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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은사3) 예수님은 골치아픈 여자를 좋아하신다?!

이요나 2000. 7. 25. 10:31

(믿음의 은사3) 예수님은 골치아픈 여자를 좋아하신다?!

*서론*

우리는 앞에서 혈루병 여인의 믿음의 과정과 야이로의 믿음의 결단을 만나보았습니다. 이들은 극한 인생의 환난으로 말미암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찾았습니다. 이들에게 닥쳐 온 처절한 삶의 고통은 인간으로 참기 힘든 삶의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들로 하여 이들은 구원자를 갈망하게 되었고 또 그를 만남으로 영생에 이르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성경에 기록된 실제적 사건들로 보아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비극 속에 처한 사람들이 모두 이들처럼 구원의 체험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구원에 이르기까지는 자신들이 스스로 극복해야할 엄청난 장벽들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사건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를 향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엘리야의 시대에 수많은 과부가 있었으나 오직 사렙다 과부만이 구원을 받았고 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나 오직 나아만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극한 상황을 처한 사람들의 믿음의 조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느냐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구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인간의 의지적 선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믿음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일방적인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 아니고 극한 인생의 슬픔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과 투쟁을 완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은혜는 특정한 계급층의 사람으로부터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에게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부르신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구속의 은혜입니다. 오늘 야이로와 혈루병 여인의 구원은 우리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극한 환난을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이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 이르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과 투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혈루병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옷에 손을 대면 나으리라는 신유의 믿음을 가지고 부정한 여인의 몸을 이끌고 군중들의 속을 뚫고 들어가야 하는 투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또 야이로는 계속 그의 마음을 절망으로 이끌고 가는 훼방으로부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지하는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완전한 구원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장애물이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은 또 다른 한 이방 여인을 통하여 메시야를 향한 절대적 소망이 어떻게 구원을 완성하게 되는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리타분한 사람들! *
우리는 성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칭찬한 믿음의 사람 몇을 볼 수 있습니다. 혈루병 여인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만 이방여인에게서도 이러한 믿음은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회당장 야이로와 혈루병 여인을 함께 합친 것과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바로 수로보니게 가나안 여인이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믿음의 아들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음에 관하여는 오히려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들에게 밀리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믿음에 대하여 칭찬을 받은 사람 중 특별한 칭찬을 받은 두 사람이 모두 이방인이었습니다. 그 하나는 여러분이 다 아시는 로마군대의 백부장이고(눅7:2) 또 한 여인은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수로보니게의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마15:28 막7:26)

이 사건은 마태복음 15장과 마가복음 7장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사건은 바로 칠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부터 장로들이 정한 전통적 유전을 지키지 않는 제자들의 생활방법 때문에 공박을 당하신 후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신학적인 논쟁을 일삼는 고리타분한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질려서 예수께서는 차라리 짐승들처럼 자유분방하게 사는 이방인 속에 묻혀서 쉬고 싶으셨는지도 모릅니다.

 

 마가복음 7장24절에는 "예수께서 일어나 거기서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나 숨길 수 없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여인이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제자들이 와서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못들은 척 하고 묵묵히 길을 가는 예수님을 향하여 죽을 힘을 다하여 외쳤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그런데도 냉정하게 아무소리 않고 묵묵한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이상히 여겼던 것입니다.

