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4:49) 능력이 입히울 때까지
(눅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은 시작부터 끝 부분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다른 복음서에서 볼 수 없는 내용들이 간간히 소개되며 타 복음서와 차별을 하면서도 의사 누가만이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어휘가 읽는 사람들을 매료 시킨다.
지난번 마가복음을 강해할 때만해도 성경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을 꼽으라면 단연 마가복음이라고 말하던 내가 누가복음을 끝내면서 그 생각이 달라졌다. 역시 성경은 그 어떤 부분도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하나님의 지혜이다.
누가는 마지막 장에서 다른 복음에서 언급되지 않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엠마오로 행한 두 제자의 회심은, 탕자와 삭개오의 회심과 10장에 소개된 70인 제자 그리고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와 함께 누가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백미(白眉) 중의 하나이다.
I. 천사의 증거(1-12)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7)
A. 그들은 일상으로 돌아 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 이후 갈릴리로부터 예수를 따라 온 여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를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들의 일상 속에서 안식을 쉬었다. 이것이 변하지 않은 인생의 일과이다. 개인의 사건이든 국가적 중대사이던 이 땅의 인생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각 나라의 정해진 틀 안에서 일상을 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율법을 폐하셨음에도 유대인들의 일상에서 안식일은 뛰어넘지 못할 삶이었다. 은혜의 길이 열렸는데도 그들의 세상은 여전히 율법의 계명 속에 있었다.
B. 안식 후 첫날
안식후 첫날 새벽 여인들은 예비한 향품을 갖고 무덤에 왔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무덤 입구를 막은 큰 돌이 굴려 열려져 있었다. 마가복음에는 여인들이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걱정하면서 무덤으로 달려 갔으나 돌은 이미 천사들에 의해 옮겨져 있었다.
여인들이 무덤에 들어가니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고 시체를 싼 옷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그 옆에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서 있었다. 여자들이 두려워 땅에 엎드리니 두 사람이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5,6) 말하였다.
C. 두 천사가 깨우친 것
이는 주께서 생전에 제자들에게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 나리라 내가 살아 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14:28) 하신 말씀을 가리킨 것이다. 천사의 말을 들은 여인들이 돌아가 사도들에게 고하였다. 누가는 이 여인들이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그리고 저희와 함께 한 다른 여자들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역시 남자들보다 여인들이 오히려 강인한 것 같다.
D. 여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사도들에게 고하였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였으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 가 무덤 안에 세마포만 있음을 확인하고 기이히 여겼다고 기록되었다. 마가는 주께서 제자들이 식탁에 모여 있을 때 나타나 이들의 믿지 못하는 완악한 마음을 책망하셨다고 기록하였다.
우리 또한 성경에 우리를 향한 모든 것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었음에도 우리의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헤매일 때가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본 것만을 믿으려 한다. 다시 말하여 체험적 신앙을 요구한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예수께서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전하고 있다.
II. 뜨거운 마음(13-35)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32)
A. 글로바와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은 두 제자
13절부터는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기록되었다. 바로 엠마오로 길을 떠나던 글로바와 또 다른 제자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었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힘을 목격하였던 자들로서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고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전하는 인들의 말을 사도들과 함께 들었던 제자들이다.
B. 예루살렘에서 11km 떨어진 엠마오
엠마오는 온천이란 뜻으로 예루살렘 북쪽으로 11km떨어진 도시이다. 아마 그곳에 온천이 있었던지 어쩌면 그동안 그리스도를 따르던 3년의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의 길을 준비하기 위한 휴양 길인지도 모른다. 본문에 의하면 그들은 그 날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매우 슬퍼하고 있었고, 흥미롭게도 예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과 동행하셨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왜 그렇게 슬퍼 보이느냐고 물으셨다.
이 자리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신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부활하셔서 행하실 그많은 일들을 제쳐 놓고 자기 살겠다고 길 떠나는 제자들 그것도 사도도 아닌 일반 제자들을 만나러 나타나셨으니 말이다. 이 내용을 살피면 예수님인 이날 오후 대부분을 그들 속에서 함께 보내셨기 때문이다.
부활 후 자신을 보이신 사건들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제자도 또한 덜 특별한 사람도 없다. 그에게 있어 그와 관계된 사람들은 모두 중요하신 것이다. 물론 척 스미스 목사님이나 빌리 그레함 같은 유명한 목사님들은 귀하여 여기시고 그들을 통하여 커다란 일들을 하시지만 오늘 말씀을 볼 때 주님에게 우리 모두는 매우 중요한 존재들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눈에 예수께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길가는 보통 행객으로 보이셨던 것이다. 더욱이 이스라엘이 모두 알고 있는 십자가 사건을 알지 못하는 그를 보고 답답한 사람으로 조차 여기심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것은 꼭 예수께서 그의 모습으로 보이셔야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형상이 친히 보이던 아니던 우리 옆에 함께 하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이 예수인 것이 우리를 설레게 한다.
