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8장-2)Coming Out! 과연 자유인가?

이요나 2000. 10. 16. 14:02

(요한복음8장-2)Coming Out! 과연 자유인가?


 

요한복음7: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는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진리에 대한 언급을 하심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문제가 된 것은 진리로 말미암는 자유에 대한 논리였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논리를 제시한 예수님을 향하여 유대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남의 종이 된 일이 없었거든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고 반문하므로서 노예의 상태에 대한 논리적 반론인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정부에 세금을 갈취 당하고 있었고 유대에는 로마군대가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언제든지 유대인들을 불러서 자신이 지고 가던 짐을 1마일 정도 지고 가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로마의 노예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고 그 종교적 율법 안에서 나름대로의 주권행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노예가 된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이 죄의 노예상태라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그 어떤 것으로부터 속임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언제고 그러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고 안 짓고는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삼백 육십 오 일 언제고 자신은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죄에 중독되어 있는데도 자신은 자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범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 자신은 자신이 죄의 노예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자유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생각은 감옥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은 자유자라는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이 생각하는 자유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습니다. 이들은 태연하게 낙태를 위한 합법적 법률 제정들을 외치고 나서기도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범죄를 합법화하기 위하여 그것을 법으로 제정하므로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법적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합니다.



   죄인줄 모르는 이유!

    최근 동성연애자인 코메디언 한 사람이 Coming Out을 하여 커다란 물의를 일으킨바 있습니다. 컴잉 아우트하면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칼럼을 쓰는 이요나가 선구자이신 것을 아실 테지요. 제가 과거 죄에서 해방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을 때 저는 그러한 죄악들이 죄인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집단적 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의 권익을 위하여 당당한 소리를 외치곤 하였습니다. 저는 지금 그들의 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도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문제는 죄에 중독된 사람들은 자신이 죄의 노예라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렇게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동성애에 잡혀 있는 사람들은 다른 행위의 죄와는 달리 구분하여야 합니다. 즉 도둑질이나 일반적인 범죄의 행위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들의 삶을 정당화시키려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며 정당화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만약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화되려면 세상의 모든 질서를 뒤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남녀의 구분은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으로 이 질서는 밤을 낮으로 돌려놓는 것과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물을 높은 곳으로 흐르게 하려는 것과도 같습니다. 성적 충동을 말하자면 이성 없는 짐승들이 더 강할 것입니다. 짐승들은 아무 부끄러움 없이 자신의 성적인 충동을 그대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통하여 짐승들이 동성연애를 하였다는 소리는 역사상 한번도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짐승도 동성애를 하는가?

    어느 동물학자가 이 문제를 연구하기 위하여 암수를 따로 분류한 원숭이들에게 발정 촉진제를 놓았더니 발정한 수놈들이 한 우리에 있는 수놈들을 모두 때려 죽였다고 합니다. 또 이러한 현상은 암놈의 우리에서도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인간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원숭이들에게도 동성애는 없다는 것이 증명된 셈입니다. 따라서 동성애는 인간에게만 발생된 범죄로서 로마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또 그는 "이들이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지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어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18절 이하 참조) 이로 보아 동성애는 인간에게만 내려진 형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였다고 하였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부분이 있는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동성애자들이 동성애자로 태어난 데에 대하여는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조사하고 체험한 바로는 그러한 성향은 매우 어린 나이에서부터 시작된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태어남으로부터 그러한 성향을 가진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서 동성애자로 처음부터 지으셨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물론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태로 남으로부터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동성애로 지으신 것이 아닌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죄의 속성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영육 간에 남성성, 여성성으로 창조하셨고 서로 한 몸을 이루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성애는 그가 모태로부터 태어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죄의 속성 속에서 점점 발전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질서한 부모의 생활 속에서 발전될 수도 있고 양육과정의 환경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즉 이것은 왼손잡이는 처음부터 왼손잡이로 태어난 것이 아닌 것과 같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그를 지배하고 있던 더러운 영이 그를 지배함으로 중독된 것이라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저는 15살에 담배를 배웠고 이 담배를 끊는데는 25년이 걸렸습니다. 이 담배를 끊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고통을 감수했어야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피우는 담배는 직접적으로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한 예로 술주정뱅이 밑에서 자란 아이들들은 커서 그들도 술주정뱅이가 되며 욕설과 폭언을 일삼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다시 폭행을 한다는 확률이 90%이상이라는 것이 통계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이들의 모델이며 삶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지가 무질서한 삶을 살며 그 영향은 곧바로 아이들에게 입력되고 그것은 더욱 발전되어 고질병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막상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에 중독 된 노예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자유자라고 생각하며 그러한 일들을 하고 안하고의 주권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죄의 노예인 것입니다.