* 나를 뭘로 보는 거여?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대조하여 살펴보면 이 여인은 예수님이 어느 집에 들어가실 때까지 계속 소리치며 쫓아 왔던 것이 분명합니다. 주께서는 발 앞에 절하며 도와 달라고 애걸하는 그 여인을 바라보며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거절하셨습니다. 그 때 여인은 물러서지 않고 "주여 옳소이다 그렇지만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맞받아 쳤습니다. 흡사 수수께끼를 푸는 것 같습니다. 무슨 선문선답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마태의 기록을 따르면 이 여인의 말에 주께서는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15:28) 말씀 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끝까지 소리치고 따라붙은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이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자!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 아닙니까? 여러분께서는 마태와 마가가 기록한 서로 다른 이 두 문장을 보고 어떠한 느낌이 떠 오르고 있습니까? 머리 한 귀퉁이로부터 희미하게 비쳐 오는 빛이 있으신 분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마태는 그 여인의 대답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기록하였고 마가는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하였습니다. 물론 이렇게 다른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이 사실을 기록하였음으로 한 치의 틀림도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말씀 속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아 골치어픈 여자! *
주께서 마가복음 4장에서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하건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무엇을 들을 것인가 스스로 조심하라"하셨고 다시 "너희가 어떻게 들을 것인가 스스로 조심하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천국의 비밀과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막4장, 눅8장 참조) 먼저 우리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의 상태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그 여인은 어느 집에 숨어드신 예수를 발견하였을 것입니다. 마가가 그 당시 상황에 대하여 예수께서 두로 지경의 한 집에 들어가서 쉬려 하셨으나 숨길 수가 없었다고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길에서부터 소리지르며 따라 온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길에서부터 시작되었든지 집에서부터 시작되었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쨌든 이 여인은 골치 아픈 여인이 틀림없었습니다. 객지에서 만난 낯선 이방여인이 소리를 지르며 달라붙은 것은 과히 기분 좋은 광경은 아닙니다. 이 당시 사실 유대인은 이방인들과 상종을 하지 않던 시대였습니다(요4장 참조) 더군다나 이방 여인이 메시야를 향하여 '주인님'하고 따라붙는 것 참으로 거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주인이 되시지만 이 경우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주(Lord)"라는 호칭은 쌍방의 관계가 성립된 후에 부를 수 있는 호칭입니다. 즉 여호와(야훼)와 같은 이름입니다.

* 너 지금 코메디하냐? *
더군다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메시야 언약이며 이스라엘 백성만이 알 수 있는 호칭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호칭은 오직 이스라엘의 백성만이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직함인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인이 우리나라 대통령을 가리켜 "오 나의 주인 되시는 단군의 자손이여!'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 김 대중 대통령이 일본에 갔을 때 일본여인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오 나의 주 단군의 자손이여!'라고 하였다면 그 여인은 미쳤든가 코메디를 하든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주께서 답변을 하지 않으시고 모른척했던 것은 그러한 이유였습니다. 주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친히 아시는 분이십니다. (요2:24) 그 여인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주"라는 의미도 "다윗의 자손"이라는 의미도 그녀는 알 수 없습니다. "주"(Lord)라는 말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직함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 단어는 구약의 '여호와'(야훼)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내게 무엇이 되시는 분'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서만 설립되는 말입니다. 또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메시야 언약인 것입니다. 이 여인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고치려는 일념으로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이 여인이 아는 지식대로라면 가나안은 이스라엘의 대적이며 그의 후손은 다윗의 자손과 아무런 관계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대답은 "너의 말대로 내가 이스라엘의 메시야라면 이방인인 너와 내가 무슨 상관이냐? 나를 부르는 너는 과연 누구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 여인은 두로와 시돈 그리고 데가볼리 일대의 군대 귀신들린 자의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귀신을 쫓으신다는 믿음을 갖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모르는 것을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그에 대하여 알 때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직 그에게 자신을 알리지 않으셨는데 그녀는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여인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온전한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의 딸을 고치기 위한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의 긍휼하심을..*
요즘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에 이끌리어 교회에 나와 주를 찾으며 울고 불고 하지만 과연 이들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일까요? 이들 중에는 입으로만 "오 사랑하는 나의 주님!"하고 외치는 사람은 없는 것인지, 나 또한 그러한 무리 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온전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줄 수 없다"라고 한 것입니다. 자녀는 태어남으로부터 창조주에 의하여 맺어진 관계입니다. 자녀와 함께 사는 애완용이라해도 개와 자녀의 입장은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은 사실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이스라엘의 왕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그러한 답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더니 바로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 대답은 코메디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주님의 말씀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자녀가 될 수 없지만 자녀들과 함께 사는 애완용 개라도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 것입니다. 참으로 때에 합당한 말은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이 여인은 비록 자기가 부른바, 다윗의 자손도 아니었지만 이 여인은 그들의 상 밑에서 빵 부스러기를 주워먹는 위치에라도 서기를 소망한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을 받은 모든 인간들의 메시야를 향한 열망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롬8:21)고 증언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감히 하나님의 장중에 들어갈 수 없는 이방의 여인이었지만 자녀들의 애완용과 같은 위치에서 주의 긍휼하심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 믿음이 그 여인의 딸을 구원한 것입니다. 이제 내일은 백부장의 믿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