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한음성

비트윈(between)

이요나 2010. 12. 4. 12:36

거룩한 삶을 위한 이요나 목사의 세미한음성
이요나 목사에게 이멜을 calvarychapel@hanmail.net 
No.79. 2010. 12.4. (토)  

                     "비트원" (between)

 

 

(빌 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십일월 마지막 날을 보내며 이제 남은 한장의 달력의 두께 만큼이나 내 마음의 여유가 얇아져 있음을 느낀다. 나름대로 숨을 고르며 달려 온 2010년 한해, 과연 나는 이 한해 동안 무엇을 했으며 또 무엇을 얻었는가? 과연 나는 이 해에도 허공을 치며 숨가쁘게 달려 온 것인가?

 

아직은 청춘이라 생각하며 내 앞에 주어진 일들에 충실하고자 애를 써 왔지만 결국 예순의 나이를 뛰어넘도록 내가 한 일이란 고작 다람쥐 채바퀴 넘는 일이 아니였던가? 그러함에도 이처럼 초라하기만한 나를 자기들의 목자로 여기며 올곳게 따라 주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행복이다.

 

비록 소수의 젊은이들이지만 이들만큼은 장래의 소망을 삼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 또 어느날 어느시에 간사하게 하늘거릴지 모르는 터라 나의 인내는 항상 살어름 판이다.

 

신학교 강의를 가는 전철 안에서 펼쳐든 황우건의 비투윈, 목사인 내가 황우건의 비트윈을 펼쳐든 것은 결코 이 책에서 무엇을 얻고자 함은 아니다. 실은 이런 책이 성경과 함께 가방 안에 있다는 것조차 경망스럽고 불쾌하다. (미처 가방 속을 정리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마누라가 없는 탓이라 해두자.)  

 

때에 확인치 못한 문자가 있을까 싶어 아이폰을 여니 세미나에 참여했던 김보임 여집사의 웃고 있었다. "목사님을 만나뵈니 희망이 보여요 감사합니다" 비트윈의 어머니다. 세미나 이틀동안 눈 앞에서 내내 눈물을 쏟던 이 여인은 아들을 위해 목숨을 내려놓은 내 어머니의 환상이다. 이 여인의 소망을 위해 내 어미는 세상을 떠난 삽십육년간 꿈에서도 보이지 않으셨던 것인가?

 

황의건의 '비트윈'의 중간을 쪼갠 책장에서 - 타고난 대로 산다는 것. 그건 그래도 행복한 용기다 - 라는 글귀가 나를 단번에 매혹시켜왔다. 이 주제는 내 젊은시절 커밍의 항변이였다. 그는 이 글 앞에서 - 나도 벅찬 이 마당에 일반 남자 여자 들에게 늘어 놓는 이 다향한 성 정체성들을 과연 어디까지 이해하라고 해야 적당할까? - 독백을 쏟고 있었다.

 

글쟁이들은 붓을 들 때마다 타인과 사이에 끼어 공유할 어휘들을 찾기에 머리를 쥐어짠다. 그러나 글이란 것이 지식과 사고와 식견과 경험이 풍부하다고 해서 써지는 것도 아니고 말을 잘한다고 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모든 예술과 같이 하늘과 육체와 세상을 초월한 세계를 생각할 수 있고, 인생의 밑바닥까지 깨달은 지식의 충만함으로 마음의 풍요를 함께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만의 영역이다.

 

자신의 생각으로 다른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 낸다는 것은 타인의 마음을 눈치로 잡아낸다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많은 글이 있고 많은 그림이 있되, 세상과 공감할 창작이란 욕정을 다쏟아 낸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육체와 이상를 아우를 애절한 사람에게서 나온다.  

 

나는 지금 황의건의 비트윈을 홍보하려는 것도 아니며, 그의 생존철학에 박수를 치기 위함도 아니다. 엄격히 말하여 그는 나와 정반대에 서 있다. 그러나 내가 그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비트윈은 결국 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비트윈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하늘을 감동시킬 긍휼한 분노가 치솟는 것은 황의건의 말이 비루하고 그의 성적욕구가 더러워서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진솔한 고백이 신을 가장한 어느 인간들보다는 훨씬 순진했기 때문이다.

 

나의 분노는 오히려 비트윈이 아니라 G20을 하루 앞둔 대통령의 아침식탁 위에 성큼 올려진 탑 메이져 신문에 실린 전문 광고문 때문일 것이다. 이번 주일밤 KBS 시사토크 4321에서 다시 재생될 이 추잡하고 더러운 이야기 위에 고발자의 한 사람으로 섰다는 그 자체가 견딜 수 없는 모욕이며 부끄러움이다. 이또한 회개의 능력을 체험한 가증스런 인간의 슬픈 속성이 아닐까 싶다. 그러기에 아직도 나는 육체와 종교의 사이에 끼어 바울의 고뇌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롬7장).

 

오늘 우리 믿는 자 모두가 누구도 정죄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육체가 성경을 떠나면 모두 거기서 거기인 것을 모두가 잘 알기 때문이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하늘의 신적 예정과 섭리 가운데 있어, 먼저 된 자나 나중된 자의 영혼이 다 그의 심판대 앞에 있을 것으니 그로하여 모든 육체들이 복음을 듣고 육체를 복종시킬 날들을 기다림이라. 그날에는 우리가 다 한 입술로 오직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만을 찬송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이 오기까지는 이 땅의 모든 인간이 정죄받는 것이 마땅하다.

 

내 손 안에서 떨치지 못하는 비트윈, 이는 황의건의 인생이며 거리로 쏟아져 내린 우리 아들들의 육체의 함성이며, 소돔성의 구원을 기다리는 롯의 눈물이며,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엘리야의 항변이며, 의롭고 거룩한 굿뉴스를 도모하는 전도자의 애통함이며, 구원을 기다리는 한 영혼의 통곡이다. 그러니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수 있는가? (나에겐 더욱 인내가 필요한 시간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에서 노예된 것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20)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다 애통하는 마음으로 그의 은혜를 기다리자! 그것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의 뜻일 것이다.(아멘)

 

 - 그러므로 나는 이 아이의 갈급을 체우고자 하는 육체의 호흡이 다할 때까지 영생의 문에서 기다릴 것이다.(요나)

 

->지난 칼럼 [바로가기]  [회원가입]을 해 주세요!
    Copyright ©2009 by holylife Ministries. All Rights Reserved.

이요나 목사 트위터 이요나트위터
이요나 목사 훼이스북 이요나훼이스북
이요나목사동영상설교 동영상메시지
강해설교의 명문 갈보리채플 서울교회 서울갈보리채플
이요나 목사 아티클 칼럼세미한음성
크리스챤의 아름다운 만남과 교제 크리스챤클럽
동성애, 성중독, 우울증 상담 이요나상담실
한국성경적상담협회 KABC 성경적상담.kr
한국성교육교상담협회

홀리라이프.kr

성경적상담사 양성을 위한 자기대면 교사 과정

갈보리채플 이요나 목사 창세기 강해

동성애 극복을 위한 가이드 라인

이요나 목사의 성령은사 씨리즈 NO.1

선한 사역을 위한 사랑의 모금

'세미한음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리스마스의 약속  (0) 2010.12.25
교회가 동성애를 혐오해야 하는 이유  (0) 2010.12.24
미사일과 생활쓰레기  (0) 2010.11.19
사람의 마음  (0) 2010.11.13
목사의 책임  (0) 2010.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