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예언서 강해

(렘6:10)할례 받지 못한 귀에 나팔소리가 왠 말?!

이요나 2002. 11. 28. 10:30
(렘6:10)할례 받지 못한 귀에 나팔소리가 왠 말?!



지난주 5장에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이스라엘이 잘못된 원인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예레미야는 그 책임이 선지자들과 제사장들과 귀인들에게 있다고 지적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나라 관료들의 부패함을 목도하고 있다. 부끄럽께도 우리는 노벨상을 수상한 대통령을 두고도 그 영광을 자랑할 수 없는 민족이 되고 말았다. 역대 대통령 중 백성들의 존경과 박수를 받으며 물러나 우리 가운데 살아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프기에 앞서 기이한 일이다. 더우기 담배 자판기보다 많은 교회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우리로서는 더욱 할 말을 잃고 만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술을 통하여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10절)라고 한탄을 하고 계시다. 참으로 기가 막힌 말씀이다. 하나님은 자기와 말씀을 할 대상을 찾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있으니 그를 책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신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화나는 일이다. 여러분들도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본 일이 있는가? 참으로 답답하고 억장이 무너질 것이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4장에서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하셨다. 또 계시록에는 7교회 사자들에게 귀가 있거든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에 귀 없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태어남으로부터 두 귀를 갖고 태어났다, 그리고 자라나면서 많은 것을 듣고 배우므로 지식들을 터득하였다. 우리가 무엇을 알아 듣는다는 것은 그 말하는 것을 납득하고 이해한 것으로 엄격히 말하여 그동안 자신이 알고 터득한 지식의 발전인 것이다.



나는 때때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내가 알고 있는 성경적인 지식에 대하여 공격을 당하기도 한다. 그들이 주로 공격하는 주제는 구원론과 귀신론 그리고 성령에 관한 지식과 대환난에 대한 것이 중심이 된다. 사실 이것은 교회사 속에서 서로 다른 해석적 이유로 분열을 일으켰던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문명과 문화와 과학의 발달과 함께 최고의 학문과 지식의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철학적 사상들의 시시비비가 밝혀졌고 교회사 속에서 움추리고 있던 마귀사냥 사건들도 모두 교권주의자들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임이 들어났다.


시대는 벌써 요한 계시록의 사대에 돌입되어 있고 우리는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문 앞에 놓여 있는데 아직도 교회는 회개의 사단계가 어떻고 거듭남을 의심하고 믿는 자에게 귀신이 들어 올 수 있는가 질문하여 가계에 저주를 끊어라라는 어히없는 무지한 말들이 교회에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것은 모두 성경의 무지에서 나온 소치이며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성경의 말씀을 올바로 듣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레메야에게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읋 행함이라"(13절)고 말하셨다.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비롯된다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한 성경의 말씀을 들음으로 비롯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교회들이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르친다는 것은 그 가르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 속에서 소명을 받고 온전한 지식을 깨우쳐 자신이 가르치는 바를 알고 있느냐에 있다. 그런데 우리 교회들은 목사의 기준을 어느 신학대학교를 나왔느냐에 기준을 두고 있다. 우리는 주께서 12사도를 부르실 때 그당시 문벌 있는 제사장이나 서기관의 가문을 택하지 않으시고 세상 가운데서 자기와 함께 한 사람들을 부르셨다. 바리새인들은 베르로를 보고 저는 학문을 모르는 범인이였다고 증거하였다.



오늘 예레미야 6장 1절에는 이제 곧 이스라엘에 불어 올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아름답고 묘한 딸 시온을 내가 멸절하리니"라고 선포하였으며 이제 곧 북방의 이방 전사들이 하나님의 부르신 목자가 되어 칼과 창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칠 것을 선포하였다. 주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을 향하여 흉벽을 쌓으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전쟁에 대비하여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성벽을 쌓으라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마음이 너를 싫어하고 너로 황무케 하여 거민이 없는 땅을 만들리라"(8절)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성벽을 쌓으라는 말씀은 이제 곧 다가 올 하나님의 진노에 대비하여 하나님의 훈계를 들으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종교활동에 연연하고 있었다. 예레미야는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6:14) 하고 종교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 하였느냐"고 책망하였다. 여기서 예레메야는 앞으로 다가 올 재난을 대비하여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삶의 평안만을 급급하고 있는 백성들의 상태와 그것을 빙자로 종교활동에 빠져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도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말하는 사람들이 있겠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지도자들을 조상으로부터 친히 세우셨으니 말이다.



이것은 아담의 변명과도 매우 흡사하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치 않고 선악과를 먹은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주셔서 함께한 여자가 내게 주어서 먹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은 왜 내게 이런 여자와 함께 살게하여 이 고생을 하게 하였느냐는 말과도 같다. 바울은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대로 하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 하시냐"(롬3:5) 말하였다.



하나님은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숫군을 세웠으니 나팔 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17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지적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알리기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세우셨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과거 아합왕 때에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엘리야에게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칠천인을 남겨 두었다고 하신 말씀과도 같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언제고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파숫군을 세워 두셨다, 그러나 그 나팔 소리를 듣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바울은 우리 앞에 있을 재난의 날을 말하여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ㅏ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 소리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 15:51)고 말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나팔소리는 무었일까? 혹시 당신은 군대에서의 기상나팔을 기억하는가? 한국사람이면 한달에 한번씩 하는 민방위 훈련 나팔 소리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에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고대하는 당신은 이 나팔 소리를 듣고 있는가? 지금 당신은 바울의 나팔 소리를 듣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인내는 곧 끝날 시간에 이르렸다, 하나님은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렘6:19)고 경고하셨다. 이제 이들에게는 멸망의 날이 눈 앞에 바싹 다가와 있다. 그들의 모습에 대하여 "그들은 활과 창을 잡앗고 진인하여 자비가 없으며 그 목소리는 바다가 흉용함 같은 자라 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같이 다 항오를 벌이고 딸 시온 너를 치려 하시느니라"(23절)고 기록하였으며 목전에서 이를 당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가리켜 "우리가 그 소문을 들었음으로 손이 약하여졌고 고통이 우리를 잡았음으로 아품이 해산하는 여인 같도다"(24절) 기록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주의 음성을 듣고 깨달아 통곡하는 예레미야에게 "내가 이미 너로 내 백성 중에 살피는 자와 요새를 삼아 그들의 길을 알고 살피게 하였노라"하셨다,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직도 하루의 평안함을 찾아 종교활동에 빠진 사역자들을 찾아 나설 것인가? 아니면 장차 우리 앞에 닥칠 재난을 위하여 예비한 하나님의 나팔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어차피 당신이 선택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