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3장-1)네가 정녕 벽창호였더냐?

이요나 2000. 9. 1. 10:18
(요한복음3장-1)네가 정녕 벽창호였더냐?

 

본문말씀 요한3:1-21

 

요한복음 3장을 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의 말씀은 1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이 되겠습니다. 오늘의 칼럼의 이해를 위하여 먼저 꼭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는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저녁 시간에 예수를 찾아 왔습니다. 요한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확신을 가진 것은 예수께서 하신 여러 가지 기적을 보고 생긴 결론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2장에서 예수께서 유월절 날 예루살렘에 계실 때에 유대인들이 나아와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요2:18)고 질문한 내용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잠정적인 내용은 예수를 믿지 않고자 하는 자들은 어떠한 표적을 보고도 그를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께서는 죽음에서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마지막 표적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심을 알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때 주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고 의미 심장한 말씀을 던지셨고 니고데모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겠습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이것은 인간의 창조적 본연의 모습을 모두 알 고 있는 창조자와 인간의 근본적 구성을 모르는 한계 속의 사람간에 일어나는 혼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니고데모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민족적, 종교적 지도자라고 해도 그는 인간의 창조적 구성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구성적 요소를 성경을 통하여 살펴볼 필요가 없습니다.

   창조의 원리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영과 혼(정신)과 육의 삼위일체로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삼위일체를 이해하고자 할 때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의 삼위일체하심을 대비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靈)은 하나님을 감지하고 또 그와 교제의 통로로서 우리의 혼적인 부분(정신)을 지배하여 영의 지배에 의하여 인간은 하나님과의 공감(communion),교제(fellowship)를 하였습니다.

 

 식물은 단면적 즉 1면적입니다. 즉 식물은 몸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식물은 물질적 요소만으로 구성되어서 흙이나 공기 속에서 영양분을 섭취하며 종(種)속의 유전자 코드를 통하여 재생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식물은 통증을 느낀다던가 아름다움을 느낀다던가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식물학자는 식물들도 감성이 있어서 환경에 대응하는 감정을 표현한다고 말합니다만 이것은 그들이 정신 즉 이성적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몸체를 이루는 단면적 생명의 생체 리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동물은 식물과 달리 양면적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몸도 가지고 있지만 의식(정신)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말하면 생물 즉 히브리어로 네페쉬라고 합니다. 동물도 식물처럼 몸체가 있어서 식물이나 동물 중에서 양분을 섭취합니다. 그러나 동물은 움직일 수가 있고 동물도 자기 종(種) 안의 유전자 코드에 의하여 생식의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수컷에 의하여 수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식물에 비하여 동물은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움직일 수도 있는 고등단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서 또 별도의 차원에서 창조하셨습니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3면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영과 혼(의식,정신)과 육체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동물보다 월등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창조

   창세기 1장을 보면 창조(bara)라는 단어가 세 번 나타납니다. 처음 천지의 창조이고 두 번째가 생물의 창조이며 세 번째가 인간의 창조입니다. 이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과정으로서 이 셋은 엄격한 다른 구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식물들에서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인데 식물들은 창조(bara)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만들다"(asha)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 1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이미 물체라는 부분이 창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을 살펴 보면 물질요소의 생명, 움직이는 의지적 생물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감하는 사람의 창조로 발전적이며 별도의 창조의 단계의 과정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과 접촉을 할 수 있는 영적인 요소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함께 하며, 친교를 갖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3) 밀하고 있습니다.이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입니까? 인간이 무엇이길래 하나님께서는 그와 친히 말씀하시고 권면하셨는지요. 실로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 아담과 하나
님의 동산에서 말씀을 나누시며 친교(commune)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따라서 인간은 영과 혼과 육의 부분의 삼위일체로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은 삼위일체하고 삼위일치의 속성이 있어서 함께 하나이고 개체의 생명을 가지고도 있습니다. 따라서 혼이 나가도 육체는 살아 있을 수 있고 영이 죽었다 해도 혼과 육은 존재합니다. 그러면 육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육이 죽으면 영혼이 모두 죽는 것인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보이는 물질적인 존재만 수명을 다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영혼의 문제가 종교적인 측면에서 떠 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것처럼 영적인 부분은 인간의 완전한 주체를 이루는 부분으로서 만약 이 영적인 부분이 죽는다면 인간은 창조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동물들과 같이 의식과 육체적인 부분만이 살아 있게되어 혼란과 투쟁의 삶을 살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인간사는 먹고 먹히는 동물의 세계처럼 먹이사슬의 구도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만약 동물에게서 의식이 죽고 또 움직일 수 없다고 할 때 그 동물은 식물과 다를 바가 없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아담 이후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영적인 부분이 죽은 상태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은 이상적이고 아주 쾌적하고 순전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인간은 유전자적이 결함이 전혀 없는 모든면에서 완벽한 사람으로 창조되었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과의 영적교류 속에서 영의 지배 속에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사고하고, 생각하며 아름다운 육체의 복을 누리며 평안과 기쁨으로 충만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해야할 선택적 조건을 하나 두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어쩔 수 없는 창조적 관계의 조건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발로인가를 스스로 선택하게 하게 하기 위하여 에덴 동산에 금단의 열매를 두시고 그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인격간에 의지적 언약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자신이 모든 동물들에 비해 창조차원이 다른 월등한 인격체임을 알고 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때 인간의 위치가 어떻게 되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의지적 순종을 선악과에 두신 것입니다.

