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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5장-1)평안과 기쁨과 사랑의 Reality!

이요나 2001. 1. 1. 13:40
(요한복음15장-1)평안과 기쁨과 사랑의 Reality!


요한복음15:9-11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많은 사람들이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나 역시 참 포도나무의 말씀은 좋아하는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을 읽으면 예수님께서 내게 아주 가까운 곳에 계신 것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 살펴 볼 말씀은 요한복음 9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신 날 하루가 끝나기도 전에 제자들은 그들의 인생 속에서 가장 큰 곤란과 당혹스런 경험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동안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일에 대하여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아무리 진지하게 설명을 하셨어도 아직까지 겪어 보지 못한 일들을 실감있게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다가 올수록 공포의 그림자는 그들의 의식 가운데로 다가 오고 있었습니다.

 

이 때 주께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오늘 하루가 끝나기 전에 그의 제자들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증오스런 일들을 자기들의 눈으로 보고 겪어야 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
    세상에는 하나님을 심히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조차 근본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속하려는 것을 알고 더욱 그를 미워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하나님을 말살하려 작정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앞에 섰을 때, 그 증오는 최고도에 달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세상의 증오를 제자들의 눈으로 보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 하루가 끝나기도 전에 그들이 지금까지 겪지 못했던 극한 분노와 증오와 미움과 슬픔의 고통이 제자들의 가슴을 사로잡을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은 이제 몇 시간 후면 예수를 십자가 위에 달기까지 흥분한 군중들의 분노와 증오를 목격하며, 십자가 위에서 비참한 최후의 고통 속에 죽어 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며 자신들의 삶의 목표이며 사랑이신 스승을 보아야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당하고 겪어야할 시간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평안과 기쁨과 사랑이었습니다.

 

만약 당신의 아버지나 형제가 그러한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면 당신은 그 증오의 순간을 잊지 못하여 심장마비를 일으키던가 아니면 영원한 복수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들에게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기쁨을 주신 것입니다. 극한 슬픔과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서 성취할 소망을 바라보는 기쁨, 그리고 변함없는 영원한 사랑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고 그것을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아는가?
    주님은 14장 27절에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하셨습니다. 이 평안은 하나님을 신뢰할 때에만 보장될 수 있습니다. 두렵다는 것은 혼란과 불안과 공포의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극한 상황을 직면하게 될 때 두려움이 엄습하여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 견딜 수 없는 공포 속으로 이끌고 갑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라도 우리가 주님을 의식하고 신뢰한다면 주님의 온전한 평안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평안은 세상에서 가질 수 없는 완전한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평안의 완전한 모델입니다. 어떠한 상황 어떠한 극한 공포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은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완전한 평안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가복음 4장에서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는 제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풍랑이 얼마나 격렬한지 어부 출신인 제자들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겁에 질려, 예수님에게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모르십니까 라고 외쳤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좀더 주의 깊게 음미하면 제자들은 죽음 직전에서 극한 공포에 질려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배 한편에서 평안히 잠을 자고 계셨습니다. 풍랑을 만난 배를 타 보신 분이면 또 기압의 영향을 받아 출렁이는 비행기를 타 본 사람은 그 순간의 공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승사자가 몰려 올때!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의 상황을 살펴보십시다. 야이로는 죽음 직전의 딸을 살리려고 예수님을 재촉하여 집으로 향하였습니다. 오는 도중에 혈루병 여인을 만나게 되어 지체되었을 때에도 정말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까이 오자 하인들이 달려 와서 딸의 죽음을 전하였습니다. 이 때 주께서는 "믿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과연 믿음이 생길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야이로의 공포를 생각해 보십시오. 집에 이르자 사람들이 딸의 죽음을 슬펴하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울지말라 아이가 잔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를 비웃었습니다. 주께서는 그 시람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베드로와 야곱, 요한과 야이로 부부만을 데리고 잠든 딸을 눕혀 놓은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주께서는 딸을 향하여 "소녀여 일어나라"명령하시어 아이의 생명을 불러 내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와 극한 슬픔에 빠져 있었을 때 주님은 온전한 평안 속에 계셨습니다. 이런 일은 죽은 나사로의 집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인간이 체험하여야할 죽음의 고통과 슬픔을 생각하시며 애통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참조)

 

모든 사람은 죽음 직전에 심통(心統)의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못된짓하는 사람보고 심통부리지 말라고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죽음의 때의 심통은 세상말로 저승사자가 오는 시간입니다. 살아생전의 모든 능력과 호기는 썩은 물처럼 녹아 내리고 감당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두려움이 엄습하여 죽음 앞에 복종이라는 말조차 사용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다고 합니다. 차라리 이 순간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의 영혼을 붙잡아 줄 수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두려움에 쌓인 사람은 이미 그를 영접할 시간의 한계를 잃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은 사람이라면 그의 죽음 저편에 있는 소망을 미리 알아 예수께서 주신 평안을 누리며 그가 부르시는 천국으로 기쁨으로 입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평안이 필요하였는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의 광경을 생각해 보십시다. 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에게 선동 당한 군중은 극도로 흥분하여 광란상태에 있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달만한 죄를 찾지 못한 빌라도는 성난 군중들에게 "내가 예수를 어떻게 하기를 원하느냐?"고 토론을 벌렸습니다. 군중들은 성난 사자와 같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외쳤습니다. 이들의 외침은 분노와 시기와 질투 그리고 극도의 미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예수님은 평안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안입니다.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지는 아비규환 속에서도, 장차 지구가 멸당하는 순간에도 주님의 평안은 우리를 온전한 평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주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나의 평안을 주노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평안은 그 어떠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마음을 평정을 잃지 않는 체험을 누리게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의 평안을 알고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 몰입되더라도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아마 이러한 평안을 경험하신 분들도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러한 평안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은 결코 내게 미치지 않으리라는 믿음과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온전히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과 또 그의 계획하심과 뜻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를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Peace의 의미
    예수께서는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도 있음을 전제합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받는 평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질의 어려움이 있을 때 그 필요가 충족되면 평안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평안을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그보다 더 극한 상황이 오면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평안은 영어로 평화 즉 Peace입니다. 이것은 전쟁의 반대어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 사람 중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은 전쟁이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이 세상 가운데서 평화와 전쟁의 비율은 1대 13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 지구상에 평화의 시대가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가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때에 해산의 고통과 같이 마지막 날이 오리라 경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곧 세상에는 잠시 세상이 주는 평화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곧 인류의 멸망의 시대 바로 앞에 있는 사실상 가장 공포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때 해산의 고통을 겪게 되겠지만 곧 그리스도의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평안하다고 느낄 때 바닷물에 침몰하듯이 극도의 고통이 몰려 올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의 고통이 엄습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악한 자들은 광란하는 바다와 같아서 평정을 찾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며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의 평안을 주셨습니다. (사랑에 대하여 다음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