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1:13)사랑엔 장벽이 없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이요 향낭이요"(13절)
서는 유일하게 정경에 포함된 남여간의 사랑 이야기로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쓴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유월절 8일째에 아가서를 노래하여 아가서를 성전의 지성소에 비유하였습니다. 따라서 아가서는 구약 속의 신약으로 이방인(교회)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가서는 다른 책들과 아주 다른 문체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내용을 분석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만 히브리인들의 시적 음율을 이해하면서 그 노래의 대상이 누구이며 어떤 은유를 내포하고 있는지 연결된 병행구를 잘 살펴면 노래 속에 은유된 그리스도와 우리의 사랑이 진하게 표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서 남여간의 이성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을 묘사한 곳은 아가서 뿐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묘사가 중심이지만 남여의 사랑 즉 에로스적인 사랑에 관한 내용은 한 귀절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들로 하여금 가장 가깝게 이햐하기 위한 대유적 표현이지 하나님께서 이처럼 남여간의 애정적 사랑을 하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가서를 대할 때 이 땅의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람들의 간절한 사모의 마음과 모든 장벽을 초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사랑이 인간이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는 측면에서 느낄수 있도록 대유된 사랑의 노래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아가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혼할 사람들의 이성적 사랑의 출발선이며 교훈적 질서라고 하겠습니다.
I. 사랑의 출발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다"(2절)
저자는 1장1절에서 '솔로몬의 아가라' 기록하여 저자와 제목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가란 노래 중의 노래라는 비교급 용어로서 가장 탁월한 노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노래는 솔로몬의 인생 속에서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서 깨달은 사랑의 진리라고 생각됩니다. 2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은 사랑에 빠진 남여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솔로몬은 첫마디에서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여기서 나는 왕을 지칭한 것이며 '네 사랑'은 복수로서 왕을 사모하는 여인 중의 여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이 글을 읽는 형제자매님들은 이 순간부터 자신이 왕자와 공주임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a. 포도주 속성
우리는 '내게 입맞추기를 원한다'라는 말씀에서 이성적 감정의 출발이 여인에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지라'는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다'는 기록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두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하나는 남여의 사랑은 포도주와 같이 달콤하고 열정적이고 마취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왕과 여인의 사랑은 포도주와 같은 것으로 출발된 인위적인 마취에서 충동 되어서는 않된다는 사실입니다.
잠언 기자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에게 마땅치 아니하며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자에게 줄지어다'(잠31:4,6) 기록하였으며 그 이유에 대하여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 버리고 모든 간곤한 백성에게 공의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잠31:5)기록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사5:11)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이 어디 포도주만을 말한 것이겠습니까? 사람의 취하게 하는 물리적인 요소들을 언급한 것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혼인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잔치의 여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셨으며 바울은 속병을 앓고 있는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사용하라고 권하였습니다.
만약에 포도주가 인간에게 해악을 미치는 것이라면 주께서 기념하라 언약하신 마지막 막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사용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는 것은 포도주의 속성을 언급한 것입니다. 사람을 취하여 이성을 마비시키고 흥분하게 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그릇치는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포도주는 노아의 홍수 이 후 이 땅의 물질이 산화되면서 노아에 의해서 만들어졌는데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은체 누어 자식들에게 하체를 들어내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취하게 하여 결국은 자신을 잃게 만듭니다.
따라서 여기서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란 왕과 여인의 사랑이 물리적이나 감정에 의한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는 의미한 것으로 남여 간의 사랑의 원리를 언급한 것입니다. 남여가 만나면 술에 취한듯이 서로의 마음이 이끌려 입맞추기를 연민하는 마음이 일어나 서로 이끌리게 되는데 그 사랑의 이끌림이 포도주에 취한 것처럼 물리적이고 충동적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남여들이 포도주와 같은 사랑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후회를 쌓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은 사랑의 원리를 깨닫고 그 질서안에서 사랑을 완성 시켜야 할 것입니다.
