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트립3) '칭다오 오케이?' [갈보리채플] [사이버대학]
(막4:35)그날 저물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 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내가 청도를 처음 방문한 것은 지난 4월초였습니다. 연변 과기대 방문을 마치고 이왕 나선 김에 중국을 둘러 볼 기회를 찾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된 데이빗으로부터 청도방문에 관한 이멜을 받았습니다. 데이빗은 단국대학교 재학중 일본 유학을 전후로 저와 잠시 룸메이트가 되었던 건실한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지금은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청도연합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연변에서 사순절과 부활절을 보내며 중국의 정치적 체제상 오직 그리스도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했던 연변의 고립된 여행을 마치고 한국 기업이 가장 많이 진출되었고 외국인에 대하여는 나름대로 종교적 활동의 여유가 있다는 청도의 방문은 또다른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비록 외국인들에게만 허락된 집회였지만 내가 방문하기 일주일전에 후안 카르로스 목사의 집회가 있었다는 인터넷 보도는 폐쇠적이라 생각했던 중국에 대한 나의 인식에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더우기 내가 방문하던 그 주일에는 일본사역 중 상해 한인교회로 청빙을 온 엄기영 목사님의 사경회가 있어서 더욱 기대가 되었습니다.
'소돔성 바이러스'
내가 연변에서 비행기를 타고 상해를 둘러 청도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가 되어서 였습니다. 상해에서 한시간 텀을 갖고 청도행 비행기를 갈아타게 되어 있었는데, 상해 비행장의 혼잡에 질려서인지 어느 때처럼 '소돔 바이러스'가 일어나 괴롭혔습니다,
나는 언젠가부터 밤길 여행 중 특이한 증상이 일어나곤 하였니다. 아마 그것은 내가 목사가 된 이후에 생긴 것으로 나는 이것을 '소돔 바이러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증상은 어두운 저녁 혼잡한 지하철 역이나 사람들이 많은 도심의 밤길에서 나타는 현상으로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는 증세입니다.
이 증상은 일본에서 21일 다니엘 금식이 끝난 후 어느날 그 당시 제가 경영하던 카페의 임대료를 받기 위하여 가부기죠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늘 은행 구좌로 입금이 되더니 2주가 되도록 입금이 되지 않아서 궁굼하기도 했지만 이제 곧 신학원 졸업을 하기 때문에 카페 매매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를 져야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동경에 들어 온지 5년이 되었고 신쥬쿠 가부기죠에서 카페를 경영한지 3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쥬쿠와 가부기죠 일대는 손바닥처럼 알고 있었습니다. 다니엘 금식을 끝내고 보식을 한지 5일이 되던날 저녁 이께부꾸로 역에서 야마대선을 타고 신쥬쿠역 니시구치에서 내렸습니다. 나는 그날 니시구찌 역에서 20여 분을 헤메다가 겨우 출구를 찾아서 나왔지만 2시간 동안을 가부기죠 골목을 다시 헤메고 말았습니다.
무엇인가 홀린듯이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흡사 귀신에게 이끌려 다니듯 거리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말도 않되는 현실이였습니다. 나는 분명히 아는 길로 들어선는데 그 골목은 끝이 없이 이리저리로 연결되어 내가 가려는 방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였습니다.
그렇게 긴 골목을 두세시간 헤메던 중 나는 더이상 견딜 수 없어서 어두운 건물 입구에 주저앉아 주님 도와 주세요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눈을 들어 보니 그곳은 제가 다니던 가부끼죠 파출소 앞에 있는 순복음 중앙교회였습니다. 결국 나는 신쥬쿠역에서 오꾸보 역 주변을 세시간 이상 헤메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후 이런 증상은 느닫없이 나타났습니다. 멀리 떨어진 어느 부흥성회를 다녀 오던 길에서도, 안양 교도소를 방문하고 돌아 오는 길에 어느 성도의 집을 심방하고 돌아 오던 날에도 그리고 몇년 전 목요모임의 형제들과 안양에서의 조촐한 회식을 마치고 돌아 오던 철산리역에서도 나타났습니다.
그후 나는 저녁 시간의 외출은 가급적이면 피하고 있습니다. 이 때부터 나는 외출을 기피하는 증세가 생겼습니다. 더 곤란한 것은 이럴 때 또 나타나는 현상은 실어증입니다. 혀가 굳어버려서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되고 내 눈은 흡사 전쟁터에서 살길을 찾아 헤메는 혼비백산한 병사처럼 충혈되었습니다.이러한 증상이 상해 비행장에서 다시 일어난 것입니다.
'칭다오 오케이'
두개의 여행가방과 컴퓨터까지 걸머진 나는 말도 통하지 않는 상해공항 안에서 청도행 카운터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헤멨습니다. 내가 간 카운터 마다 중국인 직원들은 손짓을 멀리를 가르쳤습니다.그러나 그곳을 가면 다시 내가 왔던 곳을 가르키는 것이였습니다. 허둥지둥 이리저리 헤메고 있을 때 젊은 두 자매가 나를 따라 붙었습니다. 그 자매는 계속 나에게 뭐라고 말을 하며 내 티켓을 빼앗으려 하였습니다.
