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아가서 강해

(연애대작전)사랑은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다

이요나 2005. 7. 20. 15:09

(아가2:16)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는 사랑

 

(아가2:16)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우리는 앞에서 사랑의 속성을 살펴 보았습니다, 먼저 사랑은 포도주와 같이 취하고 이성을 잃어버리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사랑은 취하지 말아야 하고 이성적이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의 주체인 남자의 인격이 선하고 이름다워야 합니다.

 

두 번째로 사랑은 장벽이 없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것은 뻔뻔하고 도전적인 여인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여인의 감정은 용감하여 그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에덴으로부터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는 이유가 원수의 머리를 부술 사내아이를 낳기 위해 새롭게 셋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씨를 얻기 위한 여인의 투쟁은 모든 장벽을 뛰어 넘어 왕의 마음을 몰약에 취하게 합니다.

 

오늘은 남녀 간의 사랑의 속성을 살펴 보는 두 번째 시간으로 새랑은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다는 제목을 붙여 보았습니다. 만약 남녀의 사랑을 이성으로 제어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녀간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1장에서 여인의 사랑은 뻔뻔하고 도전적이라서 한번 남자를 마음에 품으면 사랑의 향낭 몰약을 품어내어 사내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남녀 간의 문제는 여자로부터 출발합니다. 따라서 결혼적령기의 여성들은 사랑의 묘약을 합당하게 사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I. 사랑의 조건(1-2)

솔로몬은 1절에서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노래하였습니다. 사론은 지중해 연안에서 갈멜산에 이르는 아주 비옥한 땅입니다. 비옥한 땅 사론에 핀 수선화는 무엇에 비할 수 없는 신랑의 조건입니다.

 

이스라엘은 신랑이 신부를 데려 오기 위해서 그 신부에 합당한 사례를 신부 부모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만약 신부가 이혼당하면 혼자서 살아 갈 위자료에 해당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남자의 아름다움이란 사론의 수선화처럼 기름지고 풍요로워야  합니다. 이것이 1장에서 언급된 남자의 아름다운 향기름입니다.

 

이사야는 몰락하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레바논은 부끄러워 마르고 사론은 사막과 같고 바산과 갈멜은 목엽을 떨어치는도다"(사33:9)슬퍼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레바논이 이스라엘의 기백과 이상이라면 사론은 풍족한 이스라엘의 젖이며 갈멜은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입니다. 따라서 사론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이상을 성취할 힘과 능력인 것입니다. 남자에겐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신부감을 얻기 위한 남자들의 비참한 투쟁을 노래한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아담이 범죄 후 하나님으로 받은 형벌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바로 저주 받은 땅을 갈며 종신토록 땀을 흘리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에덴동산으로부터 사론의 수선화가 되고자 땀을 흘리도록 셋팅된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입니다. 그는 지상 최고의 위치에 있는 열국의 왕입니다. 사론의 수선화처럼 부족함이 없는 궁전의 주인입니다. 말 한마디면 천하가 일시에 손아귀에 들어 올 수 있는 위치입니다. 그런데도 솔로몬은 자신을 가리켜 '골짜기의 백합화'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부족함이 없는 왕이라도 하나님이 준비하신 천생연분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신세는 골짜기의 백합화일 수 밖에 없음을 노래한 것입니다.

 

백합은 최고의 그윽한 향기를 자랑하는 순결의 꽃입니다. 수선화와 백합은 신랑과 신부를 꾸미는 꽃 중의 꽃입니다. 그러나 골짜기에 있는 백합이라면 그 향기가 아무리 그윽하고 순결하드라도 외로운 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솔로몬이 아무리 사론의 비옥한 땅의 수선화와 같다고 해도 님 없는 궁전은 꿀 없는 꿀단지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남자들은 아름다운 배우자를 취하기 위해 두 가지 이상적인 조건이 먼저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샤론의 수선화처럼 풍족함이요 다른 하나는 골짜기 속에서도 겸손하여 고고한 향기를 잃지 말고 성결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부족함 없는 에덴동산의 주인이어도 짝없는 비둘기가 되어 깊은 잠에 빠진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왕이라도 만사가 귀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II. 여자의 입맛 (3-5)

그러면 여자는 어떨까요? 솔로몬은 2절에서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노래하였습니다. 연분을 만나지 못하면 남자나 여자나 똑같습니다. 아무리 그윽한 향기와 순결한 자태를 갖고 있어도 사랑하는 서방님을 만나지 못한 여자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일 수 밖에 없습니다. 향이 좋고 순결한 여자는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백합화 같은 여인을 만나면 세상 남자들은 그 꽃을 꺾기 위해 군침을 질질 흘리기 마련입니다. 그때부터 남자들은 눈이 반짝거리며 헛방귀를 풍풍 뀌며 벼슬을 세우고 날개를 펴서 자신의 위용을 자랑하며 여자를 유혹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유혹에 넘어간 여인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그래서 솔로몬은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다 한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가리켜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노래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여자란 요염한 여우와도 같습니다. 자기 입맛을 채우기 위해 젓가락만 들고 다니는 실속파입니다. 남정네야 외로움에 지쳐 속이 까맣게 타버리던 말던 여자들은 수풀 가운데 가장 좋은 사과나무 그늘에 앉아 실실 여유를 부리며 콧구멍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강남의 성형외과들이 돈을 잘 버나 봅니다)

