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예언서 강해

(예레미야1:4-5) 네 입에 둔 여호와의 말씀

이요나 2002. 9. 10. 11:39
(예레미야1:4-5) 네 입에 둔 여호와의 말씀



렘1:4-5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오늘은 예레미야 1장 두번째 시간이다. 우리는 앞에서 예레미야가 태어난 시대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적 개혁을 위해 이사야와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을 국가 최고 지도자들 가운데 보내셨다. 그들의 영향을 받아 히스기야 왕이나 요시야 왕은 성군들이 나오기도 하였지만 그들의 노력만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돌아 오게 하지는 못하였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 속에 우상의 뿌리가 깊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시는 과정이 소개되고 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힘하였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자의로 하나님과 대화를 통하여 의사를 표시할 수 있을 때에 부름을 받았음과 하나님은 사람이 그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있게 말씀하심을 우리로 알 수 있다. 사무엘의 그는 한나의 서원대로 젖을 떼었을 때 제사장 엘리에게 보내졌었다, 그 당시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을 세번이나 부르셨으나 사무엘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을 알지 못하고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갔다. 그 당시 사무엘은 누구의 인도를 받아야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다른 사람의 중계없이 하나님과 의사를 나눌 수 있는 그러한 나이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12살이 되면 성인식을 하는 이스라엘의 풍습을 미루어 보건데 예레미야는 13살 정도의 나이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2절의 요시아의 다스린지 십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다는 말씀은 그것을 뒷바침하고 있다.



열세 살이라면 요즘은 아직 코흘리게 개구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우리 조상들은 그 나이에 결혼을 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자녀를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서 그의 정신적 연령이 성인에 이르느냐를 좌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즘 마마보이라는 말들이 있다, 미국에서는 오십이 되어도 어린아이의 성정을 갖은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들은 몸은 성인이 되었는데도 성인의 인격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부모들의 무관심과 또 과잉보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레미야는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나 율법의 가르침과 예언자 가정의 특별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 왔음을 알 수 있다. 예레미야는 어려서부터 그의 아버지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책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며 그 율법에 따른 엄격한 생활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 할머니인 여선지 훌다를 통한 인격적인 수양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였을 것이므로 예레미야는 열세살의 나이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충분히 알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말씀하셨다. 이것은 오직 창조자만이 할 수 있는 말씀이다. 그 어떤 존재도 우리가 복중에 짓기도 전에 우리를 알 수 없으며 어미의 태에서 나오기도 전에 구별할 수 없다. 리브가는 야곱이 태어 나기도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큰자가 어린자를 섬기리라 하셨고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롬9:12,13) 는 말씀을 들었다. 이것은 오직 창조자만이 하실 수 있으며 창조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엡1:4)증거하였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의 시작이 어디에서 시작되며 어디로 가는 것인지 오직 주께서만 아시는 것이다. 다윗은 주께서 나의 발걸음을 세시며 나의 가는 길을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어떠한가 살펴보자. 예레미야는 " 슬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이것은 한계속의 인간의 솔직한 고백이다. 가브리엘 천사가 제단에서 예물을 드리던 사가랴에게 나타나 그의 처 엘리사벳가 아들을 낳을 것을 고하였을 때 그는 "내가 이것을 어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수태 고지를 하였을 때 마리아는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1:34) 고백하였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이 듣고 보고 배우고 경험한 것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는 무한과 영원의 세계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의 말씀으로 통치하신다. 가브리엘 천사는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다고 증거하였다.



예레미야의 솔직한 고백을 들으신 하나님은 그에게 "너는 아이라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맡기신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한 정신적인 의지가 선행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다, 따라서 우리는 신적 사고의 능력이 있으며 또 그 무엇인든지 자신의 의지로 결정하고 선택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통하여 한계와 얽매인 환경의 태두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에 주께서 "일어나 네 발로 서라"(행26:16)는 말씀을 들었다, 따라서 인간의 제한된 한계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이상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패러다임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예레미야의 고정관념을 전환 시킨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어다"(7절)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소명자의 "존재의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이제 그는 더이상 어린아이가 아닌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대언자가 된 것이다.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였다. 이것은 신분의 변화를 의미하며 그의 존재를 보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권세이기도 하다(요1:12).



이어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그들로 인하여 두려워 말라"고 하셨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예언자의 사명을 받은 사람은 그 대상들이 권력자들임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전달할 메시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정하신 바이기 때문이다(롬13:1) 사실 세상의 권세를 벗어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예언자의 사명은 그 권세 속에 속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현실 속에 있고 또 그 권세의 영향을 받아야만 한다. 따라서 그 권세는 우리를 압박하는 두려움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의 존재가 인간의 속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권세 속에 있다면 그 누구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나는 만군의 하나님의 권세 속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어떤 존재로부터 두려워 하지 않고 당당히 하나님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그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주께서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하셨다. 우리는 믿는 자들은 이미 "임마누엘"이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그 의미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살아가는 힘이기 때문이다. "너를 구원하리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당하여야 할 환난이 있음을 알게된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하셨다, 또 바울은 "우리가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그 무엇도 두려워 할 것이 없다. 오직 구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하셨다. 이것은 그의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음을 의미한 것이다. 요한은 복음서 첫글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고 선포하였고 다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바라"(요일1:1) 증언하였다.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였고 또 하나님의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 말씀은 그 자체가 권위이며 존재이며 인격이다. 말의 권세는 인간에게도 동일하다. 모든 조직의 권세가 직권자의 말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말에도 권세가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입에 있다면 그 말의 권세는 어떠하겠는가? 그 말하는 자의 권위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입에 손을 대시므로 그의 말씀을 그의 입에 두셨다. 이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전달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다. 창조자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닿을 때 그 느낌을 생각해 보라. 이것은 평생 잊지 못할 영광의 순간이 될 것이다. 창조시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살아있는 생령이 되게 하셨다. 또 예수께서도 그의 제자들 토에 숨을 불어 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능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시고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과 말씀으로 교제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주를 믿는 우리도 성경을 통하여 그의 말씀을 듣고 음미하고 그 말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고 있다. 지금 당신은 하나님과 어떠한 교제를 하고 있는가? 당신의 입에는 과연 여호와 하나님의 권세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내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