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예언서 강해

(겔2:4)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팍한 자

이요나 2003. 3. 17. 09:19
(겔2:4)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팍한 자


(겔2:4)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팍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다 하라



오늘은 에스겔 2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이 부분은 에스겔의 소명과 관계된 부분으로 부르받은 자들과 지대한 관계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1장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먼저 하늘을 열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역사를 보이셨습니다. 또한 그로하여 장차오실 그리스도의 영광된 모습을 보게 하신 후 이제 본격적인 소명의 작업에 들어 가셨습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전장의 기록을 볼때 에스겔은 아마 혼비백산하여 땅에 엎드려 있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에스겔은 그의 신에 의하여 일어섰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보고 살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다니엘이 그러했고 사도바울과 요한이 그러했었습니다.



"인자야"라는 호칭은 참으로 친근감이 있어 보입니다. 이 호칭은 후일 주님의 시대에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칭하신 단어였습니다. 에스겔을 부르신 주님은 먼저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에게 말씀을 하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일어서 있어야 한다는 원리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의 사람들과 말씀하실 때 늘 그들을 일으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그의 부르신 자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높으신 사람들과 만날때 엎드린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각부 장관들이 넙적 엎드려 현대인 같지 않은 말들을 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이 나라는 군주국가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 보아야 할 것은 에스겔을 일으키신 것은 그에게 말씀을 하기 위하여라는 것입니다. 지금 에스겔은 영광된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의 말씀과의 관계에서 갖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그를 부르신 소명에 대하여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하셨습니다. 사실 그동안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얼마나 많은 예언자들을 보냈었습니까? 그런데 이제 그 나라가 망하고 이미 그의 백성들이 바벨론에 잡혀 온 그 지경에 또 에스겔을 보내신다니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같은 자식이 패역하여 그가 심판을 받아 망한 길에 섰다고 하여 그 자식을 포기하겠습니까? 우리가 인간이라도 그렇거든 하물며 " 너는 나의 백성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 친히 말씀하시고 택하시고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이겠습니까?



여기서 "패역"이란 "반역하다" "배신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인류는 세움을 받던 날부터 반역과 배반의 역사였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배반의 역사를 경험을 해 본일이 있으신가요? 혹시 혈육처럼 여기던 사랑하는 자들로부터배반의 아품을 겪으신일이 있는지요. 우리는 가룟 유다를 통하여 예수님이 겪으신 배신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를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못박히심 보다 더 아픈 고통이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은 행여라도 당신은 당신 앞에세우신 자를 절대로 배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시 그가 잘못을 하였다 하드라도 그의 잘못은 주께서 다스리실 것입니다. 성경은 남의 종을 책망하는 너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팍한 자니라"하셨습니다. "얼굴이 뻔뻔하다"는 말은 인격의 이중성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할 때 사실 크리스챤처럼 뻔뻔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많은 죄를 짓고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큰소리치는 당당한 모습이라니... 내 삶의 역사를 보아도 정말 뻔뻔하기 이를때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얼굴이 뻔뻔하다는 말은 죄의 뉘우침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대개 권세를 갖었을 때 그 뻔뻔함이 더해질 수 있습니다. 개구리 올챙이쩍 생각을 못하는 것이지요



또 우리는 강팍함에 대하여는 좀더 깊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팍케 말라"(히4:7)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그의 음성이라는 그 주체가 누구인가 생각하여야 합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한 것이 예례미야요 에스겔이라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했을 뿐입니다. 비록 오늘이라는 이 시점에 당신을 책망하는 그 목소리가 있을진데 그 목소리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음성이라고 생각해 보신 일은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속히 그의 음성 앞에 복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마음의 강팍함이란 자신의 마음과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항명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강팍하다는 말은 완악하다는 말과 동의어로서 완고함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마가복음 16장에서 자기의 부활하심을 보고 전하는 자들의 말을 믿지 않은 제자들을 가리켜 "마음이 완악한 자"들이라 하셨습니다. 또 이 말은 사무엘상 16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왕의 완악함을 책망하여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말하였고 그 원인에 대하여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으로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6:23) 말하였습니다.



