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9:1-5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까 그 부모오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오늘의 이야기는 요한복음 9장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마침 거리에서 태어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평소부터 갖고 있던 의문에 대하여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소경 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그 사람의 죄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의 죄입니까?" 이것은 제자들 뿐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이나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참으로 기이합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물론 이 말씀은 그 앞에 있는 소경에 국한 된 것이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가 하시고자 할 때 하시니까 말입니다.
여러분은 미문(美門) 앞에 앉아 있던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나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일으킨 앉은뱅이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또 주께서 일으킨 18년 된 등이 굽은 여인이나 많은 소경들과 귀머거리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때 맞춰서 세워둔 배역진들 같습니다만 어쩌면 하나님에 있어서 이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의 연극과도 같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연극은
극본에 의하여 모두 연출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서
씻으라!
주께서는 그 소경에게 다가가서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하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주께서는 꼭 그러한 방법이 아니라도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었는데 하필이면 침으로 흙을 이겨서 바르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든지 자기의 임의로 하실 수 있어서 우리처럼 어떤 정해진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또 하나는 그 장님으로 하여금 믿음의
매개체를 설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믿음을 갖게되는 데는 간접적이든 직접적인 체험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감각적인 육체와 이성적인 판단의 능력을 소유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단순하게 영적인 체험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체험을 하려면 먼저 그에게 믿음이라는 것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그가 장님이라 하더라도 지금 예수님이 하신 방법을 쓰실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가복음 10장에서 소경 바디메오를 만나게 됩니다. 바디메오에게는 오늘 본문과 같은 과정은 필요 없었습니다. 이미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있었고 그를 보기를 원하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바디메오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고자 하던 길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가는 "그가 길에서 주를 따랐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믿음의
생성과정
또한 루스드라에서 바울의 전하는 말을 듣는 앉은뱅이를 보고 그에게
구원받을 믿음이 있음을 보고 "바로 일어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 의하여 고침을 받기를 원했던 귀머거리를 치료하실 때에는 양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아 그의 혀에 닿게 하시고 "에바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과 귀가 고침을 받으리라는 의식도 소망도 믿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이것은 동일한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적 치료를 체험한 사람들은 모두 주께서 자기의 병을 고치실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도 그러한 믿음과는 거리가 멀고 병원의 의사를 통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의사가 하나님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하여는 믿음이 필요하고 이 믿음은 육체적 감각과 이성적 의지에 의하여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하는 과정을 지켜 본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간접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나의 말을 못 믿겠거든 나로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주님은 나로 하는 그 역사가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보내심을
받았다
오늘 주께서 만난 태어날 때부터 소경 된 자는 운명에 의하여 주를 만났고
주께서 그에게 침으로 흙을 이겨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셨을 때 그는 그 말씀대로 실로암으로 가서 흙을 씻었습니다. 만약 침으로 이긴 흙을
바르지 않았다면 그는 실로암으로 가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장님이니 거부할 수도 없었고 진흙으로 눈에 굳어진 흙은 씻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실로암 이란 보냄을 받았다"라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아마 그는 그곳을 가는 도중 실로암이란 말의 의미를 음미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믿음이 있었다고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가 유대인들의 재판에서 죄인으로 판결을 받고 쫓겨났을 때 주께서는 그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는 "주여
그가 누구이니까 내가 믿고자 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믿음에 의하여 눈이 뜬 것이 아님이 확실합니다. 요한은 "실로암으로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다"고만 기록하였고 실로암이란 "보냄을 받았다"라는 주석을 달아 놓음으로서 사람이 영적인 체험을 하기 위하여는 육체적인
감각과 그것을 통한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참으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패를 찾는
사람들!
