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예언서 강해

(예레미야1:1)열세살의 예언자 예레미야의 소명

이요나 2002. 10. 1. 10:58
(예레미야1:1)열세살의 예언자 예레미야의 소명

렘:1:1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오늘부터 우리의 주일 성경 여행은 예레미야이다. 그동안 우리는 이사야를 공부해 왔다. 오늘 부터 우리는 게속하여 구약의 마지막 말라기까지 달려 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또 목요일에 로마서를 공부하고 있다. 구약이 끝날 지음 목요 성경여행은 요한 계시록을 달려 나가게 될 것이다. 이 계획은 2004년 초에 이를 것입니다만 그 때쯤이면 우리는 주일과 목요예배에서 모두 계시록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지루한 것 같지만 그동안 우리는 창세기부터 역사서, 그리고 시가서를 넘어 대선지서까지 왔다. 여러분들이 나를 도와 함께 우리의 여행이 성령의 임재하심 속에서 즐거운 여행이 되도록 기도하여 주시기 바란다.



오늘 시작하는 예레미야는 먼저 예레미야의 소명으로부터 시작 됩니다. 성경기자는 먼저 예레미야의 출신을 언급하고 있다. 1절에는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니라 고 소개하고 있다. 아나돗은 예루살렘 북동쪽에 위치한 베냐만 지파에 속한 땅으로(수21:18) 다윗시대의 아비아달의 고향이기도 하며(왕상2:26) 제사장들이 모여 사는 주거지역이기도 하였다.



요즘 우리나라는 정치 리더들의 출신 지역을 따라 민심이 나누어 지고 있지만 자기가 태어난 지역은 누가 뭐라고 해도 특별한 감정과 정서를 갖고 있게 마련이고 각 지역은 나름대로의 색갈과 흐름를 갖고 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예레미야는 후일 아나돗이 하나님의 징벌로 명말할 것을 알면서도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믿게 하기 위하여 아나돗의 사촌의 땅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예레미야의 출생에 대하여 의문을 갖고 있다. 성경이 뚜렷하게 예레미야가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이라고 기록한 곳은 이곳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힐기야의 아들이라고 할만한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더우기 성경이 그렇게 기록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



에스라 7장을 보면 힐기야의 가문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 되어 있다. 그 유명한 성경학사 에스라가 힐기야의 증손이기 때문이다. 힐기야의 아버지는 살룸이며 그의 어머니는 유명한 여선지 훌다였으며 힐기야는 요시야 왕의 개혁에 앞장선 제사장이였다 (열하22장4-14). 이러한 정황을 미루어 보아 예레미야가 이러한 가문의 환경의 영향과 가르침을 받고 자라났을 확율은 충분하다. 더우기 할머니 훌다 여선지는 예레미야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2절에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그 시대적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지 십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1:2) 우리는 앞에서 살펴본 이사야서에서 히스기야 왕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 왕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였고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 선지자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에 힘을 썼었다. 그러나 결국 히스기야 왕도 인간의 충동적인 성정을 이기지 못하여 결국 궁궐의 모든 것을 대적들에게 보여 줌으로서 하나님의 예언하심을 따라 멸망을 맞고 말았다.



히스기야가 죽고 그의 아들 므낫세가 뒤를 이었는데 므낫세는 이스라엘 역대에 남을 만한 악한 왕으로서 이사야 선지자를 톱으로 갈라 죽이기까지 하였다. 이사야의 죽음 이후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기까지 30년을 침묵하셨다. 자신의 종들이 무참이 죽음을 당할 때 그의 아품은 어떠하였겠는가? 므낫세가 죽자 그의 아들 아몬이 2년간 다스리다가 암살을 당하고 8살의 요시야가 그 뒤를 이어 유다의 왕이 되었다.



요시야 왕은 힐기야와 같은 선지자들의 개혁적인 영향을 받아 16살부터 이스라엘을 부흥을 위해 정신적인 개혁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의 종교개혁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여 북 이스라엘의 벧엘에까지 확장하여 그곳에 설치된 우상제단을 제거하였으며 산당의 재사장들의 뼈까지 불살라 바렸다. 그는 제사장 힐기야를 시켜 성전을 수리 하게 하였으며 성전 수리 도중 율법책을 발견하고 여선지 훌다의 자문을 받아 유다 안에 사는 장로들을 소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여 주었다(왕하23:1-3)


요시야 왕은 율법책의 기록을 따라 이미 민족들 가운데서 잊어버려졌던 유월절을 엄격히 지켰으며(열하23:22) 북방정책에도 열심을 갖어 무리하게 애굽왕이 앗수르를 토벌하러 가는 것을 막으므로 결국 므깃도 전투에서 애굽의 바로느고에게 살해를 당하고 만다.(왕하23:29, 대하35:20-24) 그후 유다는 요시아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위로 세웠으나 애굽의 바로느고가 애굽으로 잡아 가고 요시아 막내 아들 엘리아김으로 대신 왕을 삼아 여호야김으로 이름으로 고치고 조공을 바치게 하였고 여호야김은 25세에 즉위하여 11년간 통치를 하였다. 그후 바벨론 왕 느부갓넷살이 세상을 평정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애굽과 관계하고 있는 여호야김을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을 왕으로 세웠으나 석달 후 페위되어 바벨론으로 잡혀가고 그의 삼촌 맛다니야로 왕을 삼고 그 이름을 시드기야로 불렀다.(왕하24:10-16)



시드기야는 요시야왕의 아들로서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다. 그는 11년 간 통치를 하면서 바벨론을 대항하지 말라는 예레미야의 눈물어린 권고를 듣지 않고 오히려 옥에 가두고 예레미야를 죽이고자 하는 방백들에게 내어 주기까지 하였다.(렘38장) 결국 시드기야 왕은 애굽을 믿고 바벨론 왕국에 항거하므로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과 유다의 전지역은 포위당했다. 예루살렘은 B.C.586년에 완전히 파괴되어 유다는 멸망을 맞고, 시드기야는 여리고 근처에서 생포되어 목전에서 그의 아들들의 처형을 목격하였고 자신도 눈이 뽑힌체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압송되어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갇혀버린 비운의 왕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격열한 때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것이었다.(내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