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2: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오늘은 요한복음 12장 세번째 시간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결단의 고통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민망하오니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애통의 간구는 듣는 우리의 마음을 민망하게 합니다, 우리도 삶 속에서 눈앞의 닥친 고통을 바라 볼 때가 있습니다. 그 고통의 농도에 따라 우리의 번민도 커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민망의 경지는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고통 앞에서 왜 이러한 번민을 하게 될까요? 그것은 미지에 닥칠 환난에 대한 예감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마음의 고통을 우리가 갖고 있는다 해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그 걱정은 무익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맡아서 해결할 믿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그 번민은 내가 취할 다음단계를 기다립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시련의 단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내의 단계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앞에 당면한 문제를 놓고 계속 민망한 상태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세상과의 괸계
우리는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이후 제자들을 사람들의 소용돌이에서 분리하여 가버나움으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주께서는 군중들을 돌려보낸 후 산에 올라가 기도하실 때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으로 고통받고 있는 제자들에게 바다를 걸어 오셔서 구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지시한 대로 행하여도 세상 가운데서는 환난이 있음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께서 지시하신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 친히 해결하셨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께서도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심한 고통과 번민을 느끼셨습니다. 어쩌면 죽음의 공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으니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이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많은 문제를 봉착하게 됩니다. 온전한 믿음의 생활을 하면서도 겪어야 할 많은 고통과 번민들, 그러나 이것을 맡길 분이 있다는 것은 인생 중에서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은 삶 속에서 만나는 문제를 잊기 위하여 술과 담배와 오락 등 심지어 마약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이 아니라 문제로부터의 도피인 것입니다.
지혜와 통찰력
우리는 믿음 생활 가운데 우리가 겪은 엄청난 문제를 겪은 후에 주께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음을 알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문제를 겪기 앞서 그 문제의 해결점을 알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통찰력이며 지혜의 은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통찰력은 우리가 믿음의 고난 속에서 온전한 인내를 이루어 자신의 주인을 온전히 신뢰하고 맡길 때에 깨닫게 됩니다.
여호수아 3장을 보면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걸머지고 요단강에 들어서는 장면이 나옵니다. 강물을 향하여 발을 내딛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온전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그들이 당할 고난에 대하여 너희가 공회 앞에 서 있을 때 너희가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너희가 할말을 친히 이르시리라 하셨습니다.
온전한 의뢰
이 말씀은 인간이 극한 고통의 문제를 당할 때 우리의 의식이 온전히 하나님께 맡겨져야 함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 방법은 우리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 앞에 있는 십자가의 고난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이 어떠함을 친히 알고 있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이 이룰 영광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영광은 고난 뒤편에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실족을 합니다. 그 고난의 중압감으로 하여 그 고난을 자신의 지혜로 해결하려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고 맙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멸망의 고통이 있을 뿐입니다.
기도의 위력
주님의 기도를 분석해보면 기도로 하여 자신의 태도를 바꾸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삶 가운데서 많은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아뢰옵니다. 물론 주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 모두 세신 바 되었다고 하셨고 우리가 원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필요를 요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미리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필요를 말하기 전까지는 주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자녀는 자신의 필요를 부모에게 말할 때 부모가 그것을 해줄 것을 믿고 부모는 자녀의 요구를 듣고 그 필요를 채워줍니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주 앞에 기도를 할 때 주의 성령이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어서 우리가 아뢰고 있는 기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통찰력을 주고 그 통찰력으로 하여 우리의 태도가 변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신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신뢰할 대상의 존재를 아는데서 비롯됩니다. 먼저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인간은 체험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체험해 보지 못한 대상을 신뢰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알라!
주를 알기 위하여는 먼저 나 자신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나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할 때 우리는 나를 창조자이며 나의 주관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 가운데서 겪는 모든 고난은 나의 무력한 존재를 발견하며 또 나를 부르신 능력자를 바라보는 길목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였으며 자신을 온전히 의뢰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또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이유에 대하여 내가 항상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 때문이라 말씀하셨으며 내가 온 것은 나의 뜻을 행하러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말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위치를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유다는 자기의 위치를 떠난 자를 타락한 찬사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일을 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모두 세상 가운데서 자신의 영광을 취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하였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주님은 내가 정령 너를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우리가 오늘의 고통을 참고 인내하는 이유는 앞으로 우리가 받을 상금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경기하는 자의 상급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자는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나 상급은 나중에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난의 길일 수 있습니다. 많은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있을 축복을 말씀하시면서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핍박은 오직 주의 날에 우리에게 있을 영원한 상급을 위하여 준비된 잠시동안의 터널입니다. 일시적인 고난인 것입니다. 일시적인 고난을 참지 못하여 영원한 복을 잃어버린다면 그는 정말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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