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 14장)너는 천국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1)

이요나 2000. 12. 6. 03:47
(요한복음 14장)너는 천국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1)


요한복음14:1-4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이제 우리는 요한복음 14장을 배우게 됩니다. 주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서서히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과 준비하고 있어야 할 일들에 대하여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이 세상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로서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한복음 전체 중에서 본 14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부분만큼은 크리스천으로서 꼭 알아두어야 할 아주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교회들이 이 부분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에 성도들이 성령에 대하여 무지하고 또 혼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척 스미스 목사는 만약 성경 속에서 꼭 암송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요한복음 14장이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저는 과거 우리나라에서 성령운동을 일으켰다는 오순절 계열인 순복음교회에서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관한 성경적인 지식 없이 지도자들의 말을 따라 이것이 성령이다 저것이 성령이다 하며 성령운동의 대열에 앞장섰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스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장로교 신학교를 다니면서도 성령론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만 그것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인지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주장한 자기들이 추종하는 신학자들의 학문에 근거를 두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한 사전에 불과하였습니다. 성경 여기저기를 발췌하여 성령론이라는 자신들의 주장에 두둘겨 맞춘 것입니다. 얼마 전 성령론의 한국의 대가(大家)라고 불리우던 C 목사가 어느 교단신문에 기고한 성령에 관한 그의 최종적 논증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그의 글 속에서는 지금까지 그가 주장하던 성령론의 모든 부분을 수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고희(古稀)를 넘긴 후에라도 자신의 잘못된 지식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싶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도 성경의 해석에 대하여는 섣불리 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마음속에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성령께서 그것을 알게 하기까지 조심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께서는 오늘부터 함께 살펴 볼 성령에 관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왜 마음에 근심이 생기는가?
    이 부분은 사도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들도 알지 못하는 지식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속한 비밀에 대하여 성경은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직 성령으로 하지 않고서는 그가 누구라 하더라도 하나님께 속한 비밀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는 접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고 연구하였다 할지라도 성령의 조명 없이는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 없으며, 성령은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자의(自意)로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여는 비밀 열쇠는 오직 성령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에 관한 잘못된 성경해석으로 신앙적 혼란을 많이 겪어 왔습니다. 중세에 있었던 마녀사냥도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결과이며 각 교회에 무성한 교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날이 갈수록 크리스마스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기정 사실화하며 대형 축제로 이끌고 가는 교회의 풍조도 성경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지 못한 처사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근심 속에 쌓인 제자들을 보게 됩니다. 왜 제자들은 근심에 쌓이게 되었을까요?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의 보호 속에서 아무 걱정 없이 지내왔습니다. 바리새인들로부터 정결의식에 관하여 공박을 당할 때에도, 세금문제로 시비를 당할 때에도, 풍랑으로 바다 가운데서 죽을 고생을 할 때에도, 가족이 질병으로 고통받을 때에도 그 때마다 모든 문제를 주께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메시야 개념

    그 당시 유대교 공동체 속에서 그리스도교가 탄생한다는 것은 마치 공산주의 속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아무거리낌 없이 천국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 출교 당한 이단 괴수의 무리라고 불리고 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군중들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서 자리 매김을 하여갔습니다. 12장에서 바리새인들은 우리의 하는 일이 소용 없도다 세상이 저를 좇는다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공모하였지만 그의 때가 오기까지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와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날이 가까워오자 자신이 바리새인과 장로들과 제사장에게 죽임을 당하여 사흘만에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공공연히 하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듣는 제자들의 마음은 편치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지금까지 자신들과 이스라엘 속에서 행하셨던 이적들로 이 땅에서 천년 왕국을 세우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 뿐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도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그들 조상들의 삶 속에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전달된 하나님의 언약이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땅에서 왕국을 이룩하시기도 전에 장로들과 제사장들에게 팔리어 죽음을 당한다는 말씀은 이해할 수도 없었을 뿐 더러 또 그렇게 된다고 할 때 지금까지 모든 것을 버리고 믿고 따랐던 믿음의 실체와 소망은 허망해질 수밖에 없으며 이제 자신들의 생명조차 부지할 수 없는 신세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인생의 목적이며 삶의 보호자였던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 자신들의 전도가 어떻게 될 것인지 참으로 기가막힐 뿐입니니다. 이제 그들은 죽은목숨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 의하여 이단괴수라 칭하는 그들의 지도자 예수께서 죽으면 자기들도 마찬가지로 죽임을 당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롯 유다는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예수를 넘겨주기로 작정을 하였던 것입니다.