 

사실 남자들은 여자들이 자기 앞에서 잘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요즘 드라마를 보면 모두 먹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남녀가 만나면 맛있는 것 먹는 것보다 즐거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더우기 남자가 베푼 식탁에서 맛있게 먹어대는 여자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아마  이 방법이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하긴 요즘 남자들 중에는 여자들이 사주는 밥을 즐겨먹은 쫌팽이들도 있습니다만 이런 늑대들은 결국 헛물을 키는 겝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그늘에 앉아 잘 먹어 주는 여자를 보면 남자들은 넋을 잃고 콧방귀를 뀌며 안절부절 못한다는 것입니다. 천 여명의 후궁을 둔 연애박사 솔로몬도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 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4절) 읊었습니다.  여기서 '내 위에 기'란 남자의 영역을 표징하는 깃발을 말합니다. 여기서 잔칫집이란 연회 홀을 말합니다.

 

남자들은 창조로부터 여자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싶도록 셋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미혹하여 죄에 빠뜨린 뱀의 머리를 부수기 위한 아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잠에서 깨어나 여자를 보는 순간 '너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 도장을 찍고 하와란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습니까?  그로 하여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두 사람은 사랑의 병에 걸리고 맙니다. 

 

III. 사랑의 열병(6-7)

그렇지만 이제부터 문제는 여자에게 일어납니다.  자기 감정에 빠져 절제를 하지 못하고 남자의 그늘에 앉아 입맛에 끌리는 대로 사정없이 먹던 여인은 이 남자가 요구하는 사랑을 쏟아 내기에 역부족입니다. 여왕벌엘 빨린 숫벌은 죽고 만다고 합니다만 멋진 남자의 덫에 걸린 여자는 그 남자의 허기진 사랑을 채우기에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야만 합니다.

 

이에 여인은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4절) 하고 주변을 향해 애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다른 남자에 빠진 여자를 누가 도와 주겠습니까?

 

이쯤이면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삽질을 멈추고 도끼자루를 거두게 됩니다. 덫에 걸린 암사슴을 침실로 메고 들어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지요. 연애박사 솔로몬은 남자 향취에 취해 넋나간 여자의 모습을 가볍게 품에 넣고 맙니다.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이 얼마나 신나는 달밤입니까?

 

그러나 이쯤되면 여자나 남자는 수렁에 빠진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말에 신선노름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사랑에 빠진 솔로몬은 나라 일이든 예배든 눈에 들어 올리가 없습니다. 젯밥이 눈에서 용솟음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7절에서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외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못말리는 사랑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긴 여행이며 감당하기 힘든 전쟁의 시작입니다. 이 여행 속에는 얼굴도 모른채 수백 리 길을 달려가야 했던 리브가의 열정과 아들을 얻기 위한 애절한 라헬의 눈물과 갈급한 사마리아 여인의 사랑의 목마름이 깃들어 있습니다. 

 

IV.사랑의 투쟁(8-9)

8절에는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기록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산에서 달리고 산을 넘는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때 핸드폰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요즘에야 아이나 어른이나 핸드폰이 있고 또 인터넷이 널려 있어서 사랑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실시간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열병에 걸린 사람들은  금방 헤어졌음에도 연방 문자를 날리고 있습니다. 자면서도 문자를 받으려고 핸드폰을 끼고 잡니다.  

 

우리 모임에서 제일먼저 결혼한 문의배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내가 개설한 인터넷 클럽을 오프라인 모임으로 이끌어낸 장본입니다.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벤처를 운영하는 형제는 남부럽지 않은 믿음의 가정의 외아들로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만 서른이 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해 여름 광복절 날 우리는 두 번째 오프라인 행사로 815 러브 정팅을 개최하였는데 60쌍의 형제자매들이 이상형을 만나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형제 한 사람이 불참하여 팀장인 문의배 형제가 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장영이라는 예쁜 자매와 1지망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형제는 부천에 살고 있었고 자매는 분당에 살고 있었는데 6개월 동안 사귀던 두 사람은 더 이상 떨어져서 지낼 수 없다고 결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인즉 이들은 저녁마다 서로의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승용차 데이트를 한 것이었습니다. 형제가 자매를 집에 데려다 주면 또 자매가 형제를 집에 혼자 보낼 수 없다고 또 형제 집 앞까지 동행하고 이렇게 밤을 세운 것입니다.

