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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채플 특징-제11장 절대적 균형

이요나 2006. 7. 15. 15:20

갈보리채플 특징- 제11장 절대적 균형                    서울 갈보리채플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디모데후서 2:15).

갈보리채플 교제(친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중요하지 않은 주제들을 놓고 분리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강한 신념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심과 같이 우리가 말씀의 교리에 대한 확실한 것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어떤 논제를 가지고 논쟁할 때에 성경적으로 보아 양편이 모두 성경적인 타당성을 가지고 있을 때는 한쪽에 너무 치우치거나 혹은 다른 쪽을 제외하는 일을 피하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를 통틀어 예를 든다면 성령의 역사에 관해서 논쟁이 될만한 주제에 접근할 때에 발견 할 수 있다. 우리는 전형적인 오순절파적인 견해를 갖지 않는다. 당신이 이쪽이던 저쪽이던지 간에 한쪽 편에 가담하는 순간 당신의 반수의 회중을 잃게 되는 것이다. 왜 당신이 반수의 회중을 잃게 되었을까? 우리가 원하는 바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목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근본문제가 아닌 논쟁거리에 대해서 강한 입장을 취할 때에 우리는 사람들의 한 부분을 제거하게 되는 것이다. 믿음의 본질적인 교리에 대해서는 우리는 위치를 굳건하게 지켜야 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중요치 않은 분야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다른 의견을 갖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것들을 은혜로운 심령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우리가 서로 의견이 다른 것을 인정하면서 서로가 하나되는 것과 사랑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의 정당성을 믿고 오늘날도 이러한 은사가 나타남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지나친 자유를 사용하는 것은 믿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논쟁을 피한다. 만일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주님께 찬양과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도와주며 용기를 북돋워 준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4장을 성경적인 표본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사람이 방언 하는 것을 성령세례의 일차적인 증세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방언을 말하는 것보다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더 믿을 만한 다른 증세가 있다고 믿는다.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린도전서 13:1). 우리는 방언을 성령세례의 일차적인 증후로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열매로써 사랑이 있나 살펴본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할 때에 굳건한 성경의 기초에 서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방언의 은사를 받기를 격려하는 바이다.

바울이 설명한 것과 같이 당신이 사사로이 개인 기도에서 주님께 노래하면서 방언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고린도전서 14:14-16).

 

공중모임에서 방언 통변도 없이 어떤 사람이 방언을 말한다면 당신 옆에 앉아 있는 알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그 말을 이해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하나님을 잘 찬양을 하였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덕을 세우지 못하였다. 우리는 모든 일을 질서 있게 아름답게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분야에서 우리는 오순절파적인 범주에는 맞지 않고 오늘날 성령의 은사들의 표적을 정당한 체험으로 인정치 않는 성령은사 부정주의자들의 범주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또 다른 논쟁이 될만한 문제들에 대해서 균형을 유지 해야할 예는 칼빈이즘에 대한 우리의 접근 태도인 것이다. 이 분야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아주 감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섯 가지 요점 칼빈 주의자들’도 아니고 또한 알미니안도 아니다. 우리는 믿는 자들의 구원의 안전 보장을 믿는다. 우리는 당신이 화를 내었거나 거짓말을 하였다고 해서 그 결과로 구원을 잃었기 때문에 다음 주일 저녁 예배에 교회에 참석하여 회개하고 다시금 구원을 얻어야 된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는 믿는 자의 구원의 안전보장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성도들의 믿음의 견인’을 믿는다. 우리는 당신이 성도이기 때문에 반드시 견인할 것이라 믿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성도이기 때문에 견인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요한복음 8:31), 그리고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복음 15:6-7). 사람이 예수 안에 거하지 아니할 가능성을 제시한 분이 예수님 자신이다. 그래서 위는 한쪽에 치우쳐서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요점’을 주장하기 보다 균형 된 위치를 취하려고 추구하는 것이다. 당신이 기본적이 아닌 문제들에 대해서 강한 입장을 취한다면 감리교, 나사렛 그리고 다른 알미니안의 영향을 받은 배경을 가진 자들이 모두 떠나버려 교회가 비우게 될 것이다. 왜 당신이 그러한 일을 하기를 원할까?