   앞 날을 알 수 없을 때

    앞장에서 베드로는 "주여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하였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가시는 곳에 너희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다고 하셨기 때문에 불안에서 나온 말입니다. 마음이 불안하다는 것은 불확실할 때 오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일을 앞두고 그 일에 대한 결과가 불확실하면 안절부절해집니다. 이것이 인간의 보편적 심리입니다. 여러분들도 학교에서나 또 직장에 들어가기 위하여 시험을 치른 후 그 결과에 대한 불안을 느껴보셨을 것입니다.

 

임산부들이 수술실로 들어 갈 때에도 이런 마음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난 것에 대하여 근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일의 일에 대하여 불안해 합니다. 한치 앞의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앞의 일을 안다면 우리는 걱정하지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일어날 일에 대하여 최선의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마음의 근심은 다가 올 일에 대한 방비책이 없을 때 생기게 됩니다. 지금 제자들은 두 가지 입장이 동시에 다가왔을 것입니다. 예수의 죽으심 이후의 알 수 없는 자신들의 일, 그리고 안다 하더라도 방비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내일 일은 오늘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에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근심이 쌓이면 그것은 바로 우리 얼굴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유월절 만찬을 끝낸 제자들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예비 지식이 없었던 제자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지식의 패러다임

    이 때 예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동일시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절대 유일신입니다. 그 이상의 신도 그 이하의 신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생명이요 삶의 목적, 그 모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실제로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보고 살자가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심판과 관련된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는 믿음의 대상이기는 하여도 실제 삶 속에 얼굴을 맞대고 교제를 할 수는 없는 존재이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과 함께 하고 계신 예수님은 사실상 실존하신 하나님으로서 사람들 속에서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우리의 삶 속에 함께 할 때 그가 하나님이라고 느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그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패러다임 시키는 동시에 또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에 대한 개념을 재인식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모두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란 실체는 어딘가 모르게 두려운 존재로만 여겨집니다. 가까이 갈 수 없는 분, 심판 의 주, 초월자이며 권능의 존재로서 우주만물의 창조자이시며 다스리시는 분, 내 생명의 주관자 등등..

 

그러나 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어떠한 의미이든지 두려운 존재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참으로 평안의 대상입니다. 똑같은 하나님이라 할진데 하나님과 예수의 이름은 우리에게 엄청난 다른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가까이 할 수 없는 이름이라면 예수는 친절하고 온유하며 친구나 형제와 같은 그런 믿음의 대상으로 느껴집니다. 그 이유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고통을 친히 체휼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우리의 마음이 평안해지고 깨끗해지고 온유해집니다. 그 이름에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하셨습니다.


   언약의 보장
    또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는 말씀 속에는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살아 온 민족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보장을 신뢰하지 못하였다면 이 민족은 벌써 세상 가운데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 민족적 고난 속에서도 이들이 생명을 이어 온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아직 모르는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과정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수천 년 살아 왔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 그 종말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즉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그가 와서 이 땅에서의 천년 왕국을 건설하고 세상을 심판하며 이스라엘을 신원하여 주실 것을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도래(到來)되며 어떠한 것인지에 대하여는 더 이상의 지식을 접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야의 오심과 함께 전달될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반적인 여러 가지 지식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많은 지식을 터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 속에서 확장되어 나갈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이었지 그들이 수천 년 동안 고대하던 천년왕국의 개념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예수와 함께 완성될 천년 왕국의 도래에 앞서 그들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실존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후일 그들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할 마지막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복음의 실체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과정은 끊임없이 변천되어 왔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 앞에 실제로 펼쳐질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주의 가르치신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4장은 앞으로 여러 번에 걸쳐서 강의 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