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우리는 2002년 한해를 예례미야와 함께 하였습니다. 눈물의 선지자의 애통함을 들으며 우리는
우리에게 곧 다가 올 애통의 시간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은 예레미야 애가를 건너뛰고 우리는 에스켈을 공부하기로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적당한 시간을 내어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연말 마지막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와 손성실 집사 그리고 최모세 형제는 동경 호라이즌에서 개최한 가루이자와
메구미샤레의 신년집회에 참가했습니다. 호라이즌 채플의 메구미 샤레 신년 축복 산상집회는 7년전 부터 개최된 것으로 올해로 8회를 마지하고
있었습니다. 올해부터는 야베스의 기도로 세계적인 목사가 된 브르스 윌킨스 목사의 월드 티치 사역과 관련된 집회로서 말씀에 갈급한 일본인
성도들에게 생수를 제공하는 집회가 되었습니다. 150여명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바라보며 나는 그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였습니다. 수년째 거듭된 불황 속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찾아 헤메는 갈급한 일본 성도들의 모습은 영적교만에 빠져 있는 한국교회에
커다란 경종의 계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제 올 한해 동안 우리의 주일예배는 에스켈과 다니엘을 공부할 것입니다. 대선지서 4권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에스겔입니다. 일본에 있을 때 저는 에스겔에 심취되어 며달동안 에스켈서만을 살펴 본 시절이 있었습니다, 에스켈서 중 47장은 저의 비전이기도
합니다. 좀 난해한 부분도 있고 해석에 어려운 점도 있지만 우리는 문맥을 따라 전체적인 균형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살펴 갈 것입니다.
에스켈은 "하나님이여 강하게 하소서"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부시(모욕)이라는 의미로 보아
하나님의 백성이 국가적으로 이방인에게 포로가 되는 굴욕의 시대에 태어난 제사장 가문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복될 이스라엘의 소망을 자식의
시대에 걸어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에스켈은 바벨론 포로기 직전에 제사장 가문에 태어나 느브갓넷살 왕에 의하여 유다 왕과 귀족들이 잡혀 가던 시절에
18살이였습니다. 첫번째 포로 중에는 15세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다행이 고국에
남아 있게되어 제사장의 소망을 갖고 하나님 앞에 정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25세가 되면 레위 사람으로 헌신을 하여 30세에 제사장 직무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유다는 십여년간 평온한 생활을 하며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포로들을 귀환시킬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은 예례미야를 통하여 좋은 무화과 광주리와 먹지 못할 극히 나쁜 무화과 광주리를 보임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한바 있습니다. 결국 예레미야의
예언을 무시하고 주변 국가의 힘을 빌려 바벨론을 대적하려했던 여호야김은 죽고(열하23:36, 24:1-7)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즉위하자
느브갓네살은 예루살렘을 두번째 포위하고 10.000명의 포로들을 사로잡아 갔으며(B.C.597), 이 때 에스겔도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더이상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며 국가의 근원이며 종교활동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 성전도 모두
파괴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B.C.586). 이로서 제사장의 꿈을 갖고 있었던 에스겔은 모든 소망이 끊긴채 함께 끌려온 포로들과 하루 하루의
지옥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있습니다. 이러한 생활은 포로생활을 해보지 않은 우리로서는 짐작할 수 조차 없는 생활입니다.
그들은 살아있으나 지옥과 같은 삶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더이상 기대해 볼 왕도 귀족도 예언자도 없습니다. 더우기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 교제조차 단절된 상태였습니다. 이처럼 황망한 시절에 에스겔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이상이 보였던
것입니다.
에스겔은 1절에서 "제 삼십년 사월 오일 내가 그발강 가에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 지 오년 그달 오일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연대는 여호야긴과 잡혀 오던 두번째 포로 시기
B.C.597년으로부터 산출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에스겔이 거주한 곳은 그발 강가로 유브라데스에 연결된 인공 운하입니다. 우리가
다니엘을 공부할 때 알겠지만 느브갓네살 왕은 궁중에 까지 운하를 끌어들여 현대 건축에서도 불가사이한 수궁정원을 공중에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것으로 우리는 바벨론 왕국의 위엄을 익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는 아무리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해도 속수무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여있는 짐승들과 같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그의 사람들이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하늘을 열어 하나님의 이상을 보이셨습니다.
에스겔은 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제사장의 가문은 위대한 가문이였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죄를 사하고 축복하는
권세를 갖고 있었고 예배를 주관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이후 더구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에스겔은 자신을 가리켜
제사장이라고 하지만 성전이 없는 이상 예배도 없으므로 그는 명분상의 제사장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제사장에게 특별히 임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제사장은 아론의 자손으로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주관하는 직무이며, 예언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분입니다.
따라서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12지파 중 레위족속 중에서 아론의 가문의 택하심과 율례를 주셨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제사장의 가문과 권위를 알 수 있으며 그들의 말에 순종하게 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예배를 집도함에 있어 특별하게 하나님의 말씀이나
권능 같은 것은 필요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택하심과 부르심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기 때문에 그 시기와 부르신 사람을 예측할수 없으므로 그의
말한 바 모든 것에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 수 없습니다. 에스겔이 여기서 자신의 입장을 상세히 서술한 것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바벨론의 굴욕적인 치세 속에서 이스라엘의 신권 권위자 제사장의 권위가 비참한 상태에 놓여있었음을 알리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권능과 함께 임한 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다고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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