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각 시대마다 상반된 인생을 살아간 두 사람이 소개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아담의 후손들로서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그리고 사울과 다윗이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로서 한 사람은 성공을 하였고 한 사람은 실패를 하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공한 사람들의 삶은 평탄치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에 소개된 이들의 믿음을 보며, 자신의 삶은 이삭과 다윗을 닮기를 소망하며, 결코 자신을 가인이나 사울에 비유하지는 않는다. 이는 성경이 그들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여 온전치 못한 자들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야곱이 믿음의 조상일지라도 우리는 결코 자신을 야곱에 비유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야곱의 성정과 인간됨이 바람직 못하고 그의 인생이 평탄치 못했음을 우리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흥미로운 것은 우리의 성정과 삶의 방법들이 야곱의 속성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흥미롭게도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을 하여 이긴 사람이다. 이는 실제로 이겼다는 말이 아니다. 호세야 선지자는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호12:3,4) 라고 증거하였다. 이 말씀 속에 우리를 향한 메시지가 있다.
야곱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으로 언약과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에서 자신의 지혜와 방법으로 살고자한 조금도 변화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어 그 기업을 잇고자 했을 때 그가 건너지 않으면 안 될 인생의 마지막 걸림돌이 버티고 있었다.
이때도 야곱은 자신의 지혜로서 얍복강을 건너려 하였다. 그러나 그 강은 인생을 걸머지고 건널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강이다. 결국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어 야곱의 엉치뼈를 치심으로 그의 마지막 카드를 꺾어 버리셨다. 그때서야 야곱은 울면서 하나님께 매달렸던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자라는 기념 칭호를 받았다.
오늘날 말씀을 듣는 당신은 어떠한가? 하나님을 믿는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지혜와 방법으로 세상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 앞에는 꼭 넘어야 할 인생의 문제가 기다릴 것이고 그날에 당신의 엉치뼈가 부러지게 될 것이다. 당신은 그날이 말년에 일어나지 않게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한편, 엉치뼈가 부러져 어쩔 수 없이 비굴한 모습으로 형 에서를 만나야 했던 야곱은 어떠했는가? 그는 관대한 에서의 호의를 거절하고 이방인의 땅 세겜에 살터를 잡았다. 그래도 이방인보다는 에서가 하나님께 가까웠을 터인데도 말이다.
오늘날도 많은 교회들이 이웃 형제 교회와는 손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 어쩌면 장자권을 빼앗길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세상의 방법대로 살겠다는 야곱의 심보가 있어 알파코스도 하고 관상기도도 한다. 그러나 당신의 그 욕정을 벗어버리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의 장자권은 당신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결국 야곱은 사랑하는 딸 디나가 이방인에게 강간을 당하고 분노한 두 아들이 살인을 결의하는 피의 냄새를 맡고서야 벧엘로 올라갈 결심을 한다,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갈 자식들이 세상사람이 다 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하나님의 택한자로 축복을 많이 받았다 해도 내 자식들이 세상에 물들어 있다면 더이상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망가진 자식들을 보고 하나님의 진리 깨달은 야곱은 그때서야 가족에게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자 제의하며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여 의복을 바꾸라고 명령한다. 야곱은 그때서야 거룩한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갈 교회가 세상의 옷을 입고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오늘날 당신은 어떠한가? 과연 당신의 인생은 거룩한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 당신이 아무리 용을 쓰고 살아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인생이요 자식이다. 설혹 승리한 인생을 살고도 당신의 자식이 세상 더러움에 빠지면 그것은 무너진 인생이요 실패된 인생이다. 자식은 하나님의 기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벧엘로 올라가자!(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