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2장)죽음과 부활은 메시야의 마지막 표적이다!(2)

이요나 2000. 8. 30. 10:02
(요한복음2장)죽음과 부활은 메시야의 마지막 표적이다!(2)

 

본문말씀 요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께서 이 성전을 헐라고 말씀 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전이 자기들이 종교활동을 하고 있는 그 성전을 가르치는 것으로 알고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 지었거늘 네가 삼일동안에 일으키겠느냐?"(요1:20)고 반문하였습니다. 사실 그 당시 성전은 헤롯이 기원전 19년에 짓기 시작하여 46년 간 지어오고 있었습니다.

 

 이 성전은 그 후 20년 후에 완공을 보았습니다. 이 성전을 짓는데 66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신 성전이 헤롯이 짓는 성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은 몇 년이 지난 후에 지혜를 터득한 후에야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21)고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성전을 장막(tent)이라고 기록한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가리켜 주신 양식대로 지은 회막(tent) 즉 천막을 성전으로 삼아 왔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 "만일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고후5:1-2)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성도인 우리의 존재는 육체가 아니라 영이며 우리의 육체 안에 영이 거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본질 영이 거하고 있는 장막(tent)은 언젠가 그 기한이 다 차면 무너지고(죽고) 맙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질 즉 우리의 영은 영원한 새로운 집으로 옮겨집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닌 영원한 하늘에 있는 집입니다. 요한은 이러한 원리를 터득한 후에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신전이라고 한 말씀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더 자세히 말하면 유대인들이 예수의 몸인 성전을 헌다하더라도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리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도 예수께서 죽으신 지 사흘만에 자기들 앞에 나타나신 후에서 이 말씀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은..
    바울은 우리에게 전하여주는 복음에 대하여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15:3-4)고 전하고 있습니다. 또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15:1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다시 살아나심이 없다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심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라는 주장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많은 신적 존재들이 일어나 영생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주장하려면 자신이 죽음에서 일어나 이 세상 가운데 실존하여 사람들 앞에 증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까지 이 땅의 어떤 사람도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 그와 함께 살던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부활을 증거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죽어서 무덤으로 들어갔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의 미리하신 말씀대로 죽음에서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그의 사람들에게 보이시고 제자들과 함께 40일을 사시며 장래의 있을 일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15:4-8).


 

   합리적인 증명
   예수께서는 또 살아 계실 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합리적으로 보이셨습니다. 만약에 누가 자신이 인간을 구원할 메시야임을 증명한다면 예수께서 살아 생전에 하셨던 수많은 기적들을 손수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여 남자와 군중들을 먹일 수 있어야 하고 물위를 걸어야 하고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고 장님을 눈뜨게 하고 벙어리로 말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야 하며, 바람을 꾸짖어 멈출 수 있어야 하며, 물을 포도주로 만들 수 있어야 하며, 죽은 자들을 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어떠한 물리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다만 주권자로서 말씀으로 명령하여 하신 일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마술이 아니라 주권자의 권세로 이루어진 이적들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살아생전 이미 모든 사람들 앞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심을 합리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를 믿지 않으려고 논쟁을 일삼는 자들에게 메시야임을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심의 결정적 표적을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증명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성경에 기록된 요나 선지자의 사건으로 설명하셨고 또 한번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는 헤롯 성전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하신 두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택의 조건
   주께서 선택하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은 우리 크리스챤의 복음의 토대가 되는 것으로 성경은 오늘 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에 관한 선택의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죽었다가 사흘만에 사신 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실을 자신의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냐로 함축한 창조주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증명하는 단계가 아니라 오직 "yes"아니면 "no"로 답해야하는 선택적 조건만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메시야에 대한 논쟁의 시간은 예수께서 부활하시기까지만 족합니다. 이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의사 누가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눅1:1)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일어난 사실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난 현실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논쟁을 하는 유대인들에게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주어졌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으로부터 그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의 삶은 그들이 보는 성경말씀이었고 그들의 삶 속에서 미리하신 말씀은 앞으로 그들에게 나타날 현실적인 하나님의 예언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더 이상 생각할 필요의 여지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자신들의 삶 속에서 실제로 겪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에 대한 선택이 남았을 뿐이었습니다.


 

   과거와 현실과 미래의 완성
    예수께서 부활의 표적에 대하여 설명하실 때 한번은 구약 성경에서 한번은 종교적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삶의 현장 속에서 적용하여 예고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대한 가르침이 되는 부분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언급한 부분은 요나 선지자가 실제로 겪었던 체험으로서 후세의 사람에게 전달된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요한이 기록한 헤롯의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현실 속의 종교적 현장이었습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대하는 성경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심과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시는 실체이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믿는 자들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말씀 안에 완성돼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나는 시작이며 끝이라 말씀 하셨고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실체를 다른데서 찾고 있습니다. 또 믿는 사람들 조차 유대인들처럼 성전에서의 예배행위 속에서 믿음의 실체를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역사 속에서 함께 살던 요나 선지자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가르침을 한낱 역사로 기억해 버리고 있었듯이 또 예수께서 주님의 생애 가운데 세워지고 있는 헤롯의 궁전을 들어서 증명한 메시야에게 일어날 실체적 사건이 또 하나의 지나간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로 추억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가 메이야임을 증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께서 이미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만에 다시 일으키리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마지막 표적으로 내 세우셨을까요? 사실 요것이 요한복음 전체 속에 흐르는 열쇠입니다요! (내일뵙지요, 요한복음 3장을 꼭 읽어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