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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채플 특징- 제9 장 성령으로 시작하여

이요나 2006. 7. 15. 15:17

갈보리채플 특징- 제 9 장 성령으로 시작하여                        서울 갈보리채플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 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린도후서 3:5-6).

갈보리 채플은 성령으로 시작한 사역이다. 하나님의 모든 새롭고 큰 운동은 성령에 의해서 태동된 것이다. 우리가 교회 역사와 하나님의 여러 가지 큰 운동을 조사해보면 그것들이 모두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의 그러한 위대한 운동들이 성령으로 시작하여 궁극적으로 육적인 것에서 완성해 보려는 시도를 볼 수 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경향이 계속적으로 반복됨을 볼 수 있다. 한때는 성령으로 시작한 생동력있는 운동이 죽은 의식주의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의식주의는 판에 박힌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판에 박힌 일과 무덤의 유일한 차이는 길이와 깊이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에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 죽은 시체에다 인공적인 방법으로 호흡을 하게 하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교회의 전체적인 목적이 기존하는 운동이 좌절되지 않도록 집중하는 것같이 보인다. 우리는 어떤 프로그램이 스스로가 생존하지 못할 때에 가장 자비로운 처사는 그 프로그램이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과 배신의 계속적인 순환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원수의 손에 맡기는 사건을 읽을 때에 그의 진력이 날 정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적의 속박에서 고난을 당하다가 약 사십 년 후에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자를 보내신다. 그럴 때에 일들이 한동안 잘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또다시 악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들은 다시금 원수의 나라에 포로로 잡히어 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똑같은 반복적인 일들이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우리는 이 잘될 때에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일이 잘 안되고 어려운 자리에 빠질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내가 사사기를 읽을 때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마음이 뒤집힌다.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볼 수 없느냐?” “똑 같은 일이 반복하여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교회사를 볼 때에 나는 그의 대부분 비슷한 일을 본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실 때에 성령으로 시작하신다. 여기에 흥분과 부흥이 따른다. 거기에는 성령의 능력의 역사가 있다. 하나님께서 존 웨슬러 그리고 마틴 루터 같은 사람을 쓰셨을 때 현대에 일어난 몇몇 하나님의 하신 일을 생각해 보라. 성령의 능력과 기름 부음이 그들의 생활에서 나타났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 감리교나 루터파 교회를 조사해보면 몇 가지를 제외하고 현대주의에 묶여 있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부인하는 성령의 대 결핍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교회사가 반복되는 것이다. 갈보리 채플은 이 순환의 첫 번째 부분에 속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시작 하셨고 역사하시고 새로운 일을 일으키셨다. 이것은 성령으로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스가랴 4:6).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말하기를 “교회들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라고 말하고 책망하기를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라디아서 3:3).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지도자가 그들의 지혜나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성령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 할 때까지 무척 오랜 기간을 가지신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 특히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도록 하나님이 키우신 사람들을 관찰해 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모세가 한 예다. 당신은 불붙는 떨기나무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렀을 때에 모세는 처음에는 부르심에 거부하였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애굽기 3:11). 모세는 말하기를 “하나님 나는 자신이 없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그러한 일을 한단 말입니까? 나는 광야에서 사십 년을 살았습니다.

 

” 나는 상상하건대 모세는 자기의 남은 여생을 양이나 치는 단순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의 남은 평생을 양치는 일에 종사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그는 반응하기를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 나는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지금 모세가 처음에는 자신 만만하게 시작하였다는 것이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생각을 꺾어 놓으셨다. 한때는 모세가 민족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숙명이라는 느낌을 가진 적이 있었다는 사실도 흥미 있는 일이다. 스데반은 말하기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들의 인도자로 택하였음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두 번째의 기회가 올 때까지 깨닫지 못했다고 말했다(사도행전 7장). 이것은 육신의 일과 성령의 일과의 차이점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모세는 처음에 하나님의 일을 자기 육신의 힘으로 해보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능력으로는 한 사람의 애굽 사람도 성공적으로 매장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에 이스라엘이 애굽의 전 군대를 수장하는데 성공했다.

