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한음성

우리는 가슴만 있고 머리는 없는가?

이요나 2001. 8. 29. 16:34
<우리는 가슴만 있고 머리는 없는가?>
이제 가을인가 봅니다. 아침저녁으로 찌르레기 울음소리가 노총각의 가슴을 애처롭게 합니다. 가을만 되면 내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슬퍼지는 이유는 아마 대면할 수 없도록 먼 길을 떠나버린 어머니의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티비에서 IMF 졸업파티가 열리던 날 가뭄과 장마의 긴 터널을 통과한 농민들은 차라리 미치광이처럼 힙합을 추며 뒹구는 노랑텡이 아이들의 머리 짓에 체널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멀끄러미 술잔을 받쳐든 대통령의 표정은 기쁘다는 것인지 슬프다는 것인지 도무지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속내를 읽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정치꾼들은 일년 내내 가슴 시원한 소식 한토막을 전해주지 못하고서도 다음에도 우리를 밀어 달라는 눈웃음짓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 할일 없이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을 기다리는 정처없는 백성들은 소망으로 살아갈 것인지 암담하기만 합니다.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한류(韓流)가 일고 있다는 거짓말 같은 뉴스를 보며 차라리 그 나라 사람들은 바라 볼 소망이 있어서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이 백성 가슴속에 민주쟁취를 외치던 아들딸들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눈 독재자에게 향수를 갖는 것은 암흑을 헤매이던 이 민족에게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소망을 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번 815 광복절 축사에서 대통령은 국민들의 삶을 위해 많은 공단을 지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겠노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우리를 위로하기 보다는 또 무슨 일을 벌일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앞서고 있습니다. 국민연금이니, 의학분업이니 교육정책이니, 대북사업이니 어느 하나 우리의 가슴을 시원히 해 준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을 위한다는 사업들이 오히려 근심덩어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역대 정치꾼들에게 속아온 민초들은 IMF를 졸업했다는 것은 이제 우리나라가 외국 부채에서 졸업하고 자생능력을 갖추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쯤은 구차한 설명없이도 아는 일입니다. 감기약 하나 사먹기 조차 불편하여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다짐을 해둡니다.

무슨 사업을 하든지간에 준비와 계획속에서 토대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국가 정책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시시 때때 가리지 않고 속출하는 깜짝 쑈에 애꿎은 민초들의 주머니만 털리고 맙니다. 무엇을 하겠다는 말은 쏟아지는데 나라 창고가 구멍난지가 오래인데 무엇으로 한다는 것인지요. 이북 동포에게 퍼주고 싶어도 내가 먹을 수 있는 형편이 되어야 퍼주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닙니까? 가슴으로야 바닷물인들 퍼담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이 어디 가슴만으로 살수 있겠습니까?


우리민족의 특성 중 하나가 너무 감성적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면 가슴으로 느낀 감정만으로 속결속단한단 말입니다. 이번 방문단 사건도 가슴으로 저지른 일들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 가슴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머리도 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슴에 다가온 그 풍부한 감정을 냉철한 머리로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까? 우리의 나라의 모든 국정의 실수가 인간의 조급한 생각에서 발단된 것이라 생각할 때 그 조급함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에게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풍부한 가슴을 주셨다면 그 사랑을 실천할 지혜의 머리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 민족은 가슴만 있고 머리는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하여야 할것인가요? 우리 민족에게 주신 풍성한 가슴의 사랑을 실천할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가르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세상가운데서 나라마저도 없어졌던 민족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세상에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소망을 둔 민족이었습니다. 그 소망이 극한 고통에서 그들을 지켜 주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빈털터리라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고통을 이겨낸 민족입니다. IMF 졸업 축배의 선언처럼 우리는 IMF를 극복한 민족입니다. 그러나 그 때만해도 우리는 다시 시작해 보자는 투기와 의지가 있었습니다. 우리 함께 허리띠를 매고 다시 시작하자는 지도자의 믿음과 용기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와 함께 없는 것을 함께 모아서 눈에 보이는 것을 창출했습니다. 이 때 우리 민족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 만으로 우리의 근본적인 갈망을 완전케 할 수는 없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그것이 이상적인 것이라도 물질적인 요소로 그 소욕의 시간이 지나면 소멸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성취욕을 맛본 심령들은 더 커다란 욕구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지요. 누가 무엇으로 이 욕구를 채워 줄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이 이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그도 사람이기에 사람의 욕구를 완성시킬수 없습니다.

