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7장-3) 아이구 목말라 죽겠다!!

이요나 2000. 10. 5. 11:20
(요한복음7장-3) 아이구 목말라 죽겠다!!

요한복음7:37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오늘은 요한복음 7장을 주해할까합니다. 주제 본문 말씀 7장 37절을 주목하여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여기서 요한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명절 마지막 큰날이란 2절에 기록한바와 같이 초막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축제는 8일간 계속되는 종교행사로서 유월절과 오순절과 함께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필히 참석을 하여야 하는 3대 명절 중 하나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행사시 그들의 조상들이 과거 애굽에서 흘린 눈물과 고통을 기억하기 위하여 염수(소금물), 신포도 과자 등을 준비하여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의 고통을 음미했던 것처럼 초막절이면 그들의 조상들이 40년 간 광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지켜주신 은혜를 기억하기 위하여 8일동안 집에서 나와 종려나무 잎들을 가져다가 밤하늘의 별들이 훤히 다 보이는 움막을 짓고 지내며 자녀들에게 과거 40년 동안 자기 조상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하여 마실 물과 먹을 것을 주시며 지켜주신 일들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렸습니다.

 

 또 초막절 행사기간 동안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제사장들이 커다란 금주전자를 어깨에 메고 실로암 연못으로 내려가서 물을 담아서 계단을 통하여 성전까지 올라 왔습니다. 이 때 백성들은 일제히 할렐루야 시편을 부르며 따라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성전 앞에 다다르면 제사장들은 금주전자의 물을 마당에 쏟아 부음으로 자기 선조들이 광야에서 목말라 헤메일 때 하나님께서 바위에서 물을 내어 그들의 목마름을 해소하셨음을 기억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삶 속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을 가르치는 아주 자연스런 교육법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자기들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쳤습니다.



   초막절이란?

    초막절 8일째에는 주의 거룩한 안식일임으로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제사장들도 실로암 못에 내려가지 않았고 8일째 되는 날은 성전 앞에 물을 쏟아 붓는 행사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의 땅에 들어 왔음으로 더 이상 목말라 할 필요가 없다는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막절 8일째는 행사의 가장 큰 날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8일째 되는 날은 일주일 동안 매일 제사장들이 물을 길어 오던 계단을 따라 가며 할렐루야를 외치던 장엄한 행렬은 물론 그 최고의 절정의 시간에 성전 뜰에 쏟아 붓던 행사도 없었습니다.

 

그날은 이미 안식에 들어와 있다는 영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무엇인가 허전한 듯하고 무엇인가 기다려지는 듯한 육체의 갈증이 연상되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그 때 주께서 일어서서 큰소리로 외치신 것입니다. 울고 싶을 때 때려준 것 같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일주일동안 장엄한 행렬 속에 그들의 머리 속에 포맷되어 있는 아직 풀리지 않은 갈증의 기억이 순간적으로 되살아나기 쉬운 그러한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아마 안식일의 고요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실제적으로는 목에서 갈증이 솟구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갈증을 느끼고 있을 때 주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인간의 구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적인 부분과 혼적인 부분과 육체적인 부분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삼위일치와 같아서 어느 부분이라도 채워주지 않으면 문제가 전체에게 문제가 파급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만약에 우리가 목이 마르다고 합시다. 그때 그 목마름을 위하여 시원한 샘물이 흐르는 비디오를 보여준다든가 물소리를 들려준다고 하여 그 근본적인 목마름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내 혼적인 부분에 필요한 많은 지식들이 빵으로 채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할 수 있는 영적인 틀도 어떤 다른 지식이나 먹을 것으로 충족시킬 수는 절대 없는 것이지요. 아무리 그 날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안식의 땅으로 인도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갈증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가르침은 가르침일 뿐이지 그들의 실제적 육체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수천 년 동안 이러한 종교행사를 해왔으나 그들의 갈증은 풀리지 않았고 오늘도 마친가지로 갈급함을 느끼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이처럼 영과 혼과 육의 세 부분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부분을 채우심으로 하여 모든 것이 충족되는 통로를 만들어 두셨는데 바로 그것이 영적인 곳으로 그 통로에 해당하는 것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이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세상에는 어떠한 것으로도 인간의 근본적 요소를 충족시킬 것이 없습니다. 어떠한 음식과 음료라도 그리고 어떤 만족스런 이야기와 철학 그리고 학문으로도 사람의 모든 요소를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또 어떤 종교적 행위와 이념으로도 영적인 부분을 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의 거룩한 영과 그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을 충족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땅의 모든 종교가 이를 위하여 발생한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으로 풀려고하느냐?

    많은 사람들이 육체의 만족을 얻고자 술과 마약과 SEX로 자신을 충동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에 빠지기도 하고 학문과 철학에 빠져들기도 하며 게임과 오락 등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허기진 눈으로 좀더 새로운 것을 찾아 헤메이게 됩니다. 이는 우리의 육체의 욕망은 마치 채울 수 없는 열린 무덤과 같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통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70%가 수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신체 안에 수분이 부족하면 우리의 뇌에 있는 수분 감지기가 수분을 요구하게 되고 우리의 뇌는 우리의 육체에 명령을 내려 우리의 입과 눈과 귀를 통하여 물을 찾게 됩니다. 또 인간에게는 감성의 부분이 있습니다.

 

이 감성의 부분은 먹을 것으로 채우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로 고통을 당할 때 이것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 절대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감성적인 갈급함을 해결하기 위하여 육체적인 쾌락으로 그 갈급을 해결하려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와 같이 영적인 부분도 그 본연의 혼적인 부분을 채우기 위하여 갈급하게 되는 데 이것으로 하여 고대로부터 인간이 있는 곳에는 종교적 행위가 발생된 것이고 종교적 행위의 매개인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 하나님을 찾아가게 하는 길잡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모든 증상은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자의 지혜와 지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신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