나는 우리의 대부분이 모세의 경험에 결부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대게 하나님이 우리 생활에서 부르시는 일로 느끼는 소명을 성취하기 위해서 육신적으로 시작한다. 많은 경우에 육신적으로 시작한일이 성공치 못함을 우리 스스로가 발견하게 된다. 사람이 육신적으로 하다가 실패하면 자주 사막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하여 목회를 떠나게 되고 많은 때에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된다. 그 이유는 자기의 마음속에 진실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느꼈던 일을 육신적인 힘으로 해보려고 애를 썼기 때문이다.

모세가 바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는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꼈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어떤 목적을 위해서 임무를 맡기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때 그는 광야에서 사십 년간 지나야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기간동안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서 하실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기의 유능한 가치관에 대한 생각을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모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역량이 보잘것없음을 알았고 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모세의 반대의 말에 하나님의 대답이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애굽기 3:12). 이 말씀은 나에게 얼마나 영광스런 말씀인지!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로마서 8:31).

모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출애굽기 4:1). 다른 말로 말하면 “주여 나는 그들에게 신용을 얻지 못해서 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에게 말씀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모세의 반대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응하시기를 “네 손에 무엇이 있느냐?” 대답하기를 “지팡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것을 땅에 던져라”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연속적인 일련의 증표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모세에게 확신 시켰다.

출애굽기 4장 10절에서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모세는 하나님께 간청하기를 “나는 능력이 없고 말에 능력이 없고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입니다.” 모세가 말재주 없음을 놓고 반대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입을 만들었느냐? 누가 너에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느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능력을 능력 있게 하실 수 있다. 태초에 우리의 입을 창조하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다른 말로 말한다면 “하나님 이 직무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택하소서 나는 이일을 할 소원도 없고 나는 이일을 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라고 말할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출애굽기 4:14).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노하시고 다른 방도로써 아론을 모세의 대변자로 세우셨다. 이것은 슬픈 사실이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가장 좋은 것을 마다하고 최상이 아닌 그 다음 계획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과 그의 허락하신 뜻을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허락한다면 가장 높은 단계에 우리를 올리시고 그 단계에서 우리를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행하시려 하심을 나는 믿는다. 우리는 많은 때에 하나님이 택하신 높은 단계보다 우리가 세운 단계로 하나님께 강요하는 때가 많다. 그리하여 우리가 원하는 낮은 단계로 저하케 하는 일에 하나님을 타협토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라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 행하신 일을 보라, 이 사람은 자신감도 없고 신용도 없고 능력도 없고 소원도 없는 사람을 택하셔서 자기의 백성들을 구하신 것이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고 거짓 신들을 섬기기 시작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디안 족속에게 붙이셨다. 미디안 족속들은 메뚜기 때와 같이 그 땅을 덮었고 추수 때가 되면 그들이 와서 그 수확을 탈취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속박과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드온이라는 사람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하여 숨어서 포도즙 틀로 밀을 타작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라고 할 때에 기드온의 반응이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사사기 6:14-15).

기드온은 자기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그와 같은 겸손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하나님은 나라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나 역량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 어떠한 일이라도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자를 하나님이 쓰시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쓰시기 위해서 이러한 자리에까지 이르도록 하셨다.

우리의 능력으로 할 자신이 없을 때에 우리는 이일을 성취하려면 하나님께서 하셔야만 된다는 사실을 안다. 내가 목회를 위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내 자신을 준비하기 위해서 성경대학을 갔다. 내가 상급반의 학생회 회장이 되었고 학생전체의 회장이 되었고 내가 학교의 체육부의 프로그램을 조직하여 발전 시켰다. 나는 내 자신이 상당한 재질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내가 목회를 시작하였을 때 내가 어디에서든지 성공적인 교회를 설립할 수 있는 모든 자질과 배경을 가졌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내 자신이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 가운데 두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17년이라는 세월을 성공 없이 악전 고투하게 하셨다. 내가 목회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가족을 부양해야 함으로 세상의 직업을 갖아야만 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이 내 마음에 강하게 있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목회를 포기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목회를 떠나 보려고 두 번이나 시도했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목회로 나를 끌어 들였다. 이것은 모두가 내 자신의 능력을 의지했던 탓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나의 인생의 가장 최상의 기간동안 실패를 맛보게 허락 하셨다. 그후에 나는 단지 성령님께 의지하고 그에게만 의존하였다. 그때에 나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심을 관찰할 수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영광을 가로채려는 유혹에 빠지지를 않았다. 주님은 나를 십자가 앞에 대리고 와서 내 자신과 나의 야망을 다 비우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심을 바라보기만 하는 일이 나에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전율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많은 때에 자신을 비우는 필요성이 있다. 기드온이 주님께 대답하기를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사사기 6:15)라고 말함은 자신이 자격 미달인 것을 나타내는 것보다 오히려 그는 실제로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 사람임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 승리를 할 때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자를 찾고 계셨던 것이다.

