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누가복음강해

헤롯의 가문과 로마정치

이요나 2003. 7. 31. 10:33

(눅2:1-2) 헤롯가문과 로마의 관계

*헤롯의 출세

헤롯이 유대의 왕으로 집권할 당시는 제1차 삼두정치가 끝나고 제2 삼두정치가 실시된 때로서 로마는 레피두스(Lepidus), 안토니(Antony), 옥타비안(Octavian=후일 가이사 아구스도 황제)가 패권을 다투고 있던 시대입니다. 헤롯은 호색가인 오랜 친구 안토니를 통하여 자신의 권력을 확보해 왔고 B.C.37년에 자신의 처 미리안네의 가문을 중심으로 커지려는 정치적 세력들을 무차별 처형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지지세력인 안토니오가 애굽의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져 로마에서 힘을 잃기 시작한 후 그 유명한 악티움 해전(B.C.31년)에서 패배후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동반 자살을 하자 헤롯은 그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그동안 소홀해 왔던 아우구스도(옥터비안 황제로 불림)에게 "소인은 폐하에게도 역시 똑같이 충성스런 친구가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명언으로 유대왕의 재가를 받게 됩니다.



의기 양양하여 유대로 돌아 온 헤롯은 평소 종교적 입장에서 신분적 열등감을 느끼던 처 미리안네가 자기를 환영하지 않자 분노한 나머지 결국 미리안네에서 난 자신의 두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르스를 자신의 정적(政敵)으로 부담을 느낀 나머지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편집증 헤롯에게 메시야 출생 뉴스는 쇼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베들레헴 근교의 2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살해한 것입니다.



*헤롯의 가문

그후 헤롯은 B.C.4년 4월4일에 있었던 월식이 있었던 직후 죽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의 죽음 바로 전 B.C.5년 말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오늘의 12월25일 크리스마스와 일치시키려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크리스마스는 A.D.3~4세기까지도 기독교 역사상에 없었던 일들로 후일 기독교 역사 속에서 전래된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 기록된 가이사 아우구스도로마 황제에 대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당시는 로마에 의하여 세게가 지배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황제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로서 그가 황제가 되기 이전 B.C.63년부터 B.C.27년까지 옥타비안(Octavian)으로 불리웠습니다.



그는 B.C.63년에 태어나 당시 삼두정치 세력구조 속에서 유력한 후보 안토니우스(Antony)를 물리치고 B.C.27년에 황제로 즉위하였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원래 율리우스 시이저(Julius Caesar)의 조카딸의 아들로서 그의 모친 아티아는 율리우스 시이저의 누이동생인 율리아(Julia)의 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리우스 시이저 황제는 옥타비아누스의 외증조부입니다.



*아우구스도의 집권!

아들이 없었던 시이져 황제는 그를 사랑하여 측근에 두었고 로마 정치가들과 장군들이 대학살되던 해(B.C.44년) 옥타비아누스를 시이저의 아들로 봉하고 후계자로 지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시이저(Gaius Julius Caesar)로 명명되었습니다.



그의 여동생은 제2 삼두체제(레프두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의 한 사람인 안토니우스와 결혼하였으나 후일 안토니우스는 애굽의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지게되자 로마인들은 그를 배척하였고 안토니우스는 B.C.31년에 있었던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후 정치적 생명을 잃게되자 클레오파트와 동반 자살함으로서, 로마 원로원은 B.C.27년에 옥타비우스에게 아우구스투스(장엄하고 숭고하며 최고의 숭배)라는 칭호로 황제에 봉하였습니다.



그의 성격은 정권을 쟁취하기까지는 매우 무자비한 사람으로 평가되었으나 후일 황제가 된 후에는 현명한 행정가요 군대와 경호원들을 잘 다스리고 훈련하는 조직적이고 합리적인 행정가요 전술가로 자리를 잡았으며, 정치에 비상한 재능을 나타내어 전 세계를 지배하였습니다.



그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제창자로서 이방 점령지의 풍습과 종교적 이해 그리고 로마의 법률과 충돌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점령지의 법률을 존중하여 지방자치를 해나가도록 배려하였으며 예술과 문학을 장려하였고 건축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진 유능한 황제로서 로마의 대부로 불리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