b. 사랑의 이름
솔로몬은 3절에서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 구나"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처녀들이 왕을 사랑하는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인이 처녀로 명시된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기름'은 열매를 짜서 얻은 것으로 기름은 고대로부터 인간의 실생활에 유익을 주는 귀한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이와 같이 기름은 인간의 실생활에서도 유익하고 귀한 것이지만 기름은 최종적 결실인 열매를 짜서 얻은 것이라는 데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기름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지혜와 지식을 갖춘 인성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인성은 오랜 가르침과 경건한 삶과 경륜을 통해서 연마된 지혜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또한 아름답다는 말은 원래 여성적인 것이 아니라 아름다울 美가 큰 수양을 가리키는 것과 같이 남성적인 말로서 부족함이 없이 충분한 상태를 말합니다.
성경은 모세와 요셉과 다윗을 가리켜 아름답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다'는 말은 그의 인격적 결정체인 고귀한 인품이 많은 사람들 앞에 감각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과연 이처럼 아름다운 한 남성의 모습은 백말을 타고 나타난 왕자와 같지 않겠습니까?
또한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다'는 말은 세상과 사람들 가운데 나타난 완성된 인품과 인격적 활동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이름'은 특별한 일을 위해 지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 의미없는 이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다'는 말은 지혜와 사랑과 믿음으로 충만한 한 사람의 고귀한 인격을 언급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라는 말은 세상에서 덕망 받는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를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남자라면 온 세상의 처녀들의 선망의 대상이되고 남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연일 대국민 이멜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차라리 대통령이 말을 줄여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쏱아 낼 것이 아니라 묵묵히 기도하며 그윽한 향기름을 통해 덕망있는 이름을 쏱아 내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차라리 그랬다면 이 나라의 모든 처녀들이 그에게 반해 대통령을 사랑할 것입니다.
c. 합리적인 사랑
솔로몬은 4절에서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 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도다"노래 하였습니다.
이 노래는 누가 하는 것인지 명확히 규정을 지을 수 없습니다만 우리가 어느 사랑하는 사람과 인연이 이어지기를 원할 때 그 누구인가에게 마음의 호소를 하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내 사랑의 천사에게 부탁하는 말일 수도 있겠구요.
흥미로운 것은 침궁으로 이끌어 들인 여인이 '나'에서 '우리가'로 바뀌어 간 것입니다. 여하튼 이 복받은 남자의 침궁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한꺼번에 몰려 들고 있습니다. 예수의 침실에 들어선 거룩한 신부들의 모습과 같지 않습니까?
우리 말에 열기집 마다할 사내 없다는 말이 잇습니다만 남자들이란 묘해서 이 땅의 모든 여인들이 자신을 처다보아 주기를 바랍니다. 그를 위해서 허풍도 떨고 여러 달콤한 말로 연인들을 휴혹하려 합니다만, 사려가 깊은 여인들이야 이러한 유혹에 넘어갈리가 없지요.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여자들이 달콤한 포도주에 취해 야수의 침실에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도다'라는 말은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포도주보다 더 기억하리니 바른 자들이 당신을 사랑하나이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뭇 여성들을 사로잡는 무기는 달콤한 포도주가 아니라 쏟은 향기름 같은 아름다운 이름인 것입니다.
II. 사랑의 얼굴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것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7절)
솔로몬은 5절에서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 지라도 솔로몬의 휘장 같구나 "노래 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세상에 둘도 없는 최고의 인격의 왕자를 사로잡은 여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왕이 침궁으로 끌어들여 수많은 궁녀들의 찬사와 질투를 한몸에 받은 여인은 얼굴이 검은 게달의 장막같은 여인이었습니다.
게달의 장막이란 이스마엘이나 에서족들이 광야에 거하는 장막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흠모할 것이 조금도 없는 가치없는 여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여인이 '솔로몬의 휘장 같다'는 귀절입니다. 여기서 휘장이란 여러가지 색깔의 실을 정교하게 통으로 짜서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드리운 천입니다. 요새로 치면 커텐입니다.