나는 불현듯 이들은 혹시 나를 잡으려고 온 중국 경찰 공안들의 앞잡이가 아닌가 하여 가방을 더욱 움켜쥐고 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럴수록 그들은 더욱 따라 붙으며 '핼프 유'라는 말을 연속으로 내 뱉었습니다. 더이상 어쩔수 없는 상황이 되어 나는 혼비백산한 눈으로 겨우 '칭다오 에오포트'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들은 웃으며 '오케이'하였습니다.
나는 그녀들에게 '칭다오 오케이', '칭다오 오케이'를 연방 외쳤습니다. 그녀들은 고개을 끄덕이며 계속 '칭다오 오케이' '칭다오 오케이'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겨우 한마디 통한 것인데 나와 그녀들의 입가에서 웃음이 솟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날 우리가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가 이처럼 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티켓을 그들에게 건내 주었습니다. 한 자매는 내 가방을 들어 주고 나를 데리고 카운터 갔습니다. 그곳은 사실 내가 벌써 지나갔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들은 담당직원에게 내 티켓을 건내주며 중국말로 무어라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녀들의 말 속에 '칭다오'라는 말만 알아 들을 뿐이였습니다.
'원 헌드랜드 달러'
결국 나는 내가 탈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한시간 후에 청도로 가는 민항이 있어서 나는 겨우 안심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 두 자매가 정말 천사처럼 보였습니다. 그녀들은 나를 칭다오 행 게이트까지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인사를 하자 그들은 내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우마치'하였더니 손가락 하나를 폈습니다, 나는 얼른 20위엔 꺼냈습니다. 그랬더니 그녀들은 '원 헌드랜드 달러'하는 것이였습니다.
나는 사실 100달러라도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내 지갑에는 500위엔이 남았었고 그것은 청도에서 머물를 전재산이였습니다. 나는 100위엔을 건너주고 두손을 대고 연방 '세세, 세새'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100위엔을 받아 들더니 두사람이니 한장 더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다시 100위엔을 꺼내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텔레폰'말했습니다.
그들은 나를 공중전화 박스로 안내 하더니 친절하게도 자기들의 전화팃켓을 건너 주었습니다. 그때서야 나는 청도의 나의 아들 데이빗과 통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처럼 우리 말이 귀하고 사랑스러운 것인지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상해 공항 안에서의 2시간 동안의 방황은 정말 지옥을 헤메는 것과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또 이런 일이 어디에서 일어날 것인지 나는 그래서 혼자하는 여행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혼돈의 시간 뒤에는 어떤 중요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미션트립4으로)
내가 청도를 처음 방문한 것은 지난 4월초였습니다. 연변 과기대 방문을 마치고 이왕 나선 김에 중국을 둘러 볼 기회를 찾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된 데이빗으로부터 청도방문에 관한 이멜을 받았습니다. 데이빗은 단국대학교 재학중 일본 유학을 전후로 저와 잠시 룸메이트가 되었던 건실한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지금은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청도연합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연변에서 사순절과 부활절을 보내며 중국의 정치적 체제상 오직 그리스도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했던 연변의 고립된 여행을 마치고 한국 기업이 가장 많이 진출되었고 외국인에 대하여는 나름대로 종교적 활동의 여유가 있다는 청도의 방문은 또다른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비록 외국인들에게만 허락된 집회였지만 내가 방문하기 일주일전에 후안 카르로스 목사의 집회가 있었다는 인터넷 보도는 폐쇠적이라 생각했던 중국에 대한 나의 인식에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더우기 내가 방문하던 그 주일에는 일본사역 중 상해 한인교회로 청빙을 온 엄기영 목사님의 사경회가 있어서 더욱 기대가 되었습니다.
'소돔성 바이러스'
내가 연변에서 비행기를 타고 상해를 둘러 청도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가 되어서 였습니다. 상해에서 한시간 텀을 갖고 청도행 비행기를 갈아타게 되어 있었는데, 상해 비행장의 혼잡에 질려서인지 어느 때처럼 '소돔 바이러스'가 일어나 괴롭혔습니다,
나는 언젠가부터 밤길 여행 중 특이한 증상이 일어나곤 하였니다. 아마 그것은 내가 목사가 된 이후에 생긴 것으로 나는 이것을 '소돔 바이러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증상은 어두운 저녁 혼잡한 지하철 역이나 사람들이 많은 도심의 밤길에서 나타는 현상으로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는 증세입니다.
이 증상은 일본에서 21일 다니엘 금식이 끝난 후 어느날 그 당시 제가 경영하던 카페의 임대료를 받기 위하여 가부기죠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늘 은행 구좌로 입금이 되더니 2주가 되도록 입금이 되지 않아서 궁굼하기도 했지만 이제 곧 신학원 졸업을 하기 때문에 카페 매매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를 져야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동경에 들어 온지 5년이 되었고 신쥬쿠 가부기죠에서 카페를 경영한지 3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쥬쿠와 가부기죠 일대는 손바닥처럼 알고 있었습니다. 다니엘 금식을 끝내고 보식을 한지 5일이 되던날 저녁 이께부꾸로 역에서 야마대선을 타고 신쥬쿠역 니시구치에서 내렸습니다. 나는 그날 니시구찌 역에서 20여 분을 헤메다가 겨우 출구를 찾아서 나왔지만 2시간 동안을 가부기죠 골목을 다시 헤메고 말았습니다.
