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6장-I)"왜 나를 찾는거여?!"

이요나 2000. 9. 26. 14:52
(요한복음6장-I)"왜 나를 찾는거여?!"

 

요한복음6:2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오늘은 요한복은 6장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본문말씀은 6장 26절로 29절까지입니다. 이 말씀은 오병이어 이후 가버나움으로 오신 예수님을 뒤좇아 온 군중들에게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결론구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앞뒤를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명절 유월절 무렵 그의 제자들과 벳새다 근처 한적한 곳에서 자기 앞에 나오는 큰 무리들을 대하고 계셨습니다. 저녁이 가까이되자 예수께서는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이들을 먹일만한 충분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글을 쓴 요한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알고 계셨고 다만 빌립을 시험하기 위하였다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빌립은 현실주의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주면 그를 믿겠다고 할 정도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빌립이 얼듯 계산해 보니 이 군중들에게 먹일 충분한 떡을 사기 위해서는 8,000불 정도 들 것 같았습니다. 사실 그곳에는 여자와 어린 아이들을 제하고 남자들만 5,000명이었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제자 안드레는 한 아이가 가진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가지고 나와 이것이 있지마는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어쩌면 이 두 제자는 지금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상 사역에서 어떤 문제를 만나면 현실적 불합리함을 탓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불합리한 현실의 조건을 믿음으로 극복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안드레의 방법을 채택하여 그가 가지고 나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주며 군중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 그들이 받은 것은 오직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였을 때 무리가 먹고 남은 것을 거두었더니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였습니다.

 

그 결과 군중들이 흥분하여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눈치챈 주님은 제자들을 건너편으로 배 태워 보내시고 무리를 해산시키셨습니다. 제자들이 군중심리에 사로잡힐 것을 우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가버나움까지의 뱃길은 6마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호수의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태풍이 불기 시작하였지요. 제자들은 노를 젓기에 애를 먹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우리의 발견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순종하였음에도 시련의 고통이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왜 날 찾아왔더냐?

    이것은 우리에게 내가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려해도 우리가 가는 길은 순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그들의 믿음의 두 번 째 시험이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이미 빌립에게 모든 사람들로 먹게 할 수 있는 충분한 떡을 어디서 살 수 있겠느냐고 시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때는 유월절이 가까웠음으로 만월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산 위에 올라 기도하시면서 밝은 달빛 가운데 부딛겨 오는 맞바람과 싸우며 노를 젓는 제자들을 바라 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물위로 걸어오셨습니다. 배 위에 있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 배에 가까워졌을 때 유령인가하며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을 밝히시고 제자들을 안심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 바다 건너편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떠나심을 알자 그들은 주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던 가버나움으로 찾아 왔던 것입니다.

 

그 무리들은 "배가 한 척밖에 없는데 어떻게 이곳을 올 수 있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고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6-27)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목적이 무엇이냐?

    이것은 그들이 예수를 찾는 목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를 찾아 나옵니다. 선거철만 되면 갑자기 유명인사들이 대형교회에 철새처럼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어떤 어르신네를 보면 자기는 성당엘 나가는데 부인은 대형교회를 나갑니다. 그 주변의 인사들이 각 종교별로 분류하여 남편과 부인이 각각 다른 교회로 절간으로 찾아다닙니다. 솔직히 말하여 이들이 찾는 것은 예수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오직 투표용지일 뿐입니다. 또 이들은 절간에 가서도 분향하고 교회 가서도 아멘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팔짱을 끼신 채, 그들을 바라보시며 "네가 당선된 후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를 찾는지 두고보자 그때는 너를 도와 줄 이름이 아무도 없고 모든 것을 네 스스로 책임져야 할 것이니까"라고 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적을 본 것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께서는 계속하여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크리스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자기 육체적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열심히 일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그렇다고 해도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영적 체험을 한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달성시키기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물질적인 부분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이 무엇에 목적을 두고 살아 가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왜 떡을 위하여 일하여야 했는가?

    그러면 이러한 육체적 욕망은 어디서부터 발생한 것일까요? 이것은 인간의 시작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창설하신 후 아담과 하와를 그 동산에 두시고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관리하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과 악의 지식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것을 먹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결국은 죽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이것을 알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 나무의 위도 알고 있었고 그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단의 유혹을 받자 그 열매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들의 마음에 의혹이 생기자 그 나무의 열매는 먹음직스럽고 그들을 지혜롭게 할 만큼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육체적 소욕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그 열매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로써 그들에게는 육체의 소욕대로 이끌려 가야하는 행동의식이 그들에게 설정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성경은 너희가 육으로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으로 살면 살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로부터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하고 종신토록 땀을 흘려 일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즉 먹고살기 위하여 육체의 종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살아가는 목적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를 위하여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최소한 하루에 8시간씩 일을 하여야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아가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고 인생은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정의(定義)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이러한 성경의 정의에 대하여 당신은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는 무엇을 하여야 하나요?" 예수께서는 "당신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답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도 주님께 그 정의를 내려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 일을 하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의 질문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문제는 오늘을 사는 당신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새벽기도도 하고 금요철야도 하고 십일조도 들이고 봉사도 하고 주일이면 아침부터 종일토록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많이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감각이 크리스챤들에게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그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만 말합니다. 이미 그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네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느냐?"입니다.

   이미 가르쳐 주지 않았더냐?

   그러면 과연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에게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10장 12절을 통하여 이미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개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사람이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여러분들은 이것은 구약의 성도들에게 한 말이 아니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으니 이러한 것은 우리와 관계없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늘에 있는 내 아버지께서 온전하심처럼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 땅의 모든 사람은 이 말씀 앞에 묵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런 방법이 없는 것일까요?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이 원하는 일인 것인가요? 예수께서는 그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면 정말 그것을 족한 것일까요? 넵! 더 이상의 대답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답하신 것이니까요. (6장 2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