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누가복음강해

막10장 네가 어른이면 모하야?

이요나 2001. 9. 19. 11:14
며칠전에 출판된 "남자를 이해하기 위하여"를 손에 쥐고 나는 새로운 기쁨에 빠졌다, 마치 설빔을 받은 어린 아이와 같은 기분이다. 그 이유는 표지를 내가 디자인 했기 때문이다. 창조이야기나 영혼의 회복의 표지 디자인도 나의 아이디였지만 남자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그 생각에서 색갈과 그리고 디자인 편집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나의 작품이었다, 물론 포토샵을 다룰줄 모르는 터라 이미 다른 사람들이 만든 그림들을 사용하기는 하였지만 난 이 책을 받아본 순간 작품을 만든 사람만이 아는 기쁨을 맛보았다, 아마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천지창조를 완성하시고 그리고 최고의 결작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의 그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아마 이것은 우리 인간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영광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포토샵과 일러스트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능력이 있어 다른 사람의 손을 빌지 않고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아마 인간의 창조하신 하나님의 기쁨을 어느정도 가까이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히란 코오이찌 목사의 "남자를 이해하기 위하여" 가 주는 첫 느낌은 단순 그 자체이다. 이것은 히라노 코오이찌 목사의 성격이기도 하다. 그의 글은 군더덕이가 없다, 깔끔명료하다, 그를 대한 사람들은 모두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그 단순함으로 어떨때는 많은 오해의 소지를 갖게 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그 단순함이 냉정함을 유발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남자를 이해하기 위하여를 읽으면 먼저 읽는 사람으로하여 모태로 돌아가게 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갖게한다. 아마 이것은 니고데모의 번뇌였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모두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나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이 이미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명쾌하게 답하고 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가르친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 같지만 알고보면 매우 간단한 것이다, 그 이유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비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으로 바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느냐 않믿느냐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결판될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해답은 자기 안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제시한 것이지만 주께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통과하여야 할 두가지 문을 제시하셨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하셨다. 이 문제는 오늘 우리가 본문 속에서 다룰 것이다. 또 한가지는 "너희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앞서지 못하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하신 이 두가지 조건은 결국 우리 앞에 닫아 놓은 천국문과도 같다. 과연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같이 의를 이룰 수가 있는 것인가? 함께 고민하며 그 해결점을 찾아보도록 하자


네가 어른이면 모하야?

막 10: 14-15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어린아이>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가르침이다. 그 이유는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그 누구 할 것 없이 자신의 아버지를 통하여 태어나고 성장하며 또 자신도 아버지로서의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을 살펴보면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좀더 면밀히 알 수 있다. 주께서는 늘 자신이 하는 모든 말과 일은 아버지에게서 보고 들은 것이라 하셨다. 예수는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요5:19) 말하시며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빌립에게 "내가 아버지 안에 잇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14:11) 하셨다, 또 예수는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10) 하셨다. 이 모든 말씀을 종합해 보건대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모든 말과 일이 아버지로부터 시작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은 태어남으로부터 아버지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머니가 아버지와 하나라고 생각할 때 어머니와 함께 하는 것은 결국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이다,

어느 범죄 심리학자의 통계에 의하여 수감된 재소자들에게서의 공통된 점은 아버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물론 아버지에 대한 존재 그 자체를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아들에게는 증오할 대상의 아버지라고 있는 것이 아버지가 없는 것보다 났다고 말하였다. 그 이유는 그에게 아버지라는 존재가치를 의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만큼 아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존제가치는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오랜 세월동안 술과 음란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가정에 대하여 조사한 바 있다. 많은 동성애자들이 아버지의 감각이 없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와도 같았다, 또한 성적으로 타락한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보면 그의 어머니가 성적인 갈등 속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즉 부부로서의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두었다던가 아니면 자신의 어머니가 그러한 입장에 있던가 하는 쪽이 많았다. 또 그들의 부모가 열성적으로 우상을 섬기고 있음도 특징 중의 하나였다.

