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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장-2) 예수도 젊음의 고뇌가 있었다!

이요나 2000. 11. 25. 11:09
(요한복음 12장-2) 예수도 젊음의 고뇌가 있었다!


요한12: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오늘은 요한복음 12장 두번째 시간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십자가의 죽음에 직면하였습니다. 즉 주께서 여러 번 상기시키셨던 때가 온 것입니다. 이 때를 바라보며 예수님은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오"라고 말씀하시며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저는 이 기도를 들으면서 주께서 에던 동산에서 아버지께 드린 애절한 기도소리를 생각합니다.

 

"나의 아버지여 할 수 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것은 어느 사람들의 말처럼 십자가의 고통 앞에선 예수 그리스도의 번뇌와 후한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인간들을 구원할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안타까움에서 애통하는 절규인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었던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대변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꼭 이 방법이 아니고도 당신의 사람들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이 고난을 면하게 하소서 하신 것입니다. 또 우리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애절한 기도 속에서 인간의 속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인간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보여지는 하나님의 모델이시기도 하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인간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모델이신 하나님
   인간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공생애 속에서 희노애락을 느끼시며 슬픔과 기쁨을 목도하시며 인간의 비애를 그대로 느끼시며 맛보신 분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경험할 일을 미리 경험하셨습니다. 눈앞에 다가온 십자가의 공포는 가히 인간으로 감당할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죽음을 모르고 당하는 것과 죽음의 고통을 바라보고 가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는 그 무엇이든지 가능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수많은 기적들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자이시며 이 땅의 주인이심을 증명하였습니다. 또한 이제 그의 제자들도 충분한 교육과 경험을 통하여 복음전도의 일꾼으로 일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나사로의 부활로 인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고 그를 따랐습니다. 요한복음12장 13절을 보면 유월절을 위하여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오르실 때에 큰 무리가 떼를 지어 나와 종려나무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외치며 주를 맞이하였습니다. 이 장면을 본 바리새인들은 "볼지어다 우리의 하는 일이 쓸데없다. 온 세상이 저를 쫓는도다"고 외쳤습니다.


   이대로 달려가고 싶어!
   이제 그리스도의 사역은 절정에 도달하였습니다. 유월절 축제에 참가한 헬라의 지식인들도 그의 제자들에게 찾아와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뵙고자 합니다"라고 정중히 청하였습니다. 평민이었던 제자들이 이미 세상 속에서 존경받는 선생의 위치가 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지체할 필요도 없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행진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들이시며 창조자이시며 이 땅에 오시는 왕이시며 주권자이십니다. 주께서 미리 보시고 달려오신 주님의 때가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십자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지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하고 애통하신 것입니다. 서른살의 혈기 왕성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최고의 절정의 시점에서 못박아 죽어야 하는 고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이해할 수 있으면 "민망하다"는 단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방법만이 사람들의 죄와 사망과, 지옥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인간의 고통을 경험하심
   창조자이신 예수께서는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으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죄의 값을 치루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법입니다. 이것을 통하여야 대속된 인간만이 하나님의 영원 속으로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극한 상황에 처할 때에 즉 마음에 고통으로 가득찰 때 논리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상황의 중압감에 눌려 자포자기하게 됩니다만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영원 속에 거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의 한계를 초월된 곳에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있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현실의 상황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지식의 범위를 초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는 인간으로서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극한 상황에 계실 때에도 일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주무시지도 졸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원의 세계를 실행하시기 위하여 우리 앞에 놓인 고통과 아픔을 인내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영원의 세계가 곧 세상 가운데서 극한 고통을 이겨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부름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안을 위한 계획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았은즉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이 이 땅에서 받는 수모와 역경과 고통의 경험은 하나님의 영원을 상속받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며 소망을 향한 발자취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저희가 그리스도의 상주심을 바라보고 고통에서 벗어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악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였다고 서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세운 계획은 혼란이 아니라 평안을 주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좋은 결과를 예비하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극한 상황 속에서 견디기 힘든 고난을 겪어야 한다 하여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때 그것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계획을 통과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온전한 정금을 만들기 위하여 가장 뜨거운 불을 통과하여야 하는 과정과도 같은 것입니다.


   극한 상황이 닥칠 때
   우리가 극한 상황을 만나 우리의 마음이 민망해질 때 우리가 해야 할 첫 번 째는 주께서 우리 앞에서 행하셨듯이 먼저 우리의 솔직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 기도로서 아뢰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지금 내가 겪는 이 문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원한 목적을 달성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예수께서 행하신 것처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주께 맡기고 오직 그를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아버지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에서 "아닙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오직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영원한 뜻을 이루소서"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지금까지 하신 일로 영광을 받으셨고 이제 그리스도의 서원으로 하여 다시 영광을 받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자신의 삶을 가리켜 내가 죽음에 처하나 또 삶에 처하나 나의 육체로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뿐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애통의 기도는 그 극한 고통과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 젊은 예수의 절규이었으며 수천년 동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열망하는 그리스도의 애절한 간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죄인된 인간들에게는 구원을 향한 유일한 소망의 노래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