오늘 요한은 그러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가 눈을 뜨고
왔거늘 그를 축하할 생각은 안하고 그를 심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즉 그의 성공을 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실패를 찾기 위하여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하심과 사랑으로 치료하신 것을 그것이 절대로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증거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앞으로 대환난 동안에 하늘에서 집체만한 우박이 떨어졌을 때 어떻게 그것이 하늘에서 떨어질 수 있느냐고 증명을 하려 할 것입니다. 또
페암 말기의 환자가 하나님의 기적을 통하여 난 사람들을 엑스레이라든가 최신 의학기구를 이용하여 그럴 수 없음을 증명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이미
기정 사실이 된 사실을 부정적으로 돌려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의 마음은 그가 다시 장님으로 돌아가야 속이 후련할 것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
이것은 마치 오늘날 교통사고가 날 때 일어나는 두 가지 현상과도
같습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사람이 다치면 곧 두 대의 자동차와 함께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은 두 종류의 사람들이 달려옵니다. 하나는 앰블런스
자동차를 타고 온 구급대이고 또 다른 한편은 그 사고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한 경찰들입니다. 그들은 똑같이 싸이렌 소리를 울리며 달려 왔지만 달려
온 목적은 각기 다릅니다. 경찰들은 그 환자가 얼마나 다쳤으며 어떻게 하여야 살릴 수 있느냐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경찰은 사고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그 현장을 보전하고자 합니다. 자신이 그 현장을 모두 조사하기까지 그 현장의 상태를 그대로 보존합니다. 그리고 경찰은 그 사건의 목격자를 찾습니다. 옆에서 죽어 가는 사고를 당한 사람의 아픔이나 가족의 슬픔은 그들과 관계없습니다. 그는 속히 그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증거를 찾아내고 목격자를 찾아내서 진술을 받아내고 그 사건의 잘못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이 싸이렌을 울리고 달려 온 또 다른 한 편의 구급대는 그 사건의 원인 같은 것은 관심 없습니다. 또 누가 잘못 했느냐 에도 관심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어디가 얼마나 다쳤으며 어떻게 이를 치료할 것이냐에 있습니다.
믿지 못하는
이유!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와 똑같은 두 무리를 보게 됩니다. 8절과
9절을 보면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고 기록되었습니다. 소경의 눈이 뜨였다면
함께 놀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사람을 축하하며 지난 세월을 위로해 주어야 할 것이거늘 그들 사이에는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어져 눈이 뜨인
것을 증명하려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여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고 눈뜬 소경을 심문하려 했던 사람들은 모두 종교적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눈뜬 사람은 바로 말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것을 뒤집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눈이 다시 감기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가 어떻게 눈을 떴느냐고 심문하기에 이릅니다. 눈을 뜬 그가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였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사실 그대로 말하는데도 그들은 좀처럼
믿지 않습니다.
차라리 보지
못했다면!
이들은 그 날이 안식일이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자는 하나님께로
온 자가 아니라는 결론부터 내 놓고 일단은 이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의 부모를 대질시켜 그러한
사실을 부정하려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 사람을 다시 불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명분을 내세워 하나님의 역사를 번복하려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를 출교 시켜 버리고 맙니다. 그들이 이러한 억지를 쓰는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안식일 날 그러한 일을 하는 자는 죄인이며 소경은 전생의 죄를 지고 있다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이 사건으로 우리가 어떠한 선입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어떠한 일을 대할 때 우리는 그 사건의 진실로 접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차라리 너희가 소경이었더면 보았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봄으로 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이것은 더러운 물로 가득 찬 통은 그 물을 쏟아 버리기 전에는 새로운 것을 받아 드릴 수 없다는 원리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관념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어서 진리를 부정하기에 이르며 그 생각의 지배는 자신들의 권익을 위하여 어떠한 일도 불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외적인 현상을 보고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커다란 죄악입니다. 선에 대한 기준을 잘못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은 영적인 부분이 있으며 인간의 탄생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다만 부모의 태에서 태어남으로 육체적 존재가 시작되는
것이지만 인간 그 자체 속에는 하나님이 주관하는 영적인 부분이 있어서 결국 모든 것은 그의 뜻대로 있었고 그의 뜻대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임마누엘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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