 

어느 날 게시판에 그 형제의 공개 구혼 프로포즈가 올라 왔습니다. '사랑하는 영이야 우리 결혼하자 더 이상 떨어질 수 없구나 낮에는 일을 해야되는 데 너를 만나면 헤어지기 싫고 밤새도록 너의 집 우리 집 앞을 왔다 갔다 하느라 진이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그러니 우리가 헤어지지 않기 위해 결혼하자' 나는 이 글을 보며 정말 못 말리는 사랑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계속하여 여인은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 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연애 중에는 혹시나 어떤 놈에게 빼앗길까봐 안달이 납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테스트하며 감시를 합니다. 이처럼 남자는 여자를 자기 품에 넣어야만 잠을 자게 마련입니다.

 

V. 사랑의 역사(10-14)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10)

 

여기서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사랑이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리브가가 이삭을 찾아 달려 온 수 백리 길과도 같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다섯 번의 남자를 갈아 처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음성은 신랑되신  주님을 기다리며 언약의 잠에 빠진 신부 된 교회를 향한 주의 음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A. 사랑의 고난

그는 "겨울도 지나갔고 비도 그쳤고"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완전한 사랑이 이루기 까지는 추운 겨울도 마다하지 않았고 쏘나기도 맞아야 했습니다. 나는 나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십이 년을 참아 왔습니다. 겨울이 열두 번 지났고 장마비에 모든 것이 떠내려 갔습니다. 그러나 나를 사로잡은 그의 사랑이 나를 내 마음과 소망을 붙잡고 있기에 나는 지금도 견디고 있습니다. 

 

12절에서 솔로몬은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의 땅에 들리는구나" 이처럼 사랑의 열매는 오래 참음으로 시작됩니다.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 죽어버린 듯한 나무 가지에서 돋아난 사랑의 싹은 변하지 않는 사랑의 증거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켰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한탄하였습니다. 반구는 하나님의 제물로 사용하는 집비둘기를 말합니다. 이 땅의 멸망 속에서 비둘기는 감람나무 잎을 물고 돌아 왔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자기의 때를 위하여 참고 기다리는 비둘기와 같습니다. 

 

   B.잠에서 깨라 

계속하여 성경은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무화과나무 열매는 우리의 지혜를 더하고 포도나무 향은 우리 마음에 기쁨을 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솔로몬은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14)라고 애절한 노래를 읊었습니다. 아무리 당신이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과 은혜의 축복을 누렸다 해도 그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면 당신의 인생은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잠든 비둘기일 뿐입니다.

 

당신이 오랜 세월을 예수를 믿어 그의 사랑을 알고 또 사랑의 언약을 받았다 하드라도 아직도 잠에 취해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면 당신이 보낸 추운 겨울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당신을 위해 준비된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무슨 소용이며 포도나무 꽃의 향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지금도 당신을 향하여 깨어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C. 여우를 잡으라

그러면 이처럼 애틋한 사랑의 열정과 기나긴 사랑의 역사를 가진 연인들 사이에 왜 이런 일들이 일어 날까요? 이혼한 사람들에게는 앞에서 말한 설레임과 사랑의 역사가 없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남녀의 불타는 사랑 없이 결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기록하였습니다. 여우는 광야에 스스로 굴을 파고 사는 짐승으로 동물이나 사람을 홀려 헤치는  야행성 동물입니다.

 

에스겔은 "너의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같으니라"(겔13:4)하였으며, 주님은 예수를 잡으려는 헤롯을 가리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 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눅13:32)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여우란 거짓 선지자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종교를 권좌의 방편으로 삼는 지도자들을 빙자한 말씀입니다. 지금 당신은 솔로몬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VI.양 떼에 속한 사랑(15-17)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부부의 하나가 된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비밀을 가리켜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1,32)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서로 속하여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먼저 주님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설명하여 '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온다'(요10:3,4) 하였으며 다시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 하셨습니다. 이것은 목자와 양의 필연적 속성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는 원리를 설정하셨습니다. 그것은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요14:20)하셨습니다. 이로서 바울은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4:4)증거하였습니다.

 

세 번째로 주님은 포도나무와 가지 열매를 통하여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요15:4)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요15:7) 하셨습니다.

 

끝으로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인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백합화 같이 겸손한 자세로 순결하여 지극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잃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은 너희의 거룩함이라 (살전4:3) 하였고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살전:5:16-18)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우리의 순결함 속에서 자기의 양떼를 먹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한 주님의 중보이십니다. 

 

주님은 죽음을 앞에 두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여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2,23)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여 주를 상실하였는지 또 이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가서 3장에서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