   인간의 선택은?

   만약 그가 진정으로 자신을 하나님과 친교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두려워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의지로 스스로 지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사단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므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영적인 부분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동물들처럼 양면적인 존재로 격하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하신 말씀은 인간이 동물들과 달리 창조하신 부분 즉 인간의 생명이 동물과 다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이란 말씀하신 것은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 말씀의 의미로 돌아 가서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즉 이미 죽어버린 영적인 부분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누구인가?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보십시다. 주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다시 친교를 나누기 위하여는 다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면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신 것일까요? 유대인 지도자 니고데모입니다. 여기서 유대인의 지도자란 구청장이나 국무장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당시 유대인은 정치권이 로마인에게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주체성은 오직 종교권 뿐입니다. 따라서 나고데모는 유대인의 민족지도자요 종교지도자인 70인 공회의 한 사람으로서 민족적, 종교적 최고 의결기관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위치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첫 번째로 혈통적 택함과 종교적 학문과 도덕성에서 결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적으로는 지식과 행함에서 완벽한 사람이었고 일반적 학문과 경륜에서도 이스라엘의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모르느냐"고 힐문하신 것입니다.

   왜 몰랐는가?

   왜 그는 그러한 성경의 시작이며 창조의 틀인 창세기 첫장에 기록된 가장 기본적인 것을 몰랐을까요? 더우기 그 당시 그가 보는 창세기는 히브리어로 쓰여져 있었고 그는 히브리어를 능히 아는 지도자였습니다. 우리처럼 원어를 해석해주고 연구해야 하는 위치가 아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더우기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을 보고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것을 알았던 사람으로서 그나마 표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한 다른 동료 지도자들 보다는 한결 세련되고 센스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말씀처럼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벽창호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지식적 즉 혼적인 부분이 발달되면 의지가 살아나서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격상하게 됩니다.

 

그 결과 그들이 어떠한 진실을 확정하기 위하여는 자기들의 지식을 이해시키고 확정 시켜야 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데는 이러한 지식과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순전한 마음으로 그의 긍휼하심으로 돌아가면 그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내려 앉아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는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무엇을 믿는 일에는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보다 한발 앞서는 것이지요. 니고데모도 그와 같은 위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는 확신을 갖고 왔습니다만 그는 순수한 의지적 믿음을 갖고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하신 표적을 보고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믿음이 온전한 믿음으로 합리화 되기까지는삶 속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할 것입니다. 니고데모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에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비일비재 합니다. 아무리 신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으면 뭘합니까? 요즘에도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창조의 구성에 대하여 영과 혼과 육으로 설명하는 우리에게 시비를 걸며 인간의 혼적(의식, 정신) 부분의 창조를 을 인정하지 않는 위대하신 종교 지도자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종교지도자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나는 개인적으로 지금의 어떠한 사람들처럼 성경을 우리의 삶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음미하지 않고 행동규제 지침서나 예배의 경전 또는 지나간 역사책으로 읽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