C. 제자들의 관점
그들은 예수께 당신은 몇 일 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일한 이방인이냐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하여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다. 이는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게 하기 위하심이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주께 솔직히 드러낼 때에 주께서 우리에게 다가 오시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많은 시간 동안,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려고 노력할 때까지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잘 모를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과 상담자에게 자신의 기쁨을 말하기도 하고 또 슬픔과 문제들을 털어 놓는다.
그들은 예수께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에 대하여 소상히 말하였다. 그들은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라고 소개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제자임에도 그들은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말과 일에 능하신 예언자라고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주인되시고 우리 안에 함께 하신 예수께서 과연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우리가 그가 만왕의 왕이시며 창조자이시며 전능자이심을 믿을진데 우리의 모든 문제를 가지고 전전긍긍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이처럼 예수에 대하여 온전한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눈으로 본 바와 같이 예수께서 그들의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에 의해 사형판결에 넘김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그들은 이 일에 증인이었다. 인간이 자신이 눈으로 보고 확증한 체험적 사실을 뛰어 넘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계속하여 그들은 “우리가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 째요”(21) 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구속자라고 바랐다고 털어 놓았다. 그러나 바란 것과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예수께서 사람인 것을 알았고 또 이스라엘의 구속자이길 바랬다. 그가 말과 일에 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이 알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예수께서 사람이심과 동시에 창조자이시며 신이시며 전능자이시며 권세자이심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계속하여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를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는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다”(22-24) 말하였다.
참으로 그들은 믿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틀림없다. 어쩌면 믿음이란 것 조차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자기들에게 제일먼저 소식을 전한 여자들이 ‘우리 중에 어떤 여자’’라고 증거하였다. 우리 중에 하나라 그들과 함께 주를 따르던 공동체 일원이다. 그들은 자기의 지체된 여자들의 말을 믿지 못했을 뿐더러 천사들이 전한 말 또한 믿지 못하였다.
더구나 천사는 하나도 아닌 두 사람이었지 않은가? 이들의 머리 속에는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확신만이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한 제자들의 증언도 믿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주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자신들의 눈 앞에 생긴 현실적 체험만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말씀에 마음을 두지 못하며 그의 택하신 제자일지라도 믿음 밖으로 밀려 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주의 일을 하다가 현실만 바라보고 자포자기 할 때가 있다. 나는 최근 우리 교회 가운데 좋은 일들이 한동안 있었다. 새로운 사람들이 하나둘 씩 늘어났고,,성도들 속에 기뿐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눈에 나타나도록 무엇인가 우리를 헤치려는 어떤 역사가 느껴져 왔다. 나는 현실적으로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당황하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는 풍랑을 주께서 제어하시기를 믿고 기도할 뿐이다.
이러한 믿음의 기도는 오랜 믿음의 경륜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동안 사실 나는 현실 속에 나타나는 일들 곧 눈 앞에 일들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며 또 체념하기 일 수였다. 그러나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한 싸움이다. 우리가 이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역사하는 우리의 믿음이며 그 믿음 가운데 성령의 능력이 마귀의 역사를 물리치시는 것이다 할렐루야!
E. 예수님은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관점에 관심을 갖고 계셨다.
그들의 말을 통하여 그들의 불신앙을 아신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5,26) 책망하셨다. 여기서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이란 성경에 언급된 복음의 메시지를 뜻한다.
계속하여 예수님은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 아마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뱀이 여자의 후손의 뒷꿈치를 상하게 할 것을 언급하셨을 것이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게 하셨던 일도 자신에 관한 말씀이심을 가르치셨을 것이다.
또한 출애굽기에서 장자의 죽음을 피하기 위하여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던 일과 레위기에 기록된 모든 희생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전조였음과 시편 기자가 말한 건축자들에 의해 버려진 돌이 자신에 관한 것임도 말씀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시편 22편의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그들이 내 수족들 찔렀고 내 옷을 제비뽑느니라"고 묘사된 말씀과 이샤야 50장에서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라고 예언된 기록 그리고 이사야 52장에서는 그의 얼굴이 상하여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도 설명하셨을 것이다.
또 예수님은 이사야 53장에서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리고 그의 죽음에서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고 하신 말씀이 무엇을 말한 것인지를 설명하셨을 것이며, 다니엘서에 기록된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재건하라는 명령이 있은 지 483년이 지난 후 오실 메시야는 끊어질 것이란 말씀과 스가랴로 말씀하신 은 30냥에 배신을 당할 것도 설명하셨을 것이다.
III. 엠마오의 환희(36-43)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36)
A. 많은 시간을 할애하신 예수님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에 취하여 자기들과 함께 유할 것을 강권하였다. 서너 시간 동안 함께 걸으며 제자들의 믿음을 말씀으로 되살리려는 예수님의 열정을 볼 수 있다. 그들의 강권함에 그들과 식탁을 함께 한 주께서 떡을 축사하실 때에야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과 함께 하신 분이 주이셨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보이지 않았다.
