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6:67 예수께서 열두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앞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자기를 찾아 온 사람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적을 본 것이 아니라 떡을 배불리 먹은 때문이라고 말씀 하시고 다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합니다. 이에 그들은 주님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는 표적은 무엇입니까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라고 반문하였습니다.
모세는 만나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가 하나님의 사람임이 증명되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하나님께서는 매일 아침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고 그들은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떡 다섯 덩이로 수만명을 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자 그들은 과거 모세가 자기 조상들에 한 말을 기억하였던 것입니다. 모세가 "너희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에게 들으라"(신18:15)고 예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참 떡을 너희에게 준 것으로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기다리기나 한 듯이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외쳤습니다.
누가 먹일
것인가?
이 말은 4장에서 예수께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께 생수를 달라고
할 때 한 말이기도 합니다. 삶 속에서 육체의 갈증으로 갈급된 사마리아 여인을 주께서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영적인 차원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즉 육적인 갈급이 해결되기 위하여는 영적인 문제가 선결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주께서는 로마의 식민지 속에서 먹고사는 일에
지쳐있는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육체의 충족을 위하여 선결되어야 할 영적인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셨습니다.
아마 지금 우리민족에게 오셔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면 우리들도 똑같이 주여 우리에게 이 떡을 주세요 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사실 말이지
물질만능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대형창고마다 먹을 것이 가득 차 있으면 무얼합니까? 풍족하게 먹고산다는
것은 아담 이후 이 땅의 모든 인간의 문제입니다. 이제는 대통령도 백성의 빵 문제를 해결 못하면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를 부르는 세상의 소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을 위한 진정한 빵은 인간인 적그리스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곧 우리들의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가공적인 것과 진정한
것
예수께서는 여기서 참이라는 단어를 쓰셨습니다. 여기서 사용하신 참이란 단어
헬라어는 참된(true)를 의미하는 '알레테스'와 가공적인 것에 대하여 반대의 의미를 갖는 영어로 진실한(real) 혹은
진정한(genuine)을 의미하는 '알레디노스'가 있는데 여기서 주께서는 진정한 것을 의미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이제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일제히 "주여 우리에게 이 떡을 항상 주시옵소서"외쳤습니다. 그들의 의식이 여기에 도달했을 때 주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하셨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안타깝게도 "그러나 너희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것처럼 " 이 백성이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할 것이요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할 것이라"함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무엇에 의하여 진정한 것을 볼 수 있는 눈과 귀를 상실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알을 하게 하셨다"(롬1:28)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영원한 생명의 주권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벼러두면...
저는 로마서 1장에서 무서운 말씀을 발견하였습니다. 로마서
1장 18절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이에게 나타났다 하셨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그에게 이미 보이셨다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 하였고 "하나님이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버려 두었다" 기록하였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두려운 말입니까?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는 사람들이란 자기의 정욕대로 하고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브레이크 끊어진 자동차처럼 한없이 그 육체의 더러움 속으로 내려가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겪은 사람들은 이 말씀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내리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대면하고 그의 손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적들을 목도하고도 그에게 나아 오기를 꺼려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일이 우리
중에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내게 올 자들은
누구인가?
여기서 주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는 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보내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안에 예정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께서는 "마지막 날"을
언급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지막 날이란 주께서 오시는 그 날을 의미합니다. 또 주께서는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살린다는 말씀은
육체의 죽음에서 다시 살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살릴 자들에 대하여 몇 가지로 구분하여 말씀하셨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주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라는 전제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보고 믿는 자"(40절)를 말씀하셨고 또 "아버지께서 이끄는 자"를 말씀하고 계십니다(44절). 여기서 이끈다는 말씀은 문맥상 45절의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 요한은 이사야 54장 13절 말씀을 인용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가르침이란 성경의 가르침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내 살을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하셨습니다.
이것은 고난 받기 전날 행하신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마지막 만찬에 행하신 성찬을 의미하신 것으로 우리가 매월 떼는 성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실 것을 말씀하시며 자신은 하늘에서 내려 온 영생하는
떡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던 사람들, 즉 아버지로부터 내려 온 영생하는 떡을 달라고 외치던 사람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들은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겠는가?"하며 모두 물러갔습니다. 요한은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증언하였습니다(66절).
너희도
갈래?
이제 그동안 예수를 따라다니던 많은 제자들이 물러간 후 겨우 12제자만
남았습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지요. 나는 이것을 읽을 때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축복이며 은혜인가를 감사하게 됩니다.
나로 하여금 아무 의심 없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나로 영생케하는 영원한 생명의 본체이심을 믿게 하셨으니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참으로 기가 막힌 질문이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도 또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가르침 받고도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돌아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우리 주위에 있는 이러한 사람들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 때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누구에게 가오리까?"하고 명언을 합니다. 베드로가 한 말 중 이 대답이 가장 우리를 감동시킨 말이기도 합니다.
물론 주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라고 대답하였지만 이것은 주께서 베드로 자신이 한 말이 아니고 이것을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베드로를 통하여 "영생하는 말씀"이라는 고백을 듣습니다. "영생하는 말씀"이 당신과 함께 하는 것은 커다란 영광입니다. 만약에 "영생하는 말씀"고 함께 하고 계시다면 당신은 "임마누엘"하신 것입니다. 나는 영생의 말씀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하십시오.
'신약강해 > 요한복음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7장-2)얘! 넌 뭘 보고 예수 믿니?! (0) | 2000.10.04 |
---|---|
(요한복음7장-I)이거다 저거다 말씀 마시고! (0) | 2000.09.29 |
(요한복음6장-I)"왜 나를 찾는거여?!" (0) | 2000.09.26 |
(요한복음5장)"네가 성경을 공부하면 모하냐?"(2) (0) | 2000.09.22 |
(요한복음5장)크리스챤이 성경을 연구해야 하는 이유(1) (0) | 2000.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