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 13장)네가 아직도 벽창호인 이유는?

이요나 2000. 12. 2. 07:48
(요한복음 13장)네가 아직도 벽창호인 이유는?


요13:3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오늘은 요한복음 13장입니다. 본문 속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저녁식사를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최후의 만찬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은 유월절 만찬입니다. 13장의 전체 내용을 요약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식탁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제자들 앞으로 가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참으로 심각한 순간입니다. 스승으로부터 발을 씻긴다는 것은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감이 스치는 긴장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께서 행하신 일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알겠느냐 하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 후 주님은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제자들이 행하여야 할 진정한 사역의 개념을 설명하신 것입니다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사역이란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함께 앉아 있는 제자 중 한 사람이 자신을 배반을 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신을 배신할 유다에게 내가 할 일을 하라고 지시까지 하셨습니다. 참으로 기막힌 순간입니다. 그 말을 함께 들은 제자들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유월절 명절에 쓸 물건을 준비하라고 하신 것으로 알았습니다. 이것은 말이란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여러가지로 의미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똑같은 말이라도 그 말의 의미를 알 때와 모를 때와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문맥으로 보아 가롯 유다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미 한 식탁에서 요한이 주를 팔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고 주님은 내가 떡을 찍어 주는 사람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13명의 사람이 모인 식탁에서 주님과 요한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식탁에 함께 한 자 중에서 자기를 팔 자가 있다 하셨을 때 베드로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들의 관심사는 그 문제에 집중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떡 한 쪽을 유다 입에 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롯 유다에게 네 할일을 하라 하셨을 때 가롯 유다는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미 그 할일이란 늘 머리 속에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판 일이 돌발적인 사건이 아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일을 하실 때 거리낌 없이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가 하실 일들을 그대로 하셨습니다. 주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을 물 속처럼 훤히 알고 계셨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눈 빛 속에서 자신의 양심이 훤히 드러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죄를 감추고 부모 앞에 서 있을 때와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 다음 33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7장에서 언급하셨던 말씀을 상기 시키신 것입니다. 7장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 가서 헬라인들을 가르칠 것인가 말하며 주께서 말씀하신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8장에서도 예수님은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8:21)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도 그들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제자들도 이해할 수 없어서 혼란스러워 할 뿐이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생각을 초월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역사상 경험되지 못하고 또한 성경으로도 가르침 받지 못한 부활의 개념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11장에서도 죽은 나사로를 깨우러 가신다는 주님의 말씀에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제자들이 부활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은 제자들의 믿음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후 제자들은 곧 죽은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의 살아남을 실제로 목격하기에 이릅니다. 무덤 속의 죽음에서 살아나온 나사로의 실체를 바라보며 그들은 주께서 말씀하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간접 체험하기에 이르릅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살아남으로도 제자들에게 부활에 대한 온전한 확신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은 오직 나사로와 몇몇 사람들에게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각되어질 수밖에 없는 특수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가사의한 사건이 세상에서 인정되기 위하여는 인간의 지식과 이해를 충족시켜주는 보편적 경험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감지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고 오직 창조자의 주권 속에서 정해진 때에 있을 전체적 사건이기 때문에 그 의미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자신이 떠나실 것을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주여 어디로 가시려 나이까?"하고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부활과 영생의 개념은 구약 속에서도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의 나타나심과 함께 이루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신비 속의 비밀

   그 당시 부활이라는 개념은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신비에 속한 것으로 오늘날 모든 종교들의 궁국적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모두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개념은 가지고 있어도 다시 살아난 부활 몸에 대한 개념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장로교와 오순절 계열에서 신학과정을 배우면서도 부활의 개념과 영생이라는 개념을 배워보지 못하였습니다. 천국이란 우리가 죽어서 가는 죽음 저편에 있는 하늘나라의 세상으로만 인식해 왔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불교나 그 밖의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이 땅에서의 믿는 자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 기독교가 주장하는 영생의 개념은 불교가 말하는 영생극락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한 사람들의 가르침이 우리 교회 속에 흘러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많은 교회에서 무천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무천년이란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 "천년왕국"이라는 말씀을 상징적 표현으로 해석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서 그들의 주장을 따르면 천년왕국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그를 믿는 온전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천년왕국에 살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천년왕국이라는 기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 영생은 육체의 죽음 후 우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누리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이후 이 땅에서 살고 있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천년왕국을 누린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수많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무참하게 당한 수욕과 목베임을 천년왕국이라 한다면 영생을 소망하고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며 살아야 할 우리의 삶이 너무 허무하고 비참합니다. 요한 계시록 20장 4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한다"고 기록되었으며 다시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고 다시 구체적인 언급을 하였습니다. 또 7절에서는 천년 후에 있을 일들을 언급하며 "천년이 차매~~~"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문맥의 흐름으로 천년이라는 기간은 이 땅에서 있을 실제적인 기간임을 성명하고 있습니다.