흥미 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쓰실 때 미디안 사람들이 패배하고 다 흩어졌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사사기 8:22-23).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주위에 모이게 한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모두가 고뇌에 빠져있고 빚을 지고 불만에 가득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다윗의 주위에 모였고 다윗은 그들의 두목이 되었다. 그들은 불만에 가득차 있고 실패한 무리들로써 그 수가 약 400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능력 있는 군대로 만드셨다.

내 자신도 역시 하나님께서 내 주위에 모아주신 사람들을 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자들을 보면 웃음이 나올 정도이다.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마치 다윗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같아서 사회에서 버림당하고 쓸모 없는 사람들인데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해서 행하신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셨을 때에 그가 반응하기를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예레미야 1:6)라도 말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뽑으셨을 때에 어부들이나 세리를 뽑았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대학에 가서 가말리엘 교법사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영리하고 훌륭한 학생이 있는가?“라고 묻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 가서 어부들을 부르셨다.

그래서 갈보리 채플이 하나님께서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자들을 사용하셔서 놀라운 일을 하신 것이 첫 번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흥미롭고도 조금 슬픈 사실은 하나님께서 한번 우리를 사용하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슨 좋은 점이나 있어서 사용하는 줄을 착각하고 그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령으로 시작한 일을 육신적인 것에서 완성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편지 할 때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린도전서 1:26).

 

바울은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을 바라볼 때에 그렇게 자격 있는 자들이 아님을 관찰할 수 있었다. - 현명한 사람도 많지 않고 육신적으로 볼 때에 능력 있고 고상한 사람들도 별로 많지 않았다. 계속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린도전서 1:27-28 ).

하나님께서 고린도전서 1:29절에서 그 이유를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온전하신 목적이 자격이 없는 자들을 택하셔서 성령으로 기름 부으시고 역사케 하신다. 그리하여 놀라운 결과가 나올 때에 세상이 놀라고 경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앞에서 어떤 육체라도 영광을 가로 체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누가는 우리들에게 10장에서 언급하기를 그들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대해서 흥분하며 돌아와서 제자들이 이러한 놀라운 일들을 서로 말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기뻐하시고 계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누가복음 10:21).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 같은 단순한 사람들에게 나타내심을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보시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자주 육신으로 끝을 내려고 하는 것은 흥미 있는 사실이다. 갈보리채플 목사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학교에 다시 간 자들도 있다. 어떤 학교는 그의 목회가 아주 성공적이기 때문에 그들을 아주 열광적으로 받아 들였다. 그리고 학교의 당국자들은 자기학교의 소정의 과정을 밟은 후에 학위를 주어서 목회의 성공과 관련을 맺기를 원했다. 학교 당국자들은 그들을 받아들이기를 애썼고 그들에게 생활에서 성공의 경험을 인정하는 자격증을 주겠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들은 몇 과정을 밟게 하고 모든 생활에서 얻은 성공적인 경험을 토대로 그들에게 학위를 수여하는 것이다. 어떤 목사들은 이러한 학위를 얻기 위해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인터뷰를 할 때에 항상 질문하는 말이 “무슨 학위를 가지고 있나?” 물으면 “아무 학위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하기란 좀 쑥스럽고 당황하게 만든다. “무슨 신학교를 다녔느냐?” “아무 신학교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무슨 대학을 졸업했습니까?” “고등학교 졸업장도 못 받았습니다”라고 아무 교육적인 배경이 없는 것을 인정하기란 당황하게 할 수 있다.

 

"Who's Who"(“누가 누구이냐”란 유명인사 등록 책)의 회사에서 당신의 이름이 금년의 인명록에 기재되도록 선택되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학위를 받았으며 무슨 대학을 졸업했는지를 물을 때에 이 사람은 어떤 박사학위를 가졌다는 대답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보라 이 사람은 이러한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기를 원한다. 여하튼 우리는 육신적으로 끝을 내려하고 심지어 육신적으로 준비까지 하려고 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으면 계속해서 성공하는 길은 성령으로 계속하는 일이다.

