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3장-2)야! 너 지금 뭘보고 있냐?!

이요나 2000. 9. 4. 10:40
(요한복음3장-2)야! 너 지금 뭘보고 있냐?!

 

본문말씀 요한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장 두번째 시간입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안된다고 하신 말씀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태어남으로부터 육적인 존재가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존재였지만 하나님의 임재와 교제의 축복을 다시 누리기 위하여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태어남으로부터 영적으로 죽은 인간은 자기 스스로 소생하기 위하여 선행의 지식과 종교적 도덕성, 그리고 규칙과 규제로서 자신을 콘트롤하고 선한 삶을 살기를 노력하였지만 영이 소생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은 니고데모 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향한 축복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이러한 단순한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 못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거듭나야하는 부분을 알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된 이후 인간은 하나님과 교감할 수 있는 통로를 잃었습니다. 오직 그의 정하신 율법에 따라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를 할 뿐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대로 살아가는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말씀을 지키고 그를 예배함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신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우리의 영이 성령과 공유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고 교제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야만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만이 알듯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고전2:11).

 

 오늘날도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날 것에 대하여 말합니다만 사람들이 이러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성령에 대하여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에 속한 사람들과 육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는 커다란 벽이 있는 것과 같이 그들에게 영적인 부분을 설명하는데 커다란 곤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이유!

   성경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하느니라"(고전2:14)고 기록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믿는 사람들과 세상 사람들 간에는 서로 통할 수 없는 영적 장벽이 생기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믿는 우리가 믿지 아니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 불쌍하고 왜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인지 이해가 안되듯이 세상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하는 일들이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인류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죽었던 영적인 부분이 성령에 의하여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볼 수도 들어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의 "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믿지 않는 자로서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믿지 않는 사람들의 공통된 대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세상 사람들과 니고데모의 경우는 다릅니다.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었지만 니고데모는 이스라엘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도 모르느냐?"고 힐문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뱀을 바라보라!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교사로서 토라(율법)을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니고데모는 민수기에 기록된 모세가 가르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 대하여 "당신이 무엇 때문에 우리를 에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민21:5) 고 불평하였습니다. 이것은 모세에게 하는 불평이었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이끌어 내셨기 때문입니다.

 

이 때 여호와께서 불뱀을 보내어 물게 하시어 백성들이 죽어 갔습니다. 이 때 모세가 여호와께 엎드려 불뱀을 떠나가게 하여주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이 때도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어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라고 하시며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아나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좀더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 당시 뱀에 물린 자들이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나름대로 뱀이나 벌레에 물릴 때 사용하는 민간요법이나 의료 행위가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린 명령은 그들을 납득시키기에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독이 온 몸으로 펴져 내려가 죽음 직전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면 살리라"고 말한 모세의 말은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이미 사람들은 모세를 불신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해도 그들은 모세의 입으로 나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모세의 말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것으로서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모세는 장막으로 들어가 청동을 녹여 불뱀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장대에 달아서 회중들이 사는 회막 가운데 세웠습니다. 이 때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에 의지하여 놋뱀을 바라 본 사람들은 모두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인하고 바라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대로 죽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생각을 벗어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 즉 선택적 의지입니다.

 

오늘 주께서는 유대인의 교사 니고데모에게 이 말씀을 상기시키시며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장대에 높히 달린 뱀을 보아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의 선택적 의지를 시험할 것을 예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들어 가기 위하여 스스로 선택하여야 할 마지막 과제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라!

   장대의 달린 뱀은 이것은 예수께서 죽으실 십자가를 미리 예고 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오늘의 본문말씀처럼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마지막 표적이 될 것에 초점을 맞추신 것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이제 당신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즉 마지막 선택적 조건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늘나라와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설명할 수도 없고, 세상의 어떠한 학문과 지식으로도 설명하여도 납득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혜를 초월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광야에 높이 들인 놋뱀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그의 영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되며 또 그의 이름을 힘입어서 영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3800년 전 모세가 놋뱀을 장막 밖에 높이 세웠을 때에도 이와 같은 선택적 조건이 있었을 뿐입니다. 내가 바라 볼 것이냐 부정할 것이냐 이것은 오로지 자기의 의지로 결정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선텍함에는 어떠한 이유와 경로를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지혜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순종할 따름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장대 밑에다 끌어다 놓아도 보지 않을 사람은 죽기까지 보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의 의지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임종 직전에서 종종 보게 됩니다.

 

가족들의 눈물어린 간구를 외면한채 끝내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세상을 따나는 사람들을 볼 때 참으로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 전달되었습니까? 이것은 복음을 전한 사람들을 통하여 전달 된 것입니다. 지금도 구원의 복음은 사람을 통하여 전달됩니다. 그러나 만약에 사람이 구원을 할 만한 어떠한 표적을 요구한다면 그는 그에게 전달된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도 그를 구원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오직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의지하여 주를 바라본다면 그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의지적 선택!

   인간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죽으심으로 우리가 그의 이름을 영접할 때 우리의 죽은 영이 다시 살아나는 과정에 대하여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적 이해로 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령의 인도와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발생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러한 선택적 조건이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바라본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가듭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이해하며 그 영을 통하여 다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서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된 것을 알게 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 속에서 3분의 2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그를 선택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모두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구태여 주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필요 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선택이라는 것은 단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오직 3분의 2의 사람들이 주를 믿을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 나와 당신의 가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또한 아직 그 속에 들아 가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너는 무엇을 볼래?!

   이 문제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물질적 그리고 감정적인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예정하신 축복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 눈에 의지하지 않고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비록 뱀의 모습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를 바라보았다면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의 영을 살려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일까요?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를 예배하기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인간은 무엇인가를 예배하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월성신을 섬기며 어떤 이는 천지만물을 신으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사람을 신으로 섬기며 그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또 술이나 마약, 오락 또 철학과 이념과 지식, 그리고 물질을 신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영적인 부분을 창조하셨고 인간은 그 영적인 부분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채우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배고픔을 채우기 위하여 음식을 먹어야 하듯이, 또한 정서적 감정과 어떠한 것을 알기 위하여 지식을 탐구하듯이 우리 안의 영은 예배할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 대상을 무엇을 통하여 찾을 것입니까? 당신의 바라보는 눈으로 그를 찾고자 하십니까? 당신의 바라보는 공공 속에 나타나는 어떠한 물체와 이적들로 그를 믿으려 한다면 당신은 차라리 성경 속에서 뱀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이 당신에게 새로운 구원 사실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구원은 믿음으로 될 것과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각 시키는 방법!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자각하도록 삶 가운데서 많은 고통을 유발시키십니다. 그러한 고통의 시간 속에서 오직 장대에 달린 뱀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지혜와 당신의 지식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 눈에 거대하게 보이는 환상과 커다란 이적들을 바라보고 따라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엘리야를 통하여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엘리야는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여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 40 주야를 금식하며 매달렸습니다.

 

그 때 산을 가르는 바람과 지진과 그리고 지진 후에 나타나는 불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엘리야는 모든 이적들이 멈춘 사이로 지나가는 세미한 음성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금의 당신은 어떠하십니까? 당신의 믿음을 도둑질하는 광명한 천사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이적과 표적들에 현혹되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만약 주께서 지금 장대에 달린 뱀을 바라 볼 때 불뱀에 물린 당신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직도 당신의 마음 속에 그 따위 것이 내게 무엇을 할 것이냐 하고 분노하지는 않으실런지요. 그러나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면 당신은 지금이라도 그 뱀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또 성경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강팍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악한 영들이 우리 마음 속에 역사하여 그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자에게 냉수 한 컵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