무엇인가 홀린듯이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흡사 귀신에게 이끌려 다니듯 거리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말도 않되는 현실이였습니다. 나는 분명히 아는 길로 들어선는데 그 골목은 끝이 없이 이리저리로 연결되어 내가 가려는 방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였습니다.
그렇게 긴 골목을 두세시간 헤메던 중 나는 더이상 견딜 수 없어서 어두운 건물 입구에 주저앉아 주님 도와 주세요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눈을 들어 보니 그곳은 제가 다니던 가부끼죠 파출소 앞에 있는 순복음 중앙교회였습니다. 결국 나는 신쥬쿠역에서 오꾸보 역 주변을 세시간 이상 헤메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후 이런 증상은 느닫없이 나타났습니다. 멀리 떨어진 어느 부흥성회를 다녀 오던 길에서도, 안양 교도소를 방문하고 돌아 오는 길에 어느 성도의 집을 심방하고 돌아 오던 날에도 그리고 몇년 전 목요모임의 형제들과 안양에서의 조촐한 회식을 마치고 돌아 오던 철산리역에서도 나타났습니다.
그후 나는 저녁 시간의 외출은 가급적이면 피하고 있습니다. 이 때부터 나는 외출을 기피하는 증세가 생겼습니다. 더 곤란한 것은 이럴 때 또 나타나는 현상은 실어증입니다. 혀가 굳어버려서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되고 내 눈은 흡사 전쟁터에서 살길을 찾아 헤메는 혼비백산한 병사처럼 충혈되었습니다.이러한 증상이 상해 비행장에서 다시 일어난 것입니다.
'칭다오 오케이'
두개의 여행가방과 컴퓨터까지 걸머진 나는 말도 통하지 않는 상해공항 안에서 청도행 카운터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헤멨습니다. 내가 간 카운터 마다 중국인 직원들은 손짓을 멀리를 가르쳤습니다.그러나 그곳을 가면 다시 내가 왔던 곳을 가르키는 것이였습니다. 허둥지둥 이리저리 헤메고 있을 때 젊은 두 자매가 나를 따라 붙었습니다. 그 자매는 계속 나에게 뭐라고 말을 하며 내 티켓을 빼앗으려 하였습니다.
나는 불현듯 이들은 혹시 나를 잡으려고 온 중국 경찰 공안들의 앞잡이가 아닌가 하여 가방을 더욱 움켜쥐고 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럴수록 그들은 더욱 따라 붙으며 '핼프 유'라는 말을 연속으로 내 뱉었습니다. 더이상 어쩔수 없는 상황이 되어 나는 혼비백산한 눈으로 겨우 '칭다오 에오포트'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들은 웃으며 '오케이'하였습니다.
나는 그녀들에게 '칭다오 오케이', '칭다오 오케이'를 연방 외쳤습니다. 그녀들은 고개을 끄덕이며 계속 '칭다오 오케이' '칭다오 오케이'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겨우 한마디 통한 것인데 나와 그녀들의 입가에서 웃음이 솟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날 우리가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가 이처럼 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티켓을 그들에게 건내 주었습니다. 한 자매는 내 가방을 들어 주고 나를 데리고 카운터 갔습니다. 그곳은 사실 내가 벌써 지나갔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들은 담당직원에게 내 티켓을 건내주며 중국말로 무어라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녀들의 말 속에 '칭다오'라는 말만 알아 들을 뿐이였습니다.
'원 헌드랜드 달러'
결국 나는 내가 탈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한시간 후에 청도로 가는 민항이 있어서 나는 겨우 안심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 두 자매가 정말 천사처럼 보였습니다. 그녀들은 나를 칭다오 행 게이트까지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인사를 하자 그들은 내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우마치'하였더니 손가락 하나를 폈습니다, 나는 얼른 20위엔 꺼냈습니다. 그랬더니 그녀들은 '원 헌드랜드 달러'하는 것이였습니다.
나는 사실 100달러라도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내 지갑에는 500위엔이 남았었고 그것은 청도에서 머물를 전재산이였습니다. 나는 100위엔을 건너주고 두손을 대고 연방 '세세, 세새'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100위엔을 받아 들더니 두사람이니 한장 더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다시 100위엔을 꺼내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텔레폰'말했습니다.
그들은 나를 공중전화 박스로 안내 하더니 친절하게도 자기들의 전화팃켓을 건너 주었습니다. 그때서야 나는 청도의 나의 아들 데이빗과 통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처럼 우리 말이 귀하고 사랑스러운 것인지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상해 공항 안에서의 2시간 동안의 방황은 정말 지옥을 헤메는 것과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또 이런 일이 어디에서 일어날 것인지 나는 그래서 혼자하는 여행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혼돈의 시간 뒤에는 어떤 중요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미션트립4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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