최근 우리 민족 가운데서 무엇을 향한 소망이 없습니다. 몇년만에 IMF를 졸업하였다고 자축하는 이 민족의 가슴에는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 하는 꿈이 없습니다. 아침이면 저녁까지의 하루해가 너무 길어서 소망 없는 육체를 넣어둘 공간을 찾기에 급급합니다. 또 저녁이면 육체의 만족을 채우지 못하여 허망한 향락을 찾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감성이 많은 민족이 그 감성을 충족시킬 이상적 소망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 능력이 있어 이 민족에게 풍성한 가슴을 소망으로 채우겠습니다. 그 가슴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말입니다


정부는 백성들의 주머니를 열기 위하여 주 5일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합니다. 없는 돈이라도 돌려야 경제가 풀릴 것이 아니냐는 계산인듯 싶습니다. 나랏돈이 세계 제일 많다는 일본도 주 5일제를 시도한지 칠팔년 밖에 되지 않았고 아직도 자율 시행 중에 있습니다. 그나마 놀기 좋아하는 백성들이 산과 들로 인산인해를 이룰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정부 정책에 대하여 교회가 주 5일제는 비성경적인 처사라고 반대의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성경입니다만 이런 일을 말할 때 왜 애꿎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들먹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다른 많은 이유들을 들어서 반대의 소리를 낸다면 성경에 먹칠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염려는 성도들의 주일성수이고 또 그것은 교회재정과 직결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업과 교회가 맞물려 있는 대형교회의 목사의 맞장구는 정말 눈뜨고 보기조차 부끄럽습니다.

성경에는 안식일 날 제자들과 함께 밀밭을 거닐다가 이삭을 자른 것을 보고 그 당시 율법학자들이 왜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것을 하느냐고 질책하였습니다. 이 때 주님은 다윗의 때에 다윗이 쫓기는 중 시장하여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 밖에 먹을 수 없는 떡을 먹은 것을 말씀하시며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주 5일 근무제와 그리스도인들이 섬기는 주의 날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크리스챤은 일주일에 한번 쉬는 날도 교회 봉사다 집회다 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혹사를 당하고 있는데 오히려 내 생각은 너무 헌신적인 우리나라 주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보나스가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만약 안식일 개념이나 십계명 개념으로 주 5일제의 시행을 반대한다면 그 목사는 성경에 기록된 율법대로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돼지고기도 먹지 말아야 하고 교회 단상 위에 십자가도 세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또한 잘못된 날임을 깨달아 거대한 행사로 치루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역을 핑계되어 부모에게 소홀한 목사넘들은 모두 연자맷돌을 걸머지고 바다에 던져야 할 것입니다. 성도를 실족시키는 목사의 손목과 발목은 모두 짤라야 하고 눈은 모두 빼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차라리 한 눈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기록되었으니 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도 그리 중하다면 주께서 경고하신 말씀은 얼마나 두려운 말씀이겠습니까?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모든 율법의 마침이 되신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성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도, 또 거룩하게 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들입니다. 우리 안에는 그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주의 성전된 자들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유일하신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형제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주일성수를 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의 거룩한 성도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거룩함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며 이 거룩한 자들에게는 주를 믿는 믿음 위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집이 세워집니다.


이제 성도된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소망은 이 땅에서의 우리의 믿음의 진실을 실현시키고 주의 날에 주의 영광을 함께 맞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자기자신을 돌아보아 거룩한 주의 자녀로서 흠없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며, 우리의 평안을 위하여 우리 앞에 세운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는 우리의 일자리를 몇만개 창출해 주겠다는 약속보다 이 민족에게 영원하신 하나님 말씀의 언약속에서 내일을 향한 소망을 갖게하는 지도자가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빵으로만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력이 빵을 해결하는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소망 그것은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 속에만 있습니다. 무엇으로 소망을 갖던지 그 소망이 성취되고 나면 인간은 다시 갈급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육체의 속성입니다. 인간의 소망은 욕망으로 발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둔 백성은 영생을 꿈꾸게 됩니다, 성경은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을 소망으로 하는 민족적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이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오직 기도할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도자를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를 사랑할 것이며 그의 뜻을 따라 그의 백성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민족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선한 민족임에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도자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그가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치하심을 알고 그의 능력을 힘입어 이 민족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민족을 이끌고 있다는 영적 지도자 중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더이상 세상풍조에 휘말리지 말고 이 민족에게 소망을 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도자를 위하여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