오늘날 당신은 어떠한가? 우리가 예수를 믿기 시작한 날부터 얼마나 많은 날을 우리와 함께 하였던가? 사실 그는 우리가 믿기 전부터 우리를 섭리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셨음에도 우리가 그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우리의 믿음이 현실생활에 근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주를 믿는 당신이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면 당신의 마음은 뜨거워질 것이며 그 말씀들은 당신이 삶을 유익하게 하며 당신의 믿음생활을 소망있고 아름답게 만들어 갈 것이다.
그들이 저녁에 엠마오로 도착하여 예수님과 저녁 식탁을 대할 때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실 때 저희 눈이 밝아져서 아마 그들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그들과 성경의 말씀을 나누실 때 이미 그들에게 나타내신 것이었다. 그리고 성경은 이미 그들 마음 속에서 그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었다.
B. 마음의 열정의 회상
주께서 떠나신 후 그들은 그때서야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라고 서로 말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의 마음에서 뜨거운 성경에 관하여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 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9) 증거하였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할 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열정을 갖고 있었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본 후에 그들의 소망도 사라졌던 것이다. 그 식은 마음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심으로 뜨겁게 회복된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의 믿음이 식어서 하나님 나라에 아무런 소망도 느끼지 못하고 열정을 갖지 못하였다면 당신은 지금 바로 성경을 열어야 할 것이다. 당신이 성경을 읽을 때 주께서 당신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져 주실 것이며, 그때 당신은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다시 복음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솟아날 것이다.
IV. 하늘의 능력(44-53)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49)
A. 성경 속의 뜨거운 만남
주를 만난 두 제자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시로 다시 제자들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 오니 열한 제자와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 모여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말하므로 두 사람도 길에서 예수를 만났던 일과 떡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리셨음을 증언하였다. 이에 주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나타나시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다. 얼마나 감격스런 장면인가?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순식간에 생긴 일이라 두려워하며 그 보는 것이 영이라 생각하므로 주께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두려워 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하시며 손과 발을 보이시고 다시 그들에게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하시며 구운 생선 한 토막을 그들 앞에서 드셨다.
이러한 일을 볼 때 우리는 부활의 몸이 우리 현실 세계의 물질적 질서와 전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영이나 몸을 갖고 있고 몸을 갖고 있으나 영처럼 자유자재하여 무소부재하다. 지금 우리의 지혜로는 감당할 수 없으나 장차 주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 떠한 순식간에 부활의 몸을 입어 공중에서 주를 만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르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44) 하시며 저희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 이로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열려야 성경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여 가르치시며 인도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날 것과 또 그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 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 능력이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셨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을까? 이미 그들에게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며 전도의 능력을 주시기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은 그들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천국의 능력을 알게 하기 위한 일시적 체험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세우심을 받은 제자들로서 복음을 완성할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들의 지혜와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B. 권능의 기다림 (50-53)
사도행전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4) 말씀하셨다. 사실 사도행전의 누가복음의 후속 편으로 누가가 쓴 사도들의 교회 개척사이다. 왜 주님은 거듭하여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을까? 이는 그들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권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계속하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말씀하셨다. 그들이 기달려야 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권능이다. 우리의 싸움은 영적전쟁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2) 증거하였다.
문제는 이 말씀은 그 당시의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아니면 오늘날 부름받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인가에 있다. 물론 주의 제자들은 주께서 약속하신 바와 같이 성령의 강림하심을 입었다. 그 능력이 지금도 살아서 우리 교회에서 역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부름을 받은 제자들도 그의 말씀과 같이 능력의 입힘을 받아야 한다. 그 능력이 없이는 우리는 주를 부인하고 또 주의 부활하심을 믿지 못하던 제자들과 같은 힘없는 믿음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위로부터 능력의 입히움을 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달려야 할 것이다.
나는 갈보리채플을 떠나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 그동안 나는 정말 힘겨운 싸움을 해왔다. 내 힘으로서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는 영적전쟁이었다. 물질이며 육체적이며 마음의 유혹으로부터 계속되는 영적전쟁들..이것을 지탱한 것은 오직 나의 예루살렘을 지켜온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학교를 통해서 목사가 되기를 힘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그의 부르심과 그의 인치심 가운데 하늘로부터 능력이 입혀야만 된다.
나는 우리 갈보리채플에 와서 나와 함께 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아 왔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를 견디지 못하여 자기 갈 곳으로 갔다. 그들은 나와 함께 할 사명도 없고 우리와 함께 기업을 나눌 부르심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약속을 믿고 나와 함께 성경의 말씀을 살피며 그 뜨거운 열정 속에서 주의 능력이 입히울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 먼저는 그리스도이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 기록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성경을 통한 바른 교리를 깨우쳐야 하며 또 바른 기도생활과 또한 승리의 소망을 향한 열정적 믿음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위로부터 능력이 임할 때까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으며 떠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을 받는 길이며 주의 약속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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