   난 자유해?!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을 가리켜 그들이 죄의 노예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이 모두 죄라는 형벌을 쓰고 태어난 것임을 선포하신 것으로 이것의 정의는 아담으로부터 거슬러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으로 그러한 죄의 인간들과는 다른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자신들은 의인이고 택함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만이 죄의 노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 났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담의 사건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모든 인간의 형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각 인간이 짓는 죄의 모양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이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로부터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하시며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을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모두 인간의 타락의 순간으로부터 이어진 죄의 속성을 말씀하신 것으로 모든 인간은 죄의 자식들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씀하신 자유는 영혼의 자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참 자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직 주의 말씀이 그들 가슴 가운데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의인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서에서 귀신과 질병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와 치료함을 받고 그 영혼이 자유함을 받았음을 보아왔습니다. 문둥병자가 그랬고 혈루병 여인, 중풍병자, 군대 귀신들린 자 그리고 수많은 장님과 귀머거리들이 모두 주님을 만나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너희가 차라리 장님이었으면 보았을 것이라"고 하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말씀입니다만 지금도 많은 눈 뜬 장님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고고한 믿음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무늬만 크리스챤인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의 믿음으로 자신들의 영혼이 보장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눈뜬장님으로서 유대인들처럼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노예 된 일이 없거든 어찌 우리를 자유케 한다 하느냐고 벽창호 같은 소릴 하는 사람들입니다.

   충동하고 싶다!
    호머의 고전 오뎃세이 중 울리세스 이야기는 아마 아실 줄 압니다. 울리세스는 자신의 총명과 지혜와 그리고 대담한 용기로 인하여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승승장구하여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닻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신(神)의 시험으로 말미암아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여행은 10년이 걸렸습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기기묘묘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비는 사이린 섬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섬을 지키는 바다의 요정의 노래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곳을 지나는 배의 수부들을 모두 매혹시켜 그들이 그녀의 노래 소리에 빠져버린 동안 배가 섬에 부딪쳐서 난파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그 아무도 사이린의 노래 소리를 듣고 살아 남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울리세스는 담대한 사람이라서 그에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욕망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는 사이린 노래 소리를 들은 최초의 영웅이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래서 그는 배 안에 있는 모든 수병들의 귀를 초를 녹여 막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닻 줄의 기둥에 단단히 붙들어 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조난(遭難)의 섬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디선가 바람을 타고 음악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습니다. 울리세스는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음악이 귀에 닫자 울리세스는 견딜 수 없는 충동을 받아 밧줄을 끊고 자유롭게 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풀어 달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수병들의 귀를 모두 봉해 놓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외침을 듣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배가 그 섬을 통과한 후에서야 울리세스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사이린의 음악을 듣고 살아난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수한 찬송가?!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하여 이와 같은 경험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면 자신의 인생이 파멸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쾌락을 체험하고 통과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요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닌 것입니다. 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지요 올루베우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참으로 신비에 가까운 수금을 타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아름다운 노래를 연주함으로 듣는 이들을 매료 시켰습니다. 한 번은 그가 배를 타고 사이린 섬을 지나야 했습니다. 그 섬이 가까워 오자 바람을 타고 음악소리가 들려 오기 사직했습니다. 수병들이 모두 그 음악 소리에 홀리기 직전이었습니다. 그 때 올리베우스가 수금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음악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수병들은 그 소리를 따라 항로를 바로 잡고 무사히 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참으로 기기묘묘한 노래들이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습니다. 가끔 찻집에 앉아 있노라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줌을 쌀 정도로 아름다운 가수의 목소리가 우리를 매료시키고 있습니다. 그 노래를 처음 들어 보는 것인데도 내 입술은 쉽게 따라 부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를 따라가면 결국 우리의 이성은 마비되어 결국 우리의 삶은 난파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영혼을 매료하는 프레이즈가 있습니다.

 

이 노래들은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고 우리의 이성을 바로잡아 우리를 하늘나라까지 이끌고 갈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찬양이 새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노래는 끝도 없이 기기묘묘한 리듬과 음색으로 우리 아이들의 심장을 파고들어 오는데 우린 언제까지 200년 전의 곡조로 넋두리를 할 것인지 과연 그 소리로 사이린의 음악에 홀린 심령을 돌이킬 수 있을 것인지... 공곰히 생각해 보자구요! 이제 진정한 자유자가 되십시오. 진리의 말씀을 듣는 당신은 이미 자유자이십니다. 금주도 임마누엘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