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4장)Living Water(I)

이요나 2000. 9. 9. 13:34
(요한복음4장)Living Water(I)

 

본문말씀 요한복음4:4-26
오늘 우리가 배우는 요한복음 4장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통하여 돌아오실 때 수가란 마을에 이르자 매우 피곤하셨습니다. 성경은 낮 12시경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야곱의 우물이라고 불리 우는 곳에서 휴식을 하고 있는 동안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동리로 들어갔습니다. 그 때 사마리아 여인 하나가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물 좀 마시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사마리아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내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하고 반문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가 물 좀 달라고 한 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너는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고 그는 네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답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그 말을 듣던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또 오늘날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에게 남에게 줄 생수가 있으면서 자기의 목을 추길 물을 달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벨런스한 이야기입니다.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들은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은 깊고 물을 길을 그릇도 없는데 어디서 생수를 얻을 것이냐고 다구쳤습니다. 아마 나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께서는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 여인은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어 목마르지도 않고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소서"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참으로 짧은 이야기 속에 깊은 내용이 담긴 이야기들입니다. 한 분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고 이 여인은 형편없는 삶을 살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이 두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는 그 자체도 아이러니하고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도 의미 심장하기만 합니다.


   현실과 이상!

   나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삶의 현실이 조화되어 가는 과정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고 계신데 비하여 이 여인은 현실적인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이 여인의 요구를 들으신 후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인 네게 남편이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이 여인으로서는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비참한 현실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삶의 목마름도 그러한 현실적 환경으로부터 오는 고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네 말이 참되도다. 네게 남편이 다섯 있었으나 지금 있는 네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놀라운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알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 여인의 정체를 아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지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이 여인으로서는 자기 인생의 비밀을 말하는 이 사람은 예언자가 틀림없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평상시 궁금하게 생각했던 신적 요소들을 질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예수에게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는군요"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의 현실로 어떻게 접목시켜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지금 우리의 삶과 전혀 무관한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러한 내용은 지금도 우리 삶 속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다보면 상대방으로부터 "우리 집안은 대대로 불교를 믿고 있는데 당신들은 꼭 예수를 믿어야만 천당에 간다고 하는군요"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이상과 영혼!

   저는 이번 요한복음을 강해하면서 좀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삶의 적용문제와 대비하려고 합니다. 성경의 기록된 말씀이 우리의 삶과 무관하다면 그야말로 성경은 다른 종교의 경전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가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그를 낭떠러지로 밀쳐내려 할 때에도 그들 사이를 가르고 자나가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11장에서는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죽이려 했던 유대지방으로 다시 나아가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사마리아는 상종할 수 없는 더러운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들은 포로생활 이후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분리된 혼혈민족으로서 율법으로 정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에게 있어서 사마리아 사람은 짐승과도 같은 수치스러운 존재였고 사마리아인에게 있어서 유대인은 열등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굴욕적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그곳을 통과하면 빠른 길이라도 늘 사마리아를 피하여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이러한 관계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곳을 통고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어느 특정 지역을 피하여 다니고 있습니다. 자신의 사명과 다르다는 명목으로 돈 많은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를 찾아다니며 교회를 개척하며 술집이 많다던가 빈민지역, 우범지대는 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마리아지역이나 빈민지역의 방문기를 여러 번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 속에서 예수께서는 그 상대가 어떤 여인인줄 미리 알면서도 말을 걸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의 지도자 랍비가 이방여인 더구나 불륜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무엇을 부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예수님은 이 여인과의 대화를 현실적인 문제에서 영생에 관한 이야기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과 나누는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을 막 사는 사람들과는 이렇게 수준 높은 이야기는 할 필요조차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유대인의 최고의 수준 높은 사람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벽창호와 대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방적인 가르침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물가에서 우연히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인생의 비참한 현실적인 문제가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는 심연 깊은 이야기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요한복음 4장을 푸는 열쇠입니다.

