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2: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나의 때
요한복음 2장 혼인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모자라서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부탁을 받았을 때에도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습니다"하셨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예비치 못한 손님들의 참석으로 충분한 준비를 못했던 결혼식 주최자를 돕기 위하여 한 말이었으나 예수께서는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냉정히 말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예수께서는 공생애 처음부터 그의 때를 의식하며 일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7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초막절 명절에 미리 올라가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 그의 동생들은 스스로 나타나기를 원하면서 왜 세상에 나타내지 않느냐?"는 질문에 "아직 내 때가 차지 않았다"하셨고 후일 성전에 올라와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에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은 관계로 손을 대는 자가 없었다고 요한은 기록하였습니다. 또 요한은 8장에서도 성전 연보궤 앞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에도 그를 잡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은 이미 예수를 잡기로 결의를 하고 힘을 썼으나 아직 예수님의 영광 받을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를 잡으려는 그들의 노력과 관계없이 예수를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천지만물의 주관자 하나님의 계획이 세상 속에서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
그 후 수개월이 지난 후 12장 23절에서 주께서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이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이 영광을 얻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받으실 영광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인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없이하기 위하여 그 모든 죄를 걸머지고 하나님의 심판에 친히 임하신 것입니다. 즉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신의 죄를 모른 채 인생의 고통과 질병 속에서 죽어야 하는 모든 인간들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친히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그의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위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배울 13장 앞부분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되셨음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오"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민망하다는 의미는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마음을 뜻합니다.
자신의 고통을 알 때
예수께서 마음이 민망하신 이유는 자기의 고난의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날을 향하여 오랜 세월 달려 왔습니다만 결국 그 날이 이른 것입니다. 인생살이 속에서 어떤 일을 놓고 사람의 마음이 고통에 빠지는 두 가지 경우입니다. 그 하나는 자신의 앞에서 일어날 일들을 모를 때이며 또 하나는 자신의 앞에 일어날 일을 명확히 알 때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겪어야 할 일을 모를 때에는 자기 스스로 위안할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임박한 환난, 즉 자신이 받아야 할 고통의 순간을 알고 있을 때 그 마음의 고통은 표현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사형수가 자기의 사형의 날을 모르고 지낼 때의 마음과 사형장이 보이는 현장을 걸어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그 일을 알고 계셨고 이제 그 날이 눈앞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모든 일을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준비하시고 진행해 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 즉 모욕과 채찍으로 맞으심과 못 박히심 등의 고난에 대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인간으로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사랑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우리로 언어의 의미적 혼란에 빠지게 합니다.
믿음의 증인들
아직까지 우리 크리스천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악인들의 번영과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입니다. 우리는 욥기를 읽으면서도 의인이 이 땅에서 받는 고난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역설처럼 들려지는 말입니다만 믿는 자들은 자신이 세상에서 겪어야 하는 고난에 대하여 인내하고 감사하며 그것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심을 알 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랑을 깨닫기까지는 꽤 오랜 믿음의 경륜이 필요합니다만 이 땅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았은즉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하는 요셉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의 삶의 끝에서 일어나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예비하심을 바라보고 읽는 우리로 하여 감사를 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살아 온 요셉으로 보면 정말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고통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온전한 곳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 믿음을 갖고 자신 앞에 전개되는 삶 앞에 충실히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셉 자신은 자신의 앞에 전개될 어떠한 고난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친히 어떠한 고난을 받으셔야 할 것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민망하다"고 하신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고난을 참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우리가 믿음의 장(章)이라고 말하는 히브리서 11장에는 하나님을 신뢰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그 고난을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받은 고난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히11:36-38)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람들이며 믿음의 사람들이며 하늘나라를 위하여 힘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예수께서 처음부터 바라보고 오신 영광의 때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그로 하여 오늘날의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신약강해 > 요한복음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 12장-2) 예수도 젊음의 고뇌가 있었다! (0) | 2000.11.25 |
---|---|
(요한복음 11장-3)저품격 크리스챤인가, 고품격 크리스챤인가? (0) | 2000.11.22 |
(요한복음 11장-2)죽음의 궤도에서 춤추는 나의 영혼아! (0) | 2000.11.14 |
(요한복음 11장-1)김용옥! 네 영혼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0) | 2000.11.08 |
(요한복음9장)성공한 자의 실패를 찾으려 하는 사람들.. (0) | 2000.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