믿는 자의 구원의 영원한 안전보장은 좋은 논쟁의 대상이다. 이 문제의 양편 모두를 뒷받침하는 성경구절들이 있다. 요한복음 3:16에서 “저를 믿는 자마다”란 무슨 뜻인가? 이 말씀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말씀은 나에게 그렇게 뜻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다만 그를 믿는 자만을 위해서 죽었다는 한정된 대속을 믿는 칼빈주의의 극단적인 주장을 취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이 사람의 책임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완전히 하나님의 절대권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하는 주장을 받아드리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들과 지옥 갈 자들을 이미 정하셨다는 진술이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을 지옥 보내기로 정하셨다면 당신은 불운한 사나이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역량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역량을 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표현된 사랑이 의미가 있고 진실하게 함이다. 이것이 우리가 취하는 균형 잡힌 주장인 것이다.

언제나 갈보리채플을 소견 좁은 비둘기 집 속으로 넣으려고 애쓰는 자들이 항상 있다. 당신은 영원한 구원의 안전보장을 믿는가? 라고 누가 묻는다면 “물론 영원한 구원의 보장을 믿지요 내가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한 나의 구원은 영원히 보장되어 있습니다”라고 나는 대답한다. 이제 한번 논쟁을 시작해 본다면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구원이 보장되어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당신은 구원의 안전보장을 가질 수 있는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어떤 보장도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구원의 안전보장이 있음을 믿는다. 주님이 나를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 우리를 흠이 없이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서게 하실 것이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유다서 24절). 아무도 하나님의 손에서 나를 빼앗을 자가 없다. 나는 그것을 믿고 또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안전 보장을 경험한다.

많은 경우에 이러한 문제들은 의미론적인 문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몇 말씀을 해석하다가 분리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본 갈보리 교회에 한 스텝 멤버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각 그룹들을 도와주는 일에 많은 헌신을 한 사람이었다. 그가 우리와 함께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예수를 믿게 인도하였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분열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이 사람이 비통한 마음을 가지고 떠나 지금 근본주의라고 불리는 그룹에 속해있다. 지금은 그가 성경적으로 기초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버리라고 능동적으로 사람들을 격려하고 있다.

그 사람이 구원을 얻었는가? 실제로 그는 그리스도의 적이다. 만일 내가 알미니안이라면 나는 그가 타락했다고 말할 것이며 만일 내가 칼빈주의자의 견지에서 볼 때에는 그는 결코 구원 얻은 적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같은 사람을 두고 묘사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를 묘사하는 용어에 의해서 분열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사람이 그의 등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릴 때에 다음의 두 가지 경우는 확실한 것이다. 그가 타락한 것인가? 아니면 그가 결코 구원을 얻지 못했는가? 문제는 여기 있는데 내가 만일 그 사람이 결코 구원을 얻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나의 구원의 안전보장이 어디 있는가? 내가 구원을 얻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사람에게는 구원 얻은 표가 있다. 주님을 섬길 소원이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를 애 쓰고 있음을 본다. 나 역시 주님을 섬길 소원이 있고 다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를 애쓰고 있다. 그럼에도 아마 나도 구원을 얻지 못했을지 모른다. 여기서 이러한 것은 나에게 구원의 안전보장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보시다시피 이것은 어의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묘사할 수 있는가? 내가 이 사람을 묘사함에 있어서 이 사람은 타락했다 혹은 구원을 결코 얻지 못했다 라고 나의 견해를 주장함으로 분열이 야기되는 것이다. 우리가 분리되면 자연적으로 분열을 조장하게 마련이다. 내가 그 사람을 타락했다고 말한다면 또 다른 한사람은 말하기를 그 사람은 결코 구원을 얻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가 절반으로 나뉘어져서 다른 절반이 교회를 떠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종류의 논쟁을 교회에서 허락한다면 교회가 분열되기 마련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권과 사람의 책임을 모두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교리적인 독단적 주장을 취하지 않는다. 만일 당신이 이 둘 중의 한쪽을 극단적인 위치를 고집하고 다른 쪽을 부인한다면 당신은 문제를 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양쪽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말하기를 “‘우리가 이 둘을 어떻게 합리화 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 할 것이다. 나의 대답은 할 수 없다. 내가 꼭 대답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께서 대답을 요구하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믿기만 하라고 하셨다.

 

내가 육신적으로 사는 사람이나 혹은 음란과 간음을 하면서 사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가 말하기를 “이 사람아 나에 대해서는 염려 마시오 내가 어린 소년시절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집회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네.” 그럼에도 그 사람은 술 주정꾼이요 간음하는 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말하기를 “한번 구원 받으면 항상 구원받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에게 대해서는 염려 마시오” 나는 이러한 망상에 빠져있는 사람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할 것이다.