   상징적표현인가?

   성경의 말씀을 이와 같이 모두 상징적으로 해석한다면 성경은 커다란 혼란과 모순에 빠지게 되며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그 자체는 불신자들이 말하는 맹종에 빠지게 됩니다. 앞으로 우리가 더 자세히 배우게 되겠습니다만 천년왕국은 첫 째 부활에 참예한 자들만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축복의 삶인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성도의 휴거 후에 있는 일로서 이 때에는 부활한 성도들과 이 땅에서 적 그리스도의 환란을 통과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공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있을 백보좌 심판 후에는 온전한 믿음을 지킨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모두 부활의 영체가 되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게 됩니다(계21:2).

 

바울은 만약 우리가 이 땅에서 부활의 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축복이 없다면 세상 사람들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믿습니다. 또 끝까지 주의 말씀을 믿고 지킨 자들에게는 그의 약속대로 준비된 상을 받을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개념과 영생에 관한 지식은 오직 성경전체의 문맥을 따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이 꼭 알아야 할 부분에 대하여 무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조급함의 문제
   오늘 본문 속에서 베드로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에 참으로 빠른 헌신과 빠른 대답입니다. 베드로는 우리 한국 사람만큼이나 조급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나 봅니다. 그의 말은 전광화석과도 같습니다. 베드로는 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에서 말이 쏟아져 나옵니다. 우리 또한 이럴 때가 많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과 같지요.

 

제가 목사가 되기전 동경 호라이즌 채플의 히라노 목사님을 섬겼을 때의 일을 생각하면 어찌나 조급하였든지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무엇인가 하나를 깨달으면 나 혼자만이 아는 지식인것 처럼 촐랑대던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려 옵니다. 제 경험으로 보아서 조급한 대답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습니다. 일본 사람들에게서는 이런 것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인과의 사업을 하게 되면 조급한 한국사람이 늘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물론 어떻게 보면 급한 쪽이 선취권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취권 속에서 완전한 것을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나중에 완전한 것을 얻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인간의 속성
   그러나 이것이 변화받지 못한 인간의 속성입니다. 베드로는 헌신하는 모든 사람들의 모델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내가 너희 주인과 선생으로 본을 보였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에 대한 것에는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발을 씻기지 못하게 만류하는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때도 베드로는 즉각적인 응대를 하였습니다. "주여 내 발뿐이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이 말로서 우리는 베드로가 얼마나 적극적인 사람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성격 때문에 주께서는 베드로를 수제자로 삼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어디 그들의 발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겠습니까?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사람들로 깨닫게 하기 위한 언어의 기술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에 의미를 더하여 해석에 혼란을 야기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적은 견문과 좁은 지식 속에서 떠오른 착상에 영적인 의미를 첨부하는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영적인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무엇을 벗지 못했는가?
    언어의 전달 수단은 보편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말에 문닫고 들어오라는 말을 이해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그이것을 그대로 직역하면 문을 닫고는 들어 갈 수 없는 결론이 됩니다. 또 우리나라 사람이면 좋은 부부를 시샘하여 고추가루를 뿌린다는 익살을 오해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미국 사람에게 그대로 옮기면 어떤 반응을 갖게 될까요. 따라서 주께서 하신 말씀은 앞으로 그의 영 즉 하나님의 보혜사 성령에 의하여 주를 믿는 사람들에게 조명될 언어인 것입니다.

 

 먼저 "이미 목욕한 자"라는 주님의 말씀 속에서 예수를 믿는 자는 더러움에서 씻겨진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발을 씻겨주라는 말씀은 믿는 자라도 삶 속에서 다시 더러워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다시 "서로 발을 씻기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내가 너의 주와 선생으로 모본을 보였다고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사역의 근본이 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전도를 사역의 기본으로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전도는 그리스도의 명령인 것이지 사역의 기준이 아닙니다.

 

삶 속에서 더러워진 그리스도인의 몸과 마음을 씻어 주는 것 이것이 세상을 구원하는 복음사역의 근본인 것입니다. 또 이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더러워짐은 자신이 스스로 발견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라"는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식탁에 앉은 사람이라고 해도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롯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의식은 자신의 욕망에 사로 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목욕하지 않은 자를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면서도 성경의 모든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자신의 합리화 속에서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건부 믿음이지요, 이런 사람에게는 영생이 부여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 욕망을 쫓아 살다가 자기 갈 곳으로 갈 뿐이지요. 부디 임마누엘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