또 이 말씀을 좀더 확대하면 누가복음 8장에서도 발견됩니다. 씨뿌리는 비유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눅8:13)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혹시 바위와 같이 굳어진 마음을 만나보셨습니까? 이러한 마음은 정말 감당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나와 관계없는 자라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나와 혈육적의 관계와 같다고 할 때는 정말 미칠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러한 경험을 여러번 했습니다. 갈보리채플 개척이래 늘 겪어온 일들입니다. 더우기 가슴 아픈일은 그들은 모두 말씀을 사모하고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사모 하여 기뻐 받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뿌리도 내리기 전에 교만하여져서 자기가 따라야 할 자에게 항명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러한 폭풍이 몰아치면 저는 며칠 밤을 자지 못하고 울었습니다.



그 아품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강팍한 아음을 더 참아 주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여 보지만 그 당시 내가 그들의 마음을 도저히 갇당할 수 없었던 것은 정말 미스테리 중에 하나입니다. 나를 단련시키려는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큰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억제하고 온전한 인내를 이룬 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습니다.



더 흥미로운 말씀은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지니라"(5절)라는 기록입니다. 그들이 그의 음성을 듣든지 아니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있음을 안다는 말은 결국 그들 자신도 자신들에게 말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들의 패역은 알먼서도 배반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은 모르고 한 자는 덜 맞을 것이요 알고도 범한 자는 많이 맞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이들이 마음이 강팍해진 것은 말씀에 순복하지 못하는 육신의 욕망이 차 올랐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네 몸을 쳐서 복종시키라고 명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처한 환경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고 그 말을 두려워 말지어다"고하였습니다. 마음이 강팍하여 대적하는 자들과 함께 거한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전갈 속에 함께 사는 것과도 같습니다.



만약 당신의 자녀들이 마음이 강팍하여 대적할 때 그렇다고 그 자녀들을 내어 쫓겠습니까? 또 그렇다고 그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인 줄을 알면서도 책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정말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온전한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테스트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음성을 듣거든 마음을 강팍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긴 모른체하고 그들이 하고 싶은대로 내어버려 둔다면 속은 후련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책임과 의무를 포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교회들의 모순 중 하나가 성도의 잘못을 보고도 묵인하는 것입니다. 못 본체 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용서하라 인내하라 사랑하라는 말로 자신을 합리화 하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직무유기에 해당됩니다. 후일 주님은 그들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않은 책임을 분명히 물으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을 보면 부름 받은 모든 사역자들이 각각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한 공력의 불 시험을 받을 것인데 그들의 공력이 남으면 상을 받고 불에 타면 해를 받으리라 기록되었습니다.



주님은 "너는 내 말로 고하라"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보낸 종의 책임을 덜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목회자들의 본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말로 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패역한 백성이라도 듣든지 아니듣든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하면 우리의 책임은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할 때 그 말씀은 결국 나의 입으로 고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언자의 경우는 그 당시 당시 말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 말씀의 의도와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바로바로 발견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식과 융통성의 한계가 있는 인간으로 창조자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지금 모두 컴퓨터 앞에서 인터넷을 통하여 이 글을 보시고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정해진 컴퓨터 프로그램 속에 이 글을 기록하여 넣었기 때문입니다, 이글은 제가 수정을 하지 않는 한 여러분은 이 내용을 그대로 불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글이 너무 길어서 진저리가 나든지, 흥미가 없어 식상하였든지, 아니면 당신의 마음을 콕콕 찌르는 듯하여 얼굴이 뻘겋게 달아 오르든지,.,.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처럼 긴 글이 은혜의 강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방법을 에스겔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유일한 방법이란 안팍에 빽빽히 기록된 두루마리였습니다. 에스겔은 3장 3절에서 "그것이 내 입에 달기가 꿀 같더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후일 사도 요한도 밧모섬에서 경험한바 있습니다. 요한은 입에서는 다나 배에서는 쓰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그것은 입에서 달아서 받아 먹었으나 배속에서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3장에서 그 결과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