 

나는 그에게 갈라디아 5장에 있는 육신을 쫓아 사는 사람의 삶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 말씀의 마지막 부분이 선언하기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라디아서 5:21). 나는 또한 그를 고린도전후서와 에베소서에 있는 말씀으로 깨우쳐 줄 것이다. 나는 육신을 쫓아 사는 사람이나 타락한 기질의 욕망을 쫓아 사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수 없음을 보여 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만일 예수를 잘 믿는 양심이 예민한 성도가 실수하여 넘어지거나 잘못된 일을 할 때에 구원을 잃었다고 느끼고 있다. 나는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확신을 주는 말씀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심으로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아갈 자가 없다는 말씀을 보여준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나는 구원의 확신을 주는 말씀으로 격려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어떤 문제점에 대해서 취하는 나의 위치가 내가 대화하고 있는 사람의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나는 어느 쪽이던지 취할 수 있고 끝없이 논쟁 할 수 있다. 나는 양편 모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줄 수 있다. 나는 당신이 이 양쪽편 중의 어느 한쪽을 취한다면 나는 다른 쪽을 취할 수 있다. 나는 성경말씀을 가지고 얼마든지 논쟁을 잘 할 수 있다.

그래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양편을 조성하게 되는 것이 기정사실이다. 만일 분명하고 절대적인 가르침이라면 논쟁이 있을 수가 없다. 만일 우리에게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22:17)라고 선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당신은 논쟁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명백히 가르치신 말씀을 우리가 선택해야하는 것은 사실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선택을 하기를 기대하신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열왕기상 18:21).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15:16). 이 논제에 대해서 양면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논제를 놓고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며 다른 쪽을 배제하는 자리에 들지 않도록 함이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당신은 회중을 반으로 효과 있게 나누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모든 다른 학생들과 같이 성경대학을 다닐 때에 이러한 문제들을 놓고 씨름한 적이 있다. 나는 아터 핀크의 하나님의 절대권이란 책을 읽으면서 핀크 씨가 구원에 대해서는 사람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진술을 읽고 내가 큰 혼돈에 빠졌다. 내가 이 책을 읽다가 너무나 혼돈이 와서 내가 일어나 책을 방구석으로 던져 버렸다. 나는 마치 잉크병을 마귀에게 던진 마틴 루터와 같은 느낌을 가졌다. 나는 “하나님 도저히 이해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정신적으로 좌절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럴 때에 주님께서 나의 마음속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더러 그것을 이해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단지 나의 말을 믿기만 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나는 그 시점부터 마음이 안정되어 평안을 찾았다. 나는 아직도 내 마음속에 이 양편의 주장을 합리화시킬 수가 없다. 나는 이 양쪽의 주장을 서로 화합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가 없다. 이러한 것이 우리가 자주 당면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기차 철로와 같다. 이 두 철로가 평행으로 달리고 있다. 만일 이 둘이 만난다면 문제가 야기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두 주장이 서로 화합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양쪽을 다 믿는다. 그래서 더 이상 이 둘을 화합해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나는 나의 한정되고 좁은 이성의 위치로 그 깊은 진리를 감소시키지 않고 단지 믿는 것만으로 만족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나의 한정된 지적인 영역 안에 넣어 보려고 애쓰는 일은 좌절가운데서 진실한 교훈을 얻게된다. 영원을 이해하려고 애써 보라! 무한한 것을 이해하려고 애써 보라! 무한한 우주를 이해하려고 애써 보라! 우주의 끝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려고 애써 보라! 끝이다, 출구가 없다, 이 지점에서 더 살수가 없다 라는 표시가 나타날 때까지 얼마나 가야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정할 수 있는 한계와 이해 할 수 있는 영역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심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이사야 55:8-9). 만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길은 너희들이 찾을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넘는다고 말씀 하셨으면 하나님의 길을 찾으려고 하는 일은 허사이다. 우리가 찾는 범위를 능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내가 이러한 어려운 경점에 도달했을 때는 나의 지적인 면이 하나님의 영역을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어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된다. 이럴 때는 나는 그저 서서 나의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위치로 하나님을 끌어내리기에는 너무도 광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단지 하나님을 경배할 따름이다.

당신이 목회를 시작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중에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권을 말씀하시는 성경구절들을 접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는 하나님의 절대권을 가르치라. 그리고 당신이 사람의 책임을 가르치는 성경구절을 접할 때는 그것을 또한 가르치라. 이렇게 함으로 당신은 사람들이 균형 있는 영적인 양식을 취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