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 11장-2)죽음의 궤도에서 춤추는 나의 영혼아!

이요나 2000. 11. 14. 10:59
(요한복음 11장-2)죽음의 궤도에서 춤추는 나의 영혼아!

요한11:23-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믿어도 죽어야 산다?
   주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리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의 죽음을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믿는 자들도 이 땅의 모든 사람들과 같이 죽음을 통과하여야 함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 후에 삶이 있다면 죽음의 과정은 통과하는 터널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어서 주께서는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하셨습니다.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살아서 믿는 자들이 모두 죽지 않는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먼저 부활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모든 인간은 부활을 통과하여야 함을 밝히셨습니다.

 

계시록 20장에는 흰 보좌 앞에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죽은 자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5장에서 이미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인간은 생명의 부활이든 심판의 부활이든 주 앞에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요5:25-29). 그러나 위에서 말씀하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는 말씀은 우리의 육체가 죽음의 터널을 건너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생명의 본체이며 영생이신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을 음미해 둘 필요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부활의 단계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의 이해를 위해 모든 사람이 죽음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상태를 설명하신 것은 참으로 흥미 있는 일입니다. 한계속의 인간은 오직 지식과 체험을 통하여야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경험한 것만 안다
   우리는 어린이로부터 성장하여 출가하기까지는 여러 가지 과정 속에서 단계적 준비를 필요로 합니다. 또한 성년이 되면 먼저 자기 스스로를 시험해 보는 경험과 체험의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때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지요. 이론적인 지식을 터득하고 부모를 통하여 절제를 배운 젊은이들은 그래도 무난히 건너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 교육과 가정교육의 간접체험을 소홀히 한 사람들은 산 지옥을 헤메이게 됩니다.

 

자기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물불 가리지 못하는 나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입장에서도 자녀를 온전케 하기 위해 어려서부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에서 저녁이면 일찍 귀가하여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는 규칙에 이르기까지 부모들은 자녀를 훈련시키고 또 그 과정을 지켜보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은 체험을 통과하여 새로운 세상을 터득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영원한 집에 이르기까지 과도기를 체험하게됩니다.

 

젊어서 생생하던 육체의 여러 부분이 아파 오고 나이가 들수록 몸 각 기관의 활동이 부분적으로 제한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피조물들도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바란다" 말하며 "성령의 첫 열매인 우리도 속으로 탄식하여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또 우리의 소망은 눈에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궁극적 의미는 영생에 이르기 위한 죽음이라는 육체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과하는 과정
   다시 말하면 육체를 떠나 영원의 세계에 도달하기까지 겪어야 하는 육체의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을 서술한 것으로 우리 모든 육체가 통과하여야 할 통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육체의 죽음에 대하여 육체의 장막을 벗을 날이 멀지 않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따라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하신 말씀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하나님과 결코 떨어지지 않는 상태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있다면 잠시 통과하는 죽음의 터널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다음 궤도로 진입직전의 우주 비행사들의 긴장된 순간을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모습은 변화되고 변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통과한 후 앞으로 우리가 살 곳은 손으로 만든 장막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죽음과 썩음이 없고 오직 영원한 생명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에 관하여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것은 사후의 세상의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네가 믿느냐?
   우리는 마르다와의 부활에 대한 대화 속에서 부활에 관한 자기의 주장을 과격하게 피력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주절주절 부활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피력하고자하는 마르다에게 "네가 이것을 믿느냐?"하고 다그쳤습니다. 이에 마르다는 더 할말을 잃고 "주여 그렇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라고 긍정할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자기의 주장을 강력히 피력하려면 자기의 주장을 확실히 증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주장은 억지가 됩니다. 주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둘러선 가운데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나사로의 무덤으로 이끌고 갔습니다. 많은 무리 앞에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선 예수께서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 때 마르다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지났으매 벌써 냄새가 납니다"라고 말하며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을 지배하는 잘못된 지식과 사상은 진리를 향한 인간의 영혼을 구속하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가 영생의 세계를 체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믿기는 뭘믿어?
   주께서는 영광의 체험을 가로막는 마르다를 제치시고 무덤 속의 나사로의 시체를 향하여 큰소리로 "니사로야 나오라"고 소리쳤습니다. 마치 방안에서 놀고 있는 아들을 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얼마나 긴장된 순간이었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굴속을 바라 볼 뿐입니다. 그러자 나사로가 수의로 감긴 채 걸어 나왔습니다. 여러분 이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 시체가 부패한 상태의 죽은 자가 수의를 동인 채로 걸어나오는 장면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영광의 순간입니다. 아마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영광의 감격에 빠져 숨이 멎은 채 눈물도 흘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플어 놓아 다니게 하라"하셨습니다. 이로써 주께서 마르다에게 강력히 주장하신 말씀 즉,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이 그대로 실천되는 순간입니다. (다음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