히라노 코오이찌 목사는 그의 저서 "남자를 이해하기 위하여"에서 아버지는 아들의 모델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는 남자 아이가 남성이 되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그 과정을 경험한 아버지는 어떤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말은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는 말이기도 하다. 짐승들을 살펴보자 사자는 그 새끼를 훈련시키기 위하여 새끼를 낭떨어지에 떨어뜨린다고 한다, 독수리는 그 새끼를 날개하기 위하여 공중 높은 곳에서 떨어뜨린다고 한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을 들으며 배우며 공급받고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를 위하여 하나님은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아름다운 환경 에덴 동산을 창설하여 주셨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도록 하셨다. 그리고 내외적인 공격에 대하여 대비할 수 있도록 서로 돕는 배필을 주셨고 자신들을 지켜 나갈 금기의 법을 함께 주셨다. 이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사랑의 배려로부터 떨어져 나간데 있었다, 이후의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떨어져나간 인간의 단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오늘 주님이 오시기전에 발생되고 있는 인간의 근본적인 두번째의 문제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이다, 흥미로운 것은 아들은 꼭 남자와 여자의 결혼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10장에서 거론되는 인간의 문제는 제일먼저 부부문제부터 거론되었음도 우연한 일은 아닌 것이다,


오늘 이 문제는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안수해 줄 것을 바라고 주께 데려 옴으로 발단된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데려오는 사람들을 책망하였다. 여기서 그 사람들을 책망한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에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를 따르는 측근지들임이 틀림없다, 아마 그들의 생각은 일에 바쁘신 예수에게 아이들을 데려 오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오늘날 크리스챤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지 않고 유치원이나 다른 기관에 맡긴다. 살아가기 힘들다는 핑게로 또 자식들과 먹고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아이들과 시간을 같이 할 수없다는 것이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아이들이 잠자고 있는 시간에 볼 수 밖에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세상의 현대화는 결국 아버지 부재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만해도 우리는 땀흘이며 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함께 볏단을 나르기도 하였고 함께 타작마당의 즐거움을 맛보며 살았다. 땀에 흠뻑 젖은 아버지와 함께 냇물에 들어가 미역을 감는 것은 참으로 부자간의 사랑의 모닥불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실정을 살펴보자 아버지는 밤 늦게나 아니면 아침에 얼굴만 보던가 휴일이나 되어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휴일이면 어떤가 믿는 부모들은 모두 교회 봉사에 빠저 아이들과 식탁을 함께 하지 못하고 교회로 달려 나가야 하고 아이들은 유년부다 고등부 교사다 하여 모두 아침부터 저녁까지 초 죽음이 되고 만다. 또 모처럼의 휴일날이라도 모두 밀렸던 세상살이 때문에 각자의 일정에 빠져버리고만다. 이러다 보니 가정은 잠자는 집이 되고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학교, 학원에 맡겨지고 결국 세상 속으로 유혹되고 만다. 가정 속에서 부모와 함께 성경말씀을 보며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그림첵의 동화가 되고 만다, 원칙은 그렇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한다. 그 이유와 원인이 무엇일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아버지인 나도 어려서부터 그렇게 살아 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버지로서 무엇을 하여야 할지를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속에서는 그렇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도 그런 경험과 체험이 없었기 때문에 삶 속에서 실천을 하지 못하고 있는것이다,

오늘 예수는 이 문제를 원점으로 돌이키고 있다.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그렇다. 모든 인간은 어린아이의 과정 없이 시작될 수 없다 어른들의 과오는 그 어린 시절부터 잘못된 타성과 가르침에 젖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을 보라 그들의 마음은 마치 천사와 같지 않은가? 하나님을 향한 아이들의 마음은 정말로 맑고 깨끗하다, 맑은 시냇물을 보는 것과 같다, 이 새냇물이 더러운 강으로 흘러내려가 모두가 흙탕물로 변할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 아픈일이다, 우리는 게시록 22장에서 달마다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강가에 선 나무를 본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가 절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기본 원리는 오직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마시게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바로 가르치는 일에 소홀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