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요한복음강해

(요한복음15장-3)기쁨의 Reality!

이요나 2001. 1. 6. 17:19
(요한복음15장-3)기쁨의 Reality!


요한복음15:9-11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은 기쁨에 대하여 살펴볼 차례입니다. 성경에 기쁨(Joy)에 관하여는 167번이나 기록된 것에 비하여 슬픔(sad)란 말이 25회 밖에 사용되지 않은 것은 흥미로운 점입니다. 또한 기쁨충만(joyful)이란 단어는 25회 나오는데 비해 슬퍼함(sadness)에 대한 말은 1번밖에 사용되지 않은 것은 성경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의미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들은 인간의 가장 슬픔을 표출해 내려하며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하려는 종교적 의미를 더하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기쁨"을 더해주는 종교임이 틀림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의 백성이 얻을 기쁨에 대하여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사35:10) 노래하였으며 베드로는 믿음으로 이르는 영혼의 구원에 대하여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런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벧전1:8) 노래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다른 차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크리스챤이 체험하는 기쁨이란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주시는 기쁨은 체감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의 기쁨은 삶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적 레벨보다 훨씬 깊고 심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쁨
    우리는 삶 속에서 행복이라는 것을 체험합니다. 이것은 외적 상황을 바탕으로 발생하는 심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외적 상황의 변동에 따라 급격히 변할 여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월드컵 본선진출을 앞둔 축구 중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월드컵 본선진출 마지막 게임에 돌입한 선수들은 지금까지 쌓아 온 자신들의 노력과 투구의 결과를 생각하며 그리고 앞으로 남은 한 경기의 승리를 바라보며 더 할 수 없는 행복감에 빠져들게 됩니다.

 

선수들 뿐이 아니라 이것을 지켜 본 모든 국민들도 동일한 기쁨에 젖어 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고 엎치락뒤치락하는 동안 전반부가 무승부로 끝났습니다. 그 때까지도 우리 마음 속에서는 후반부라는 기대 속에 희망을 걸고 있기 때문에 기쁨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후반부가 진행되고 막상막하의 시소 게임을 벌이는 긴장된 시간 속에서 우리 선수들이 골을 잡고 돌진할 때마다 그를 지켜보는 우리의 감정은 극도로 흥분하여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종료 5분을 남겨 놓고 2대 2의 지점에서면 오금이 오그라들며 긴장되어 괴성을 지르게 되지요.

 

이 때의 흥분은 그 기쁨의 농도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기 종료 1분전 상대의 강슛이 우리 골대를 뚫고 지나갔을 때 상대의 팀의 열광하는 함성 속에 좌절되는 우리의 패배감은 급속도로 냉각되고 그 후유증은 우리의 모든 가능성을 무너뜨린다. 앞으로 2002년 우리는 이러한 광경을 다시 목격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주는 기쁨의 단면입니다.


   영적 기쁨
    세상이 주는 즐거움은 상황에 따라 급변합니다. 극도의 기쁨이 극도의 슬픔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로부터 오는 기쁨은 일순간 사그러질 감정에 치우치는 즐거움이 아니라 영적 세계의 것입니다. 외적인 수치와 관계를 둔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과의 내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니니 재앙이 아니라 곧 나의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다"(렘29:11)말하였습니다.

 

기쁨의 충만이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신이신 사랑의 본체이시며 소망이시며 믿음이신 그 분이 임재하여 계시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서의 삶을 체험하게 되며, 배우게 되는 것이며, 이 기쁨으로 하여 우리는 더욱 커다란 믿음 속으로 전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내면적 기쁨은 상황의 변동과도 불변합니다. 어떠한 고통과 좌절 그리고 슬픔이 있다하더라도 그 기쁨은 없어지지 않고 더욱 강렬한 메시지를 향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 기쁨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창출해 내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근원
    예수께서는 "나의 기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요15:1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는 기쁨의 충만함과 자신의 말씀과 관계가 있음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16장에서 예수께서는 기쁨의 충만은 기도생활과 관련있음을 설명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그러나 여기서는 기쁨의 충만이 예수님의 말씀과 관련되어 있음을 설명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 기쁨이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또 기도를 하면 기쁨이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시작할 때 우리 마음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심을 믿고 기쁨을 갖게되고 또 그 기도가 이루어졌을 때 우리의 기쁨은 더없이 충만하게 됩니다.


   사도들의 증언
    사도행전에서는 기쁨의 충만을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과 관련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우리 생활을 기쁨에 넘치게 하고 있는가를 기록하였습니다(행2:28). 베드로는 기쁨의 충만을 예수님을 믿는 것과 관련하여 말하였습니다(벧전1:8).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기쁨의 충만이 예수의 말씀과의 교제에 있음을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은 문맥의 흐름으로 가르침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함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요일1:4). 또 그는 요한2서에서 기쁨의 충만이 성도 교제 가운데 있음을 설명하였습니다(요이12). 따라서 우리가 함께 모여 교제할 때 주의 충만함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마음을 합하여 주를 섬기며 자신의 일과 다른 이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하라(빌2:4) 말함으로 교회의 구성원이 동등한 위치에서 마음을 합하여 주를 섬길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쁨의 실재!
    이와 같이 주의 기쁨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주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영적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그리고 말씀을 공부할 때, 기도할 때, 주와 교제할 때, 성도와 교제할 때, 그리고 교회가 마음을 합할 때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삶 속에 실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께서 주시는 평안, 사랑, 기쁨은 모두 실재(Reality)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 예수는 진리(Reality)이며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진리(Reality)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21세기의 시작을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