 

인간은 많은 공부를 하고 종교적으로 또한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인생에 대하여 매우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앞장에서 배운 니고데모를 생각해 볼 때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하여 깊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성경적 지식이 없었습니까? 경륜이 부족하였습니까? 문제는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적 편견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지식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이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자기 스스로 해결 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숙명적인 문제로부터의 탈출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게 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매우 갈급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러할 때 자기 앞에 나타난 예수께서 자신의 삶의 문제를 언급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니고데모는 예수의 행한 표적을 보고 다가 왔지만 이 여인은 종교, 사상에서 서로 반목되고 상충된 삶의 노선에 있는 한 유대인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는 유대인과의 대면을 꺼리는 이 여인에게 먼저 하나님의 선물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고 또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이야기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은 굴욕되고 소외된 사람들, 즉 인생의 정체성을 잃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앞장에서 모든 인간은 영적인 요소를 갖고 태어났음을 배웠습니다.

 

이 영적인 요소는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적인 부분은 자아가 강하여지고 자신의 의식으로 가득 차면 영안은 닫혀지고 맙니다. 그러나 인생의 삶 속에서 숙명적으로 낮아지고 비참한 상태에 처한 사람들은 오직 하늘로부터 오는 새로운 삶을 간구하며 현실로부터 탈출구를 찾게 마련입니다.

 

이를 비유하여 다윗은 시편 63편에서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는 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42:1)고 노래하였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한 시편 속에 흐르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술과 성령의 관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영적인 갈급을 피하기 위하여 술을 마시던가 마약을 찾던가 아니면 도박이나 게임 더나아가 성적 쾌감 속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문둥병자와 같이 자기의 육체의 죽음을 직면하게 합니다. 이에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성령에 충만함을 받으라"(엡5;18)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왜 술과 성령을 대비 시켰을까요? 어쩌면 성령의 충만함이 술 취함의 속성과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에 있으면 고통이나 번민에서 벗어나 기쁨과 평안 속에 거하게 됩니다. 일시적이지만, 술 또한 사람들의 근심을 잊게 하여 줍니다. 또 다른 측면은 술에 취하면 인간은 자신의 공허함을 메꾸기 위하여 그 무엇인가를 찾게 됩니다. 대게의 경우 육적인 만족의 대상을 찾게 됩니다만, 이와 같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그 사람은 인간 본연의 영적 소요를 갈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 결국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자신의 의식 속에 필요한 부분을 충족 받게 됩니다. 그 영이 하나님을 향하여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게 되고 찬송을 부르게 되고 성경의 말씀을 듣기에 열심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마름의 현실!

   다시 한번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하신 장면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인생의 모든 야망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물을 마셔 보십시오. 얼마가지 않아 다시 목이 마를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갈망하는 모든 부분에 설정하고 질문을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갈구하는 그 만족은 어디에서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러한 만족을 채울 수 있는 것이 한 가지라도 있다면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다 내게 오라"고 선포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예수에게 오지 않아도 갈증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어떠한 물질도 인간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잠깐 거론하였습니다만 예수와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를 살펴보면 그 대화의 주제가 세속적인 레벨에서 영적 레벨로 전환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창조적 구조가 최종적으로 영적 레벨로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먼저 흙으로 육체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코에다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물질적 욕구는 결국 영적인 부분에서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로 종교를 찾게 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호감을 불러 일으킴!

   육체의 욕구로부터 말을 이끌어 간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의식적 호감을 불러 일으키셨습니다. 그녀의 머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생각이 표출되도록 그녀의 호그심을 자극 시켰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선물을 거론함으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여인으로 하여금 소망적 신비감을 갖게 하였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신적인 요소는 특별한 지식인들만이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물질적 욕구와 정신적 만족을 채우지 못하여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영혼은 그 영혼 스스로가 하나님을 향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짐승과 인간이 다른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 처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은 곤두박질할 만한 매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때 가장 중요한 관심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네게 물을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안다면?"하는 의미 심장한 말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 잡았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혼을 빼앗는 이단들의 수법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신비한 존재인 것처럼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하얀 양복에 백 구두를 신고 고급 장신구를 사용하여 집회의 단상을 현란하게 합니다. 무당의 집이나 절간의 단상을 무시무시하게 꾸미듯이 그들은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꾸며기 위하여 신비를 조작하고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갈증은 더욱 심하여 질뿐입니다. 그들의 입은 열린 무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코 그에게서 생수를 얻지 못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어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