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누가복음강해

막10장 왜 다시 가르치셨는가?

이요나 2001. 9. 7. 16:03
요즘 정가에서는 DJP공조의 붕괴조짐으로 한참 긴장되어 있습니다. 근래에 진헹되는 우리나라의 정치 흐름을 보면 마치 다니엘서를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전세계의 흐름을 놓고 볼 때 다니엘서는 세계정치의 판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창조주의 섭리를 따라 순회하는 역사의 순회적 질서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모두 동일함을 실감합니다. 최근 민족대표라는 명분아래 종교계 인사들이 자주 매스콤에 얼굴이을 등장하는데 과연 그들이 우리를 대표하는 인물들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표의 기준을 어디에다 두었는지, 교세가 기준인지, 사람의 인품이 기준인지, 아니면 정치적 수단이 기준인지,,,, 나는 기독교의 지도자의 기준은 성경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권위는 성경의 말씀을 알고 그 뜻대로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성경이 발간된 이래 전세계 베스트셀러로 군림한 성경의 권위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권위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경을 삶의 기본으로 삶지 않기 때문입니다. 흔히 믿는 사람들조차 교권주의 즉 교회의 권위를 내세우고 있는데 성경의 가르침을 떠난 교회는 그 권위를 가질수 없습니다, 우리말로 교회라는 말은 가르치는 모임이라는 의미이지요. 그러므로 교회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가 그 교회의 권위를 판가름하게 됩니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 마가복음 10장을 세부적으로 분석하여 종말을 살아가는사람들의 세상 풍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세상 풍조란 하나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풍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왜 다시 가르치셨는가?


막 10: 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가르치시더니



   

<다시 가르치심>

    우리는 10장 본문 서두에서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라는 기록을 보게 됩니다. 마가는 2장과 3장과 4장의 서두에서도 "다시"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마가가 "다시"라는 단어를 사용한 곳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다시 가르치심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2장에서는 죄사함의 권세에 대하여 다시 가르치셨습니다. 3장에서는 안식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으셨습니다. 또 4장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무지를 깨우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마가복음 10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 잘못된 관행들에 대하여 다시 가르치셨습니다. 오늘은 먼저 2장으로 거슬러 올라가 죄사함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과 주님의 가르치심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이 글을 대하는 우리는 이 문제는 우리도 다시 배워야 할 중요한 신학적 토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관계>

    죄사함에 대한 문제는 죄에 대한 근본적인 정의와 죄의 대상 그리고 정죄의 판결에 대하여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는 오늘날 우리도 자각하여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죄라고 할 때 일반적인 범죄행위를 생각합니다. 물론 죄는 그 행위로 말미암아 행위로 나타나게 마련이지만 그 어원 '표적을 빗나가다'(히브리어:하타, 헬라어:하마르티아)으로 보아 인간관계의 도덕적 기준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예로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임을 깨달은후에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시51:4) 고백하였습니다. 인간은 창조자 하나님과의 피조물의 관계성 속에서 지음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의 모든 시작과 출발 그리고 근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데서 출발하였습니다(창세기3장). 여기서 불순종이란 인간의 자유를 억제하기 위한 제한적 조치가 아니라 육체와 지식의 범위를 초월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악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한 지혜자의 사랑과 은혜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하나님을 반역한 악의 세력들이 세상으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죄와 인간>

    인간이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달아 그 말씀에 순종하였다면 사단은 인간을 넘어뜨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한계를 벗어나려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유혹의 시험에 빠져 결국 하나님에게서 떨어져나갔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영생에서 사망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한 사람의 범죄로 사망이 모든 사람의 왕노릇을 하게 된 것입니다(롬5:12, 6:21). 욥은 어떤 인간도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욥15:14)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이 죄의 기원과 결과에 대한 바른 지식과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롬3:23, 요일1:8-2:2). 성경에서의 죄는 보편적이고 불가항력 파급적 존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인간도 스스로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기록하였습니다(히4:15, 벧전2:22).


   

<결자해지>

    따라서 마가복음 2장에서 거론하신 죄사함의 문제는 죄의 근원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삶속의 죄의 보편성을 인간관계속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율법으로 다스려 정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발단된 것이라면 이 죄에 대한 문제의 해결도 하나님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말에 결자해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묶은 사람이 푼다는 의미이지요, 정죄가 하나님께 있다면 죄사함의 권세도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가복음 2장에서 중풍병자를 향하여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밨았느니라"선언하신 것도 그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할 판결자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욥은 죄에서 구속을 소망하며 "하나님이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욥19:32-33) 탄식하였습니다.


   

<죄와 율법>

    그러나 근본적으로 죄의 구속을 받지 못한 인간들은 죄의 속성을 벗어나지 못하여 스스로 죄인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택한 백성으로 선하게 살아가게 하기 위하여 주신 율법으로 정죄하는 풍조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러한 풍조가 수천년 동안 이어내려 오면서 인간은 율법의 노예가 되어 버렸고 그 율법의 판결자들이 스스로 나타나 백성들 위에 군림하여 죄를 다스려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오랜 관행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가 하나님 앞에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의인과 죄인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의인이고 율법에 벗어난 자는 죄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택함으로 거룩한 백성이 된 선민(選民)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은 그들의 근본과 관계없이 택함의 은혜인 것입니다. 창세기를 돌아보면 혈육으로는 선민의 시조 아브라함도 우상을 섬기던 자의 아들로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었습니다.(수24:2 참조) 그러나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르신 은혜로의 초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종으로 시작되었고(창12장 참조) 그 부르심의 확증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비롯되었습니다.


   

<택하심과 율법>

    아브라함은 이상 중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한 아들(후손) 그리스도를 미리 보는 고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될 것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창15:1-7). 이와 같이 의인의 부르심은 그 토대가 그리스도 안에 설정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이름을 믿는 그들을 자녀로 삼으시고 그의 성결의 영으로 의롭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로움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의 의롭다 하심으로 된 것입니다. 그러나 태어남으로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삶을 경험하지 못하였음으로 의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은혜의 법을 주셨고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이며 이미 의인된 우리에게는 성경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순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그것은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로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된 것입니다. 말씀을 떠난 그들은 교만하여져서 성령의 가르치심을 외면하고 자신들은 조상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성민이라는 자만에 빠져 율법의 행함으로 의인의 자리에 스스로 앉았으며, 사람이 처음부터 죄인이었음을 스스로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아브라힘의 부르심이 오직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믿음을 토대 위에 있었음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창15:5-6). 그들은 자신의 의인됨을 성경 속에서 찾지 못하고 율법의 행위로 얻고자 급급했단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요17:17) 하신 말씀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는 이러한 이유로 그들을 다시 가르쳐야 했습니다. 평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