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한음성

(은혜씨리즈3)은혜란 무엇인가? Part-1

이요나 2000. 9. 19. 19:52

"은혜"라는 말의 어원적인 의미는, "아름다움(美)"이다. 또한 신약에서 은혜는 "하나님이 그 사람의 어떠한 지위와 전과(前過)에 관계없이 주시는 호의와 선물"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은혜란 내가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란 내가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하여 받아 들여졌음을 의미한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히11:6)고 말하므로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믿음과 신뢰가 은혜의 토대라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즉 우리가 믿는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믿는 단순한 믿음에 의해 우리들이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심을 신뢰하고 의뢰할 때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



율법이나 종교적 제도를 지키는 일로 죄 사함을 받을 수는 없다. 이것은 절대 불가능함이 창조이래 인류역사 속에서 증명되어왔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사람이 의롭게 되고자 수많은 종교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러한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을 알고 있으며 인간의 의지 속에 의로워지고자 하는 의지가 내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의로워지려는 인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죄인된 인간은 어느 사람하나도 하나님 앞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인간 그 스스로 자기가 지닌 죄를 벗어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3:11-18)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아담이래 모든 인간의 번민은 죄로부터의 탈출이었다. 그러한 열망이 없었다면 인간은 종교를 만들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문제는 누가 이 죄를 벗어나게 할 것인가에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수많은 성인군자들이 앞장을 서왔지만 그 길을 찾지 못하고 모두 사망으로 달려가고 또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아직도 죽음의 행렬들이 줄을 지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문제를 해결할 오직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성경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자가 없다" 하였고 다시 "세상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간단한 원리이다.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누가 치울 수 있단 말인가?

 

이 땅의 모든 인간이 죄인 됨으로부터 이 땅의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도 없으며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세상 법으로도 자기의 죄를 판결자의 판결없이 스스로 벗을 수 없는 것인데 감히 어찌 죄인 된 인간이 자기 스스로 죄의 굴레를 벗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따라서 인간이 죄를 벗고자 하여도 죄인 된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조차 없게 되었기 때문에 죄의 굴레에서 몸부림치며 사망 속으로 달려 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한다.


얼마 전 안양교도소 정신 교육에 나갔을 때 일이다. 지난날의 나의 간증을 하면서 내가 죄 속을 헤메이면서 그 굴레의 원인과 해결방법을 위하여 동양철학을 배웠었던 일을 말한 일이 있었다. 그랬더니 최근 나의 간증을 들은 수감자로부터 자신의 사주를 감정해달라는 편지가 쏟아지고 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되었지만 나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생을 묶고 있는 사주철학에서 벗어 나와 새로운 생명의 법으로 들어오라고 답장을 띄웠다.

 

사실 나는 내 인생을 알고자 동양철학에 심취되어 주역과 사주철학을 공부한 일이 있었다. 또 불가의 법력으로 나의 고뇌를 해결하고자 불가에 귀의하여 불법을 공부하며 나무석가모니불을 외우며 일천 배를 올리는 고행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어느 곳에서도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수천 년의 한을 품은 한 인간의 넋이 되어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내가 몰랐던 한 가지 사실은 내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던 그 한가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정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준비하실 때 나의 죄의 처지와 형편을 기억하지 않으셨다. 인간으로서도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을 창출하며 살던 나를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용서하셨다. 나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으셨고 다만 내가 그를 바라봄으로 그리고 그를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임으로 "너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이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영광의 자리에 서기까지는 먼저 우리로 하나님이신 자기 앞에 가까이 나갈 수 있도록 기초를 만드셔야 했는데 그 중보자로 죄없으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를 세상의 모든 죄의 제물로 십자가에 다신 것이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당대 의인이라 칭했던 욥도 인간의 죄를 벗지 못하는 고통을 두고 하나님과 내 어깨 사이에 손을 얹을 중보자가 없음을 한탄하였다. 그들의 시대에는 아직 그 은혜가 주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여도 알 수 없었던 시대, 즉 인간이 태어남으로부터 죄인된 인간은 그 아무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오직 모든 피조물은 그의 아들이 오심을 고대하고 썩어짐에서 탄식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아들로하여 영광으로 받으시기를 원하시어 그 아들의 이름에 의지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틀을 만든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틀인 십자가였던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다른 길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꿈꾸며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나또한 내 인생의 반을 그렇게 보내왔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간구하실 때에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 42)고 피땀을 흘리며 간구하셨다. 요컨대 여기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나의 죽음 이외의 방법으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다시 말하여 어떠한 믿음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던가, 제물이나 금식이나 어떠한 종교적 형태라도 자기의 의로움을 얻고 그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십자가에 매어 달리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그러한 방법이 있다면 아버지여 제발 나를 이 무서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소서"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대답이 없으셨다. 오직 그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죽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부활하여야 하는 길만이 예비된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땅의 모든 인간의 위대한 발견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다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다음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