마태복음 11:25 에서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 하셨다. 우리가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 있게 되어 보려고 애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리의 계시로부터 자신을 실격시키는 어리석은 일을 스스로 자행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아버지께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이 진리를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어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도록 하심을 기뻐했던 것이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들을 공격하려고 준비할 때에 적군보다 숫자가 훨씬 적었다. 미디안 족속의 군대는 적어도 135,000이나 되었고 기드온은 첫번 징병 모집에 응한 자들이 단지 32,000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 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사사기 7:2).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32,000명 가지고 할 수 없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일을 하시기를 원하심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하신 일에 대한 영광을 받기를 원하신다.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들을 들어 쓰시어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그 일을 보고 단지 머리를 흔들면서 말하기를 “이해는 아니 되나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그기에 있구나 하나님이 확실히 그들을 사용하시구나”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때에 단순한 사람을 찾지 못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일이 방해되고 있는지 나는 궁금하다.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박사들로만 가득하다.

이제 나는 반 지적인 사람으로 비난을 받고 있다. 심지어 갈보리채플 까지도 반 지적인 것으로 자주 낙인이 찍히고 있다. 나는 이일에 책임을 져야할 사람일지 모르나 나는 그 일에 대해서 사과하지 않는다. 나는 교육을 믿는다. 나 자신의 생애는 학구에 전념을 해왔다. 성경은 말하기를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디모데후서 2:15). 하나님께서 사람을 도구로 쓰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그가 쓰시는 도구를 준비시키신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순수한 인간적인 자연적인 견지에서가 아니다. 참된 교육은 세상의 지혜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로부터 오는 지혜와 인도하심이다.

제자들이 종교적 공회 앞에 섰을 때에 공회는 제자들이 성경을 이해하고 있는데 대하서 놀랐던 것이다. 그들이 관찰한 바는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말씀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이 목회와 주를 봉사하는 일에 준비 해야할 전부가 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사년제 신학교를 이수할 필요도 없고 박사학위를 취득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이러한 것들이 축복보다 더 큰 방해가 되는 것이다.

 

 ‘박사’란 타이틀이 당신과 사람들 사이에 큰 벽을 이룬다고 나는 믿는다. 사람들을 목회함에 있어서 이러한 것이 효과를 덜 나타내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당신을 ‘박사님’이라 부르는 순간 당신을 높은 자리에 놓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에 당신은 그 사람들 보다 자신을 높은 위치에 놓게되고 그 사람들은 열등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때는 실제로 그들을 잘 이해하는 위치에서 그들을 목회 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일년에 한번씩 매년 목회자 모임을 준비하기 위해서 목회자 계획을 위한 회의를 갖는다. 내가 라올 리스, 마이크 메킨토쉬, 그렉 로리, 스킾 하이젝 그리고 다른 몇 목사들을 소집하여 모임을 갖는다. 모임 후에 라올과 메킨토시 목사가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이라 모든 다른 목사들이 ‘박사님’하고 그들의 타이틀에 대해서 놀리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라올 리스 박사님’ 그리고 ‘마이크 메킨토쉬 박사님’이라 부르며 악의 없는 농담으로 그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그 중에 어떤 목사는 말하기를 “만약 너희가 학교에 가서 교육만 받았다면 너희들에게 나타난 능력은 교회가 부흥된 것만큼 감소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전형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성령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만일 당신이 육신적인 방법으로 완성을 시도한다면 하나님의 하신 일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당신은 단지 방해할 다름이다. 오직 유일한 길은 성령을 쫓아 계속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시작하였으니 성령으로 계속하자!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자기의 한계와 무능력을 알고 하나님께만 온전히 의존하는 사람들인 라올이 아직도 라올이요 마이크는 아직도 마이크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예레미야 9:23-24). 이것만이 가치 있는 일이며 또한 당신이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 수 있는 길이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예레미야 9:24).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주 자격이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택하셔서 그의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놀라운 위대한 역사를 하게 하사 세상을 놀라게 하고 당황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인데 오히려 우리 속에 무슨 좋은 점이 있어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것처럼 그 좋은 점을 발견해 보려고 애쓰며 그리하여 우리에게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기록하여 말하기를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요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고린도전서 4:7). 그래서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당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던지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면 왜 당신은 특별한 사람인 듯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처럼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