-56)
예수님은 오전 9시 경에 못박히셨으므로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을 때’는 제 육시 곧 정오에 해당한다. 이는 어떤 장애로 인한 천체의 이상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자 되시며 운행자이신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 천지만물도 고개를 숙인 것이라 하겠다. 이런 상황은 제 구시 곧 오후 3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수천년 동안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고 있던 성소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졌다. 이는 제사장의 시대의 종결을 의미한다.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 몸으로 죄의 희생을 드리셨으므로 이제 그의 이름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성소 안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영혼의 죄를 위한 대리자는 더 이상 필요없다. 이제 우리는 오직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 이로서 그는 우리의 주요 만왕의 왕이 되신 것이다.
끝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46) 기도하셨다. 이 세상에 누가 있어 아들의 영혼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 사단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그는 그의 영혼을 관여할 수 없다. 그는 처음부터 창조자이시며 만군의 군이요 만왕의 왕이시며 천지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을 현장에서 목격한 백부장 하나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증거하였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도 그의 이름을 아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열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은 자기의 의지가 필요하다. 어떤 상황일지라도 또 누가 무슨 말을 하던지 그 영혼이 주를 향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신다. 이 은혜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그의 영광의 날에 이를 것이다. 아멘!
C. 장례준비와 계명 속의 사람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유대인의 왕의 길을 마치셨다. 이날은 유대인의 왕의 길을 마치시고 이제 만 왕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날이다. 이제 그는 하늘에 오르사 이 땅에서 자기의 왕국이 이루실 때를 준비하시고 예루살렘의 딸들 곧 그의 몸인 교회를 이 땅에 세우셨다. 이제 그의 몸된 교회가 그리스도의 뜻하신 바를 이루실 때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친히 오시어서 만왕의 왕으로서 그의 교회들과 함께 천년 동안 이 세상을 통치할 것이다. 이를 위해 유대인의 왕은 세상의 죄를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셨다. 그러나 세상은 아직 남은 일들을 하여야 했다.
예수께서 죽으시자 공회의원 중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나아가 예수의 장례를 위해 시체를 달라고 하였다. 그는 공회에 결의에 가타하지 않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의 시체를 찾아 세마포에 싸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바위에 판 무덤에 안치시켰다. 다른 복음서에는 밤에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왔던 유대인 관원 니고데모가 향품 백근을 갖고 와 그의 장례를 준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처럼 극악한 세상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항상 예비되어 있었다.
그날은 안식일 전 예비일이었다.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마음이 매우 분주했을 것이다.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 온 여인들도 그의 무덤과 또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확인하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였다. 이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나 이제 유대인의 왕을 위해 사람들이 할 것은 고작 장례준비에 불과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었다.
유대인의 왕 예수는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죽으셨지만 그의 백성들은 아직 계명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숙명적인 삶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들의 정치적 굴레 속에 사는 예루살렘의 딸들도 아직은 이 굴레를 벗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시는 날 이 모든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다. 이제 당신도 당신의 목에 있는 종교적 멍에를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 앞에 다시 오실 왕을 준비하는 길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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