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예언서 강해

(렘2장)예레미야의 첫 설교

이요나 2002. 9. 23. 11:59
(예레미야2장) 예레미야의 첫 설교





오늘은 예레미야의 첫 설교를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그 설교가 정확이 몇살에 주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린 나이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아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국가적인 예언을 한다는 것은 인간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자칭 예언자라는 말을 하면서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언이라고 하는 것들을 살펴보면 예언이 아니라 점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뜻을 알게 하기 위하여 자신이 부르고 세우신 종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교회와 성도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나타난 예언을 보면 구속사적인 예언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나타났으며 주께서 세우신 신실한 종들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또 사도들의 시대에도 성령으로 기름부으신 종들을 통하여 에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언들은 하나님의 교회 사역과 관련된 것이지 개인의 안위를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속사적인 성경의 예언은 이미 끝났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예언의 성취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각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예언은 아직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을 통하여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1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란 구약에 나타난 구속주 즉 우리의 무엇이 되신 분이라는 관계성 호칭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신 것이며 성령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먼저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거민들을 향하여 외칩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으로 종교의 중심지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기억하고 계시다고 전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패역하여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깨서는 그들의 소년 때의 우정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신부된 이스라엘의 사랑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소년 때의 친구는 참으로 순수하고 꿈에 부푸른 소망과 언약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또 결혼은 새로운 생활의 출발이기도 합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결혼 때의 신부의 얼굴은 오직 신랑만을 의지하고 사랑합니다. 신부에게는 두려움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제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에 대하여 고합니다. 야곱의 집이란 커다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시작은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주권적인 택함 속의 야곱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야곱은 비록 찬탈자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지만 하나님은 이미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성경은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인간의 생각을 벗어나 오직 하나님의 예정과 미리 아심 속에서 출발한 사람입니다.



비록 야곱의 성정은 우리와 같이 거짓되고 탐욕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그를 부르신 하나님은 오랜 세월 삶의 인고와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믿음의 경륜을 이루셨습니다. 그는 더이상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이라는 호칭을 받았습니다. 그로하여 이스라엘의 12방백이 나왔고 이스라엘 민족은 그 방백에게 주신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를 따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야곱 집과 이스라엘 집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고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첫열매로서 그 누구도 그들을 대작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쟁론을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너희 열조가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건대 나를 멀리하고 허탄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은 조상과의 관계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거룩하신 창조자 하나님께서 죄로 물든 인간과 특별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의 백성을 자녀로 삼고 자신의 아내로 사랑하실 것을 언약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는 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성민이라는 특별한 자부심과 프라이드를 갖고 있었습니다. 더우기 하나님의 아들이신 에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혈통을 따라 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들이 기도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을 역경속에서 아름다운 땅으로 인도해 내신 하나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자신들의 소욕을 채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고 묻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은 제사장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아들 중 특별히 레위지파를 성별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관리하게 하셨으며 또 그 중에서 아론의 혈통을 구별하여 그 자손들로 하나님의 예배를 집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율법을 관리하고 가르치며 보전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였으며 스스로 하나님을 거역하여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들을 더이상 묵과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여전히 너희와 다투고 나희 후손과도 다투리라"고 선전포고를 하셨습니다. 창세기 6장에는 타락한 천사들이 이 땅의 사람들속에 나타나 패역하기 시작하자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나의 신이 너희와 다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담 이후의 인간에게 있어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께서는 요한복음 14장에서 보혜사 성령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속에 계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세상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성령은 우리 안에 계셔 주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장래일을 알게하여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거역하는 자들에게 있을 것을 경고하시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신의 욕정속에 내어버리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사랑하는 자식의 패역을 책망하지 않고 그 죄 속에 버려 두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 결과 이런 사람들은 악하고 부패되어 하나님의 멸하심에 이르렀습니다.(롬1;32)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첫 설교를 통하여 아직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고 계심을 알리셨습니다. 소망이 끊어진 사람들에게 이 메시지는 정말 얼마나 신선한 것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는 증거는 그들과 다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책망으로 나타납니다. 만약 아들을 책망하지 않는 부모가 있다면 그들은 참 부모가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제부터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과 다투시겠다고 선전포고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들에게 주변 국가들을 살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깃딤과 게달 민족들이 자신들의 신을 어떻게 섬기고 있는가 살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한 미개인일지라도 자기들의 신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광을 바꾸어 스스로 미물이 되기를 즐겨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것은 경천동지할 일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12절)



예례미야는 이스라엘의 죄목을 다음과 고하였습니다.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13절)



생수와 터진 웅덩이는 참으로 흥미로운 비유입니다. 요즘같이 맑고 깨끗한 물을 구하기 힘든 세상에서 생수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우리의 가슴을 시원하게 하여 줍니다. 제가 갈보리채플로 부름을 받을 때 나에게 다가온 하나님의 음성은 맑은물 세미한 음성이었습니다. 나는 그당시 참으로 혼탁한 삶 속에서 더러운 구정물을 마시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네게 성전 문지방에서 천천히 흘어 내리는 맑은 물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물은 오랜 인내의 세월을 거쳐 지금 아라바 바다를 향하여 흐르고 있습니다.(겔47장 참조)


웅덩이란 무엇을 담기 위하여 파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매일매일 새롭게 그들의 영혼을 적시는 생수의 근원을 떠나 많은 것을 한꺼번에 담아 두려했습니다. 과거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매일매일 만나를 거두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많은 목사들이 유명 목사 설교 400편 씨리즈, 또는 새벽단상 설교 씨리즈, 1000일 기도문 씨리즈들을 찾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천천히 흐르는 생수를 마다하고 웅덩이에 썩은 물들을 모아 두려는 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이 과거 400년 동안 애굽의 종살이 할 때 마셨던 우상의 강 나일의 물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 악이 범람하여 순전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었다고 경계하셨습니다(18-21절)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죄악을 스스로 잿물로 씻어 보라고 외칩니다.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그대로 있을 것이라 경고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외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나는 더럽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을 좇지 않았다"고 변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말에거하면 참 내 제자가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거늘 어찌 죄인이라 하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주님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하셨습니다. 예레미야가 외쳐도 그들이 듣지 않고 진리를 부인하는 것은 그들이 죄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하나님께 속한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요8:47)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상태에 대하여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 암나귀가 그 성욕이 동하므로 헐떡거림과 같았도다 그 성욕의 때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자들이 수고치 아니하고 그것의 달에 만나리라"(24절)지적하셨습니다. 혹시 지금 당신의 상태가 이러한 모습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욕정의 웅덩이를 파 놓고 술과 마약과 음행의 방탕 속에서 육체의 소욕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책망에도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여 항변하며 다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든 족장이든 제사장이든 선지자든 이방의 도적들에게 붙잡혀 수치를 당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부의 사랑과 그가 처녀 때의 아름다운 패물들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창녀들의 길잡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당하는 수치는 스스로의 죄악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두 손으로 머리를 싸고 의지하는 자들 앞에 나아가 도움을 청하나 주께서 너희를 버렸음으로 그들로 하여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라 경고하셨습니다.

오늘 이 메시지가 오직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향한 역사속의 기록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아직도 이 말씀이 당신의 가슴을 때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신은 욕정에 불탄 암나귀의 때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나의 이러한 때의 모든 죄악을 사하신 나의 하나님의 사랑과 은헤에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