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 11장-1)김용옥! 네 영혼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이요나 2000. 11. 8. 23:44
(요한복음 11장-1)김용옥! 네 영혼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요한11:23-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네 영혼이 사망의 골짜기에 있다면
   시편 23절에서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말의 요점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곳에 처함"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23편 끝에서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켜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시편 49편에서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또 이사야 선지자는 "주의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리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사26:19) 고 기록하였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도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네 목전에 숨으리라"(호13:14)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구약에 부활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었으나 죽음 이후의 영생에 대하여 충분한 가르침을 얻을 수 없습니다.


   
400년 간의 침묵

   육체의 죽음과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관한 내용은 신약 성경 속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신약에는 여러 부분에서 종말론이이나 사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전개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말라기기 죽은 후 40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그 기간 속에서 철학의 시대가 열리고 발전되어 왔습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사후의 세계에 대하여 즉 사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하며 연구하였습니다. 철학자들은 각각 자기들의 의견들을 말하며 그 지식을 가지고 제자들을 불러모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아무에게도 진리에 도달하는 만족한 대답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연구하고 탐구하면 할수록 의혹과 의문들이 속출할 뿐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특정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나사로의 죽음과 연관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베다니에 살고 있던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이들 가족은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그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는 요단강 근처에 계신 예수님께 급히 사람을 보내어. "사랑하는 이가 병이 들었으니 속히 와달라"고 급보를 띄웠습니다.


   
예수님만 여기 계셨다면..

   그러나 예수께서는 급보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요단강 근처에서 이틀 정도를 더 묵으셨습니다. 결국 예수께서 베다니에 도착한 것은 나사로가 죽어 장사한 지 나흘이나 지난 후였습니다. 이미 그의 시체는 부패되었을 때였지요. 나사로의 누이들은 집에서 슬픔에 빠져 울고 있었습니다. 동네 어구에 들어 선 예수께서는 자기가 온 사실을 그들에게 알렸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애도 속에 슬픔에 빠져 있던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여리고로부터 오신 예수님을 맞으러 동구 밖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이르러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나의 동생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울먹였습니다.

 

 마르다의 맘속에는 왜 이렇게 늦으셨느냐는 원망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주님이 나사로의 질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고친 것을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에게 급보를 띄웠던 것인데 주께서는 나사로가 죽어 장사한 지 나흘이나 지난 후 오신 것입니다. 나사로는 이미 죽고 그들은 소망을 잃고 슬픔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마지막 날에 다시 살줄은 알지만?

   이 때 예수께서는 "네 오라비는 다시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 내가 압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역설하셨습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인류의 역사상 이러한 말을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말을 하였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가 틀림없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부인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김용옥 교수가 이러한 말을 KBS에서 했다면 그는 곧바로 방송국에서 내려와 정신병원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김용옥은 아직 정신병자가 아니므로 그런 소리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소리를 할 수 없는 것은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가 하나님보다 더 신봉하는 노자도 공자도 석가도 모두 죽었고, 그도 그들을 따라 죽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혹시 여러분들은 과거 그가 신학을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성경도 잘 알아서 천국에 들어 갈 것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는 결코 우리가 가는 곳에 올 수 없습니다. 만약 나중에 당신의 주위에 김용옥이가 있다면 당신이 있는 곳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궁국적 소망

   인생의 궁극적인 소망은 결국 영원한 삶입니다. 칠 팔십 인생을 살고도 죽기 싫은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또 이것은 가상의 공간이 아닌 다른 세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 가상적인 세상을 얼마든지 담을 수 있듯이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육체를 벗어나는 순간 영원의 세상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들의 처소로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천국이냐 지옥이냐"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우리가 육체로 살아 있을 때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여야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또 다른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를 봅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어느 부자가 죽어서 지옥엘 갔습니다. 목이 말라서 물 한방울을 찍어서 입에 넣고 싶을 정도로 기가 막힌 곳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부족함이 없는 영생을 누리는 나사로를 보고 주님께 자기 형제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려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곳과 이곳은 깊은 영혼의 골이 있어서 아무도 갈 수가 없고 설혹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다만 그곳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통하여 복음을 듣고 받아들임으로서 영생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죽음의 이중성

   오늘 예수께서는 죽음의 이중성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은 죽음의 정의로서 죽음이 두 번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음의 정의 중 하나는 모든 육체는 한번 죽는 것이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체적 죽음으로서 뇌의 활동이 정지되고 숨이 멎고 심장이 멈추고 세포가 죽어서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의학적으로 말하는 임상학적 죽음입니다. 또 하나의 죽음에 대한 정의는 사람의 의식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육체의 생명이 있었던 기간 중 그 자신이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을 때의 상태입니다. 그가 비록 육체적 삶이 호화스럽고 부족함이 없다 하더라도 그가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 필요성도 느끼지 않고 살았다면 그는 성경이 말하는 또 다른 죽음의 상태 속에 있는 것으로 영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 죽음과 생명에 관하여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임마누엘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