이 휘장은 성막을 이동할 때 증거궤를 덮어으며 이 외에 성막 입구에도 또 다른 휘장이 설치되었습니다. 따라서 휘장은 성스러운 곳에 들어가는 표시인 것입니다(출16:31-35, 37). 그러므로 솔로몬의 휘장이란 왕의 임재와 위엄을 구분하는 은밀한 표시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다이루셨다 하셨을 때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더이상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고 제사장의 대리 역활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기 몸으로 산제사를 드림으로 그를 믿는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지성소에 친히 들어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a. 여인과 포도원 지기
여인은 6절에서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럼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 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여인은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자신의 외모를 비웃지 말라고 하며 자신의 출생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외모가 거므스럼한 것은 근본적으로 못생긴 것이 아니라 어미의 아들들이 미워했기 때문이라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미 사람들을 외모로 취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금하고 있는데 그들은 성경 밖에서 자기편을 모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포도원 지기로 삼았다'는 것은 본인이 이처럼 외적인 모습을 가추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합당히 받아야 영혼을 위한 합리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포도원 지기로 삼았다'는 말은 그들의 세상에서는 여인은 다만 남자들의 향락의 도구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아들들이 마시고 즐길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메시야를 구하는 여인들을 모두 세상의 아들들의 포도원 지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미의 아들들이니 태어남으로부터 주어진 운명인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3장에서 여자는 '너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부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습니다. 그로하여 이스라엘 여인들은 메시아를 낳을 것을 서원하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의 아들들(타락한 천사들)이 내려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 좋은대로 아내를 삼아 그 땅에 아낙자손들을 낳았습니다(이 말씀은 읽는 분들의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여인은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의 한계를 서술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세상은 약육강생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하여 인간의 영혼은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 오직 굴복케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이라'(롬8"19-20) 하였습니다.
b. 목자를 찾는 영혼의 연민
솔로몬은 7절에서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것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노래하였습니다. 이 귀절은 영혼의 목자를 찾는 여인의 소망과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여인의 영혼은 왕이 침궁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아직은 왕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영혼을 부르는 왕의 소리를 찾아 목장을 헤메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 글을 보면서 한 때 갈급한 심령으로 여기저기 말씀의 목장을 찾아 헤데던 시절을 기억하게 됩니다. 나의 영은 내 영혼을 부르는 음성을 듣고 있었지만 내가 그를 발견하기까지는 청춘을 모두 쏟아야 했습니다. 결국 나는 내 인생을 모두 팔아 버린 후에야 숨겨진 보물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4장에 기록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에서 온전한 예배 가운데 들지 못한 사마리아 여인의 영혼의 흐느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는 유대인과 또 그리심산 산에서 예배를 드려도 된다는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러는 사이 이 여인의 인생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신령한 예배를 만나기까지 방황하는 영혼의 고통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III. 왕의 여인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들기 같구나"(15절)
솔로몬은 8절에서 "여인 중에 어여뿐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짜라 목자들의 장막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어다"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참 목자를 고대하는 여인에 기도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것은 한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예정섭리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양 우리에 들지 못한 또 다른 양들을 생각하는 목동의 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참목자와 삯군을 말씀하시며 '내게 우리 안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10:16)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이 여인은 양떼 들 속에서 어울리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이 염소였기 때문입니다. 아직 죄를 씻지 못한 채 방황하는 영혼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스마엘의 후손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수넴 여인이 자기 딸에 들린 귀신을 쫓아 달라고 주께 매달렸을 때 주님은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줌이 마땅치 않다 거절 하셨습니다. 이 때 여인은 그렇습니다. 우리는 개와 같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자녀들의 상 밑에서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주님은 네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네 딸이 구원을 얻었다 하셨습니다.
