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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채플 특징- 제 10 장 사랑이 최고

이요나 2006. 7. 15. 15:18

갈보리채플 특징 - 제 10 장 사랑이 최고                         서울 갈보리채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5).


사랑이 없이는 모든 성령의 은사와 능력들이 무의미하며 가치가 없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린도전서 13:1). 바울은 말하기를 성령충만이나 성령세례의 일차적인 증세로써 방언에 무게를 두고 그것을 강조하는 자들이 있다고 말하면서 만일 방언을 말하는 같은 사람이 사랑이 없이 방언을 말한다면 그것은 꽹과리나 징을 치는 잡음보다 낳을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시끄러운 잡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것의 증세도 아니고 무엇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사랑을 동반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증명하는 것이 없다. 그것이 성령의 임재의 일차적인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만일 사랑이 없다면 아무 증명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잡음에 불과한 것이다. 실제로 아무 것도 증명하는 것이 없다.

우리의 모든 교리적 정통성과 성경을 잘 이해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신격의 신비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권 혹은 사람의 책임 같은 모든 비밀을 통달한다 할지라도 만일 내가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모두 내게 아무 가치 없는 일이다. 만일 내가 사람들의 얼굴만 쳐다 보고 내가 주장하는 순수한 교리를 그들로 하여금 믿게 하여 나의 편을 만든다고 할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다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무가치한 것이 된다.

나는 올바른 답을 하기보다 올바른 태도를 가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만일 나의 답이 잘못되었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진리를 계시하여 주심으로 순간적으로 고칠 수가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데는 전 생애가 소요되기도 한다. 우리가 잘못된 답을 가졌다 할지라도 올바른 태도를 가지는 것이 잘못된 태도와 올바른 답을 가지는 것 보다 낳다. 다음에 당신이 교리적인 위치와 문제를 놓고 어떤 사람과 논쟁을 할 때에 이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원하시는 바는 우리가 그의 사랑을 경험하고 또 이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 그것은 큰 계명이다. 또 말씀하시기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한복음 14:21).

요한은 말하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4:20). 그는 질문하기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한일서3:17).

요한은 그의 첫 번 서신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대해서 많이 말을 했다. 그런데 우리가 들은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성경공부반이나 혹은 신앙인들의 사귐에 수종들 때에 집에서 성경 공부를 하던지 아니면 만 명의 교인을 가진 교회를 섬긴다 할지라도 일의 가장 중요한 대목의 하나는 사랑인 것이다. 사랑은 우리 자신의 행동이나 태도나 생활에서 나타 내어야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여 모든 사람들이 우리 속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디모데전서 4:12 ). 사람들을 대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 하심 안에서 또한 그의 긍휼 하심을 통하여 사람을 보면서 항상 이해하고 긍휼히 여기기를 힘쓰라.

나는 긍휼히 여기는 열쇠는 이해하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에스겔은 말하기를 “이에 내가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강 가에 거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 중에서 민답히 칠일을 지내니라”(그들이 거하는 곳에 나도 거한다)(에스겔3:15). 나는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 아주 좋은 것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당신 속에 그러한 마음을 가져야한다. 다른 사람의 사정에 자신을 한번 놓아 보는 일이다. 그 사람이 앉아 있는 곳에 나도 앉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사람이 보는 것을 나도 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항상 우리편에서만이 사물을 보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편에서 그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때로는 사람들의 무례한 행위와 우리에게 대한 언짢은 행동들이 우리를 짜증 나게 할 때도 있다. 나는 제임스 답슨 박사님의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의 학창 시절에 그가 다니는 학교에 아주 미운 학생이 하나 있었다. 이학생도 자기를 미워했다. 학교를 다닐 때에 서로가 미워하여 상극이 되어 왔던 것이다.

 

그후에 어떤 날 답슨 박사님이 그 사람을 어떤 집회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를 당하게 되었는데 답슨 박사님은 왜 그 사람이 밉고 싫은 이유를 종이에다 기록하여 그 사람을 만났을 때에 말하기를 “자네 내가 학창 시절에 왜 내가 너를 미워하고 싫어했는지 그 이유를 말하겠다”고 말하고 그 기록한 것을 그 사람에게 읽기를 시작하였다.

그 친구는 그 읽어주는 말을 다 듣고 반응하기를 “나 역시 자네를 미워했는데 그 이유는 자네가 방금 읽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답슨 박사님은 자기가 나열한 미워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보고 자기의 얼굴을 거울을 보는 것 같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이 참으로 옳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일들을 생각해보면 아주 재미있는 일이다.

