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한음성

소명-1(The Call)

이요나 2000. 11. 15. 19:13

소명1(The Call)

 

(창5:1-2)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었더라


   오니기스의 소명을 읽으며
   어제 안양교도소를 가면서 내 손에 쥐어진 한권의 책을 펼쳤습니다. 지난 주일 황유진 자매가 내게 전해준 오스기니스(Os Guinness)의 "소명"(The Call) 이란 책입니다. 오스기니스는 2차대전 중 중국에서 태어난 사회학 박사로서 현재 고든 맥도날드와 함께 트리니티 포롬에서 활동하고 있는 변증가이며 강연자입니다 저는 쉐퍼와 같은 흐름의 책을 좋아합니다만 처음 대하는 오스 기니스의 저서 "소명"은 그 제목에서 내게 특별한 관심을 갖게 하였습니다.

 

나는 최근 수년전에 번역해 두었던 마이크 멕킨토시의 자서전 "혼돈으로부터의 탈출"(원제:마이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책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내 손에 들어온 오스 기니스의 "The Call"을 읽으면서 내 마음 속에서는 마이크 메킨토시의 얼굴이 떠올라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내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인생의 가장 깊은 골짜기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Calling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은 이미 그를 창조하실 때부터의 Calling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경험하고 체험한 인생은 그의 할 일을 위하여 인생의 깊은 곳을 거닐게 하신 하나님의 배려요 사랑이었습니다


   소명의 개념

   오스 기니스는 소명(Call 또는 Vocation)의 개념을 아는 것은 개인의 정체성의 토대와 인간됨 자체를 이해하려는 현대인의 추구와 연관되기 때문에 우리 각자에게 중요하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나도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이러한 개념에 대한 이해는 이론적인 깨달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체험으로부터 산출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고록을 씁니다. 요즘은 스타로 만들어진 많은 인기인들이 다른 사람들의 손을 빌어서 자신의 자서전들을 많이 펴내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책들이 베스트 셀러가 되어 많은 젊은이들에게 읽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현상입니다. 만들어진 자서전을 읽기보다는 차라리 무협만화를 보는 것이 한결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속성이 먼저 1차적인 감각과 느낌을 통하여 자신의 욕구를 접근하도록 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지난 11일 오후 제가 담당하고 있는 인터넷 싸이트 크리스챤 이성교제 카페에서는 제 5기 정팅을 가졌습니다. 나는 그 날 60여명의 젊은이들 속에서 불현듯 내 머리를 스치고 한 단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단어는 "소명"이었습니다. 물론 그 날 정팅에 참가한 사람들은 결혼문제라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임 때마다 매번 느껴 온 것이지만 그것이 소명이라는 것을 오늘에서야 깨달았습니다. 아마 결혼을 주제로 하는 세상의 모임들 속에서는 각자의 결혼 목적 외에 다른 의미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임 속에는 어떠한 커다란 힘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Calling"

   그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란 다름 아닌 "소명"이었습니다. "소명"은 "Calling"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Caller"에 의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부르신 Caller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이러한 부르심(Calling)이 없다면 정팅에 모인 젊은 남녀들은 서로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모임에 참가한 젊은이들은 누가 먼저라는 의식없이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머리를 숙이고하나님을 찬양하며 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 자리에는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들임에도 오래된 친구들처럼 평안함과 기쁨이 흐로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찾아 볼 수 없는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들은 거룩한 예배자가 되어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 속에 자기의 존재를 밝히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하였습니다. 그곳에는 강요도 없고 다스림도 없는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나는 "소명"이란 단어의 의미를 새롭게 체험하였습니다.

 

내가 발견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아무도 그에게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곳에 나아오기 전까지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위하여 달려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목적 앞에 먼저 자신을 부르신 Caller가 계심과 그분이 자신을 부르신 목적이 있음을 깨닫고 그의 이름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이것은 전지하신 창조자를 신뢰하고 의뢰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들이 찬양을 드리기 시작할 때 그들의 모임 속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평안이 가득하게 채워지며 세상 속에서 묻어 온 시기와 질투와 욕망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 무엇이 이 젊은이들을 이처럼 순수함으로 돌아오게 하였을까요? 그것은 "소명"이었습니다.


   "Caller"

    우리가 소명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접근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존재가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알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실패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한 세상 살아가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자신의 존재를 알 수 있을까요? 많은 지식과 학문을 쌓고 많은 경험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고대로부터 많은 성인들이 있었으나 그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모두 한 길로 돌아 갔습니다. 석가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자신의 존재를 성취하지 못하고 모든 인간들이 가는 곳으로 돌아 갔습니다. 도를 연구한 노자도 자기의 도를 완성하지 못하고 음부로 내려 갔습니다. 덕으로 중생을 이루려했던 공자도 죽음의 길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자기의 존재 즉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창조자로부터 부름(Calling)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나의 존재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란 창조자로부터의 지어진 것입니다. 인간은 고체의 성질과 액체의 성질과 그리고 살아 있는 무형의 공간과 그리고 신적인 영역을 체감할 수 있는 무한의 생물체로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을 좀더 쉽게 말하자면 인간은 없어질 육체부분과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영적부분으로 창조된 파조물입니다. 따라서 창조된 피조물은 창조자로부터 그 자신의 존재가 Calling되어야 자신의 존재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존재는 태어남으로부터 부모에게 명칭되고(Call) 부름(Calling)을 받게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속에서 1차적 관계의 설정이 되는 것일 뿐, 내 본연의 창조적 존재를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저자는 성경의 첫 부분에서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창조하신 모든 것을 Calling 하시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가 부름으로(우리 성경은 칭하다로 기록) 그 생명이 시작됩니다. 창세기 기자는 1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 창조된 땅의 존재가 어떠함을 설명하였습니다.

 

부름을 받지 않은 피조물들에 대하여 창세기 기자는 "혼돈" "공허" "흑암의 깊음" 속에 있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체들이 그가 부르기 전까지는 존재의 의미가 없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존재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세상 물 속에서 둘러싸인 땅처럼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싸여 있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대하여 창세기 기자는 1장 5절에서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Called) 어둠을 밤이라 칭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존재들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빛이 절대적임을 알 수 없습니다. 빛이 없이는 그 어떤 존재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빛

   요한은 하나님은 빛이라 기록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붙잡고 계신 창조주이시며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이 그의 빛 가운데 나올 때 자신의 존재가 조명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안타깝게도 "빛이 어둠을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많은 인생들이 이 빛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어떠한 다른 힘 즉 가장적인 빛으로 하여 진실이 왜곡되고 가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빛을 보지 못하고 가상적인 빛에 가리워져 있는 자들은 눈뜬 장님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인생들은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처럼 허무하고, 공허한 흑암과 혼돈 속에서 그 빛이 내게 비췰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는 "고통의 밤을 지나지 못한 사람은 인생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암흑 속의 인생들이 그 고통 속에서 빛으로 오는 생명을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진실을 향한 인생의 목적이 물질문명으로 하여 방해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인간의 목적을 물질문명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다시 설명하면 빛을 깨닫지 못한 영혼들은 삶의 원천이 희로애락에 있다고 믿고 감정의 욕망을 문화와 물질문명 속에서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삶의 고통을 잊기 위하여 술과 담배와 마약 그리고 성적 충동으로 메꾸려 하며 스포츠와 게임 등의 취미생활로 자신의 무료함과 외로움을 달래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근본적인 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성을 마비시켜 결국 죽음으로 끌고 갑니다. 수많은 마약환자들과 알콜 중독자 그리고 오락, 게임, 스포츠에 빠진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 상태는 참으로 비참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