오랜세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사마리아를 죄인 취급해 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의 온전한 혈통을 지키지 못하여 유대인에게서 경멸을 받아 왔으며 이방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경멸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 속에는 복음을 향한 영혼들이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이 땅에는 참으로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들의 예배가 합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성도들이 갈급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염소라도 치고 있다면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주께서 부르신 그들을 침궁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a. 도전적 사랑
9절에는 "내 사랑아 네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바로의 준마란 애굽의 바로왕에게 총애받는 말을 말합니다. 바로 왕은 그 말을 타고 사냥을 나가며 또 전쟁터를 달리게 됩니다. 왕의 총애를 받는 말은 그 기개가 당당하여 그 어떤 것도 두려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이방인 가운데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복음의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하루에 삼천명을 더하는 제자들이 더해졌고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거룩한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비록 게달의 장막같고 거을린 얼굴로 세상의 아들들을 위하여 포도원을 가꾸던 사람들이었지만 후일 그들은 솔로몬의 장막과 같은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갈보리채플을 일으킨 수많은 젊은 사역자들은 세상 가운데 사단의 영역에서 방황하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사단은 그들을 도구로 종횡무진 하며 세상을 누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의 은혜로 지금은 사단의 세계를 정복하는 복음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또 여기서 우리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인의 기질을 볼 수 있습니다. 남자들은 적당히 이국적이고 또 도전적인 여인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체험해 보지 못한 이방여인만이 베풀 수 있는 향짙은 냄새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이 지쳐있을 때 그 지친 열정을 불태우는 것은 요조숙녀가 아니라 부끄럼없이 달리는 말같이 사랑의 묘미를 아는 여인입니다.
이런 여인을 만난 왕은 말할 것도 없이 "네 두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외칠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의 꿈은 여인의 품에서 이루어 진다고 하는가 봅니다. 남자의 열정을 불태워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갈 여인이 있다면 그 남자처럼 행복한 남자는 없을 것입니다.
b. 사랑의 타이밍
아가서 기자는 12절에서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을 토하였구나"노래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타이밍을 언급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왕의 필요를 절묘하게 만족 시키는 사랑의 센스를 말한 것입니다.
우리말에 여우같은 마누라하고는 살아도 곰같은 마누라하고는 못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편이 필요한 때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열 수 있는 여인의 지혜 이 얼마나 귀합니까? 나드 향이란 여인이 첫말 밤에 자기 몸에 부어 잠자리를 준비할 때 사용하는 귀한 향료입니다. 베다니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머리에 부었던 향료입니다.
왕의 마음을 항시 즐겁게 하는 지혜로운 여인은 항상 나드향을 발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향은 하나님 앞에 쏱아 내는 진실된 마음입니다. 계시록에는 '어린 양이 보좌에서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계5:8)기록히였습니다. 주님은 지금 보좌 위에서 우리가 발한 나드향에 흡족해 하고 계신 것입니다.
계속하여 기자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이요 향낭이요" 노래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그 여인의 마음에서 쏟아내는 열정은 왕의 품을 그윽한 향으로 채울 것입니다. 이어 왕은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멜화송이로구나" 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엔게디 포도원은 왕실의 포도원으로 왕의 포도원 엔게디에 피어난 고벨화는 신부를 치장하는 꽃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여인은 왕의 눈길을 포도주에서 이끌어 내기 충분한 아름다음과 향을 지녔던 것입니다. 또 왕은 그녀를 향하여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들기 같구나" 노래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여인이 선한 것을 바라 보는 심성을 칭송한 것입니다.
c.영원한 궁전
이제 솔로몬은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이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레로구나" 노래하였습니다. 화창하고 푸른 참상은 왕과 그녀의 시들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노래한 것입니다. 또한 백향목은 궁전을 짓는 귀한 목재이며 잣나무 또한 좀과 벌레가 먹지 않는 향이 그윽하고 곧은 나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루살렘 밖에서 여자들의 조롱을 받던 이방 여인이 왕의 침실을 장악하고 이제는 그와 함께 영원한 집을 짓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침상 우리의 집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며 우리안에 펼쳐진 영원한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라보게 됩니다.
지금은 비록 우리가 세상 가운데서 얼굴이 검게 그을린 포도원지기 같지마는 우리가 양떼를 따라 목자들의 뒤를 따를 때 우리의 발걸음은 왕의 왕이신 침삼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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