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예언서 강해

(렘5:31)내 백성이 그것을 좋게 여기니..

이요나 2002. 11. 26. 18:03
(렘5:31)내 백성이 그것을 좋게 여기니..


오늘 예레미야 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변론을 하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가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더불어 변론을 한다니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성경에서 종종 발견된다. 또한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도전이 있을 때 나타났었다.



창세기 18장에는 여호와께서 천사 둘을 대동하고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17) 말씀 하신 후 패역한 도시 소돔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하실 것을 미리 말씀하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땅을 심판하실 때에 주권자라고 하여 우리의 의견과 관계 없이 자신의 임으로 무엇을 판단하신다면 우리가 그의 자녀된 의미가 없다고 하겠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그의 이름을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시기로 한 이유도 공의로 심판하심을 알리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5:27)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을 말씀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창18:23)하고 부당함을 제기하였다. 아브라함은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라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요구하여 "주께서 이 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 하오며 의인과 악인이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18:25)라고 말하였다. 이에 하나님은 내가 이 성에서 의인 십인을 찾으면 그 십 인을 위하여 멸하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소돔성은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또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택하심에 대하여 "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권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긋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9:22-23)말하여 하나님의 판단하심이 공의로우심을 피력하였다.



오늘 5장 1절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말씀하시며 "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고 말하셨다. 이에 에레미야는 여호와의 길과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는 비천하고 우준하기 때문이니 내가 하나님의 법과 여호와의 길을 안다고 하는 귀인들에게 가서 말하였으나 그들이 모두 그것을 멍에로 알고 결박을 끊었다고 증언하였다.



주께서는 그들을 사할 수 없는 이유를 열거하셨다, 먼저 그들의 배신이었다. "내가 어찌 너를 사하겠느냐 네 자녀가 나를 버리고 신이 아닌 것으로 맹세하였으며 내가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행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이 모이며 수말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라 부르짖는도다"하셨다.



두번째로 그들의 죄악은 여호와를 인정치 않는 것이었다, 여호와란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이름이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과 특별한 언약의 관계를 맺고 계시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닌 즉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라"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참으로 중대한 일이다. 조상으로부터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갖고 있는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를 부인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지 않고 청종치 아니하는 선지자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예레미야는 "선지자들은 바람이라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지 아니한즉 그같이 그들이 당하리라"(13절) 기록하였다.



세번째로 그들의 잘못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였다(22절).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것은 경외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잠언서 기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천지만물을 운행하시며 자연의 섭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지도 두려워 하지도 않고 있었다. 예레미야는 그들의 허물에 대하여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할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경외 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24절)라고 기록하였다.



네째로 그들의 부패함은 부요함에서 비롯되었다. 게시록 4장에도 라오디게아 교회의 물질적 부요함을 책망하고 잇다. 예레미야는 너희가 거부가 되어 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고아의 송사를 공정히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송사를 공평히 판결치 아니하니"(28절)라고 지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그 권세를 이용하여 그들이 돌보아야 할 우준한 백성들의 등을치고 도적질 한 것이였다. 예수께서도 성전에서 물건을 팔고 환전을 하는 자들을 가리켜 너희가 하나님의 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 책망하셨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하신 땅에서 이러한 기이한 일이 일어난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달하여야 할 지도자들에게 있었다. 예레미야는 "선자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31절)고 경고하였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실정은 어떠한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있는가? 얼마전 어느 교파의 목사님이 우리 모임에 참가하였다, 나는 그 분이 나름대로 최고의 학벌을 지닌 목사로서 그 모 교회로부터 총망받는 선교사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일말의 양심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성경 한 구절을 읽은 후 시종일관 믿습니까로 일관하며 성도들로부터 아멘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날처럼 목사라는 직함이 부끄러운 것을 느낀 일은 없었다. 또한 내가 갈보리채플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새삼 감사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안타까워 한 것은 그의 설교(?) 를 들으며 맹목적으로 아멘을 외치는 사람들이었다. 하긴 설교 중 연방 큰 소리로 아멘을 강요하기 때문에 화답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나는 한 시간 동안 왜 아멘을 하여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가슴을 칠 수 밖에 없었다. 어디 이것이 그 분 하나에 국한 된 것이겠는가?



바울은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이라"(엡4:11,12) 말하며 계속하여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4:14절)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