우리 속에 있는 나쁜 기질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있는데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발견 할 때는 몹시 싫어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있는 나쁜 기질들을 가지고 살아왔고 그것에 대해서는 별로 혐오감을 느끼지 않으나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 될 때는 우리는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긍휼히 여기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수년 동안 나는 젊은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으로 나의 휴가를 보내었다. 나의 생활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경험 중에 하나이다. 나의 가장 영광스런 시간이 되기를 희망하곤 했다. 나의 가족들이 모두 같이 동행하고 그들이 산과 들의 아름다운 것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나의 아내 케이는 말하기를 “여보 하지만 당신은 아직 휴가를 갖지 못했어요”라고 말하면 나는 대답하기를 “오 물론 내가 가졌지요”라고 답한다.

이제 청소년을 지도할 때 “앉아라 하면 일어서고 일어서라 하면 않고”하는 정신 산만한 아이들을 발견 하게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말하기를 “나무에 돌을 던지지 말라 그러면 나무 껍질이 상하여 딱정벌레가 나무를 상하게 한다”라고 말하면 틀림없이 돌들을 나무에 던지는 아이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아이들은 항상 반역하는 심리 상태에 놓여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운슬러들이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척 내가 이 아이들이 하는 일들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참을 수가 없으니 내가 그들에게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 제발 이 아이를 다른 반으로 옮겨 주시오”라고 요청한다.

그러면 내가 “그 아이를 나에게 보내라”라고 말하면 카운슬러들이 그 아이의 목덜미를 잡고 같이 걸어와서 “이 아이가 바로 내가 말하는 아이입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아이를 의자에 안치고 미소를 그에게 띄우면서 무슨 음료수를 마시겠나? 콜라, 세븐 업, 오렌지 소다, 혹 무엇을 원하나? 묻고선 매점에 가서 음료수와 그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캔디 바를 하나사서 준다. 그 아이가 처음에 와서 않았을 때는 반역하는 마음이 가득차 있어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벽을 먼저 허물기를 시작한다. 나는 그 아이가 쌓고 있는 담을 허물기를 시작하면서 그에게 관심을 보인다. 대화가 대게 이렇게 진행된다.


“너는 어디서 왔니”
“불렉 케년”
“불렉 케년이 어디에 있나? 버르데 강 옆에 있나?”라고 물으면
“예”
“좋다 너는 학교에 다니니?”
“예”
“그럼 네 가족에 대해서 말해보렴. 네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니?”
“아버지가 없습니다”
“오 무슨 일이 있었나?”
“모릅니다 나는 아버지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음 참 안되었구나”

자세히 대화를 나누어 보면 그의 엄마는 술집 바에 일하고 있으며 저녁마다 다른 남자를 집에 대리고 오며 그 아이를 집에 혼자 남겨 두곤 하는 것이다. 그 남자들은 집에 와서 그 아이에게 거칠게 대하기 때문에 그 아이는 그러한 남자들을 자연히 피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엄마도 이 아이에게 흥미가 별로 없는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가 펼쳐져서 가정 사정을 알고 나면 나도 모르게 그 아이에게 동정심이 가게 되는 것이다. 이 불쌍한 아이는 건전한 환경에서 자랄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아이는 그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증오와 미음의 담을 쌓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 주위를 증오로 담쌓는 일을 배운 것이다. 아무도 자기에게 접근치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돌보아 주는 자가 자신뿐임을 알 수 있다. 당신은 이제 왜 이 아이가 이렇게 반응하는지를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아이를 대리고 카운슬러에게로 다시 가서 이 어린아이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자세히 말하고 이해시켜 카운슬러가 이 아이에 대해서 동정심을 갖게 되기를 원한다. 나는 자주 카운슬러들에게 이러한 아이들을 가까이 하기를 충고하며 또한 도움을 주고 그에게 많은 주의력을 집중시켜 그 아이의 필요한 것은 공급하도록 책임을 맡긴다. 그후 몇 주 동안에 갈등들이 동정으로 발전하는 변화를 볼 때에 놀라운 일이다.

목사로써 당신의 회중 가운데 같은 경우의 사정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을 알고 그들의 가시가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고 그리고 그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들을 이해해보려고 하면 당신은 그들에 대해서 동정심을 갖게될 것이다.

그때에 참으로 그들을 목양 할 수 있다. 당신이 진정으로 동정심을 갖지 않는 사람을 목양 할 수 없다. 사람들이 어려운 사정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 “예수님이 동정심으로 마음이 움직였다”라는 말씀이 성경에서 몇 번이나 우리가 읽을 수 있나? 주님은 사람들의 필요를 잘 알고 계신다. 사람들의 속에 무엇이 있는 것을 주님은 아시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 증명할 필요가 없다. 주님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으로 사람들을 이해하기를 추구하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15:16).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다.

주님이 당신을 택하여 이 사랑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신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한복음 15:8-9). 그래서 우리가 사랑이 최고임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