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누가복음강해

막10장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

이요나 2001. 9. 24. 12:14
오늘로 마가복음 10장을 마칩니다. 칼럼의 구조상 전체 흐름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필자가 말하는 의미가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의도가 이해가 되었다면 하는 바람입니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옆구리는 점점 시려오지만 그와함께 기도와 성경 속으로의 여행이 깊어져서 고독함을 이겨 낼 것도 같습니다. 올 가을은 어딘가 깊은 산중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입니다. 산도 깊고 푸른 호수가 눈앞에 있다면 더욱좋고 옆에서 히히덕거려 줄 이쁜이가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교계신문을 보니 정명석 교주가 또 성폭력으로 고소를 당했더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고소한 여인이 정명석 교주를 말레시아까지 따라가서 마음주고 몸도 준 후 고소를 하였으니 참으로 이해가 안됩니다. 이 경우 여자가 힘이 없어서 강간을 당했다고 말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관계 이후에 이해관계가 원만하지 않자 고소를 하게 된 것이지요. 검붉은 알몸을 들어내놓고 여자들 사이에 히히낙낙 즐기는 정명석이의 사진을 보면서 여자 손목도 잡아 보지 못하는 처량한 내 신세를 비교해 봅니다. 정명석은 주님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여자를 네 임의로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성경에 그런 말씀을 보신 일이 있으면 제게 알려주세요, 주님이 우리에게 하실 말씀은 모두 성경에 기록되었을 터인데 아마 정명석 교주의 성경은 특별주문된 것인가 봅니다. 그는 아마 이 부분을 그렇게 해석하였을 듯 싶습니다. 창세기 2장에 주께서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 임의로 먹으라하신 하나님의 말씀 말입니다. 아이구 내가 말을 더이상 말아야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 성경해석법...어디 주님 오시는 날 네 모습을 내 눈으로 똑바로 볼 거야.... 그러나 억울한 것은 나에게 허락된 여자가 하나도 없는데 정명석이에게는 왜 그처럼 많은 여자들이 스스로 허락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요.



막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내가 원하는 것>

    앞에서 우리는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서 자기들에게 하여 주시기를 바란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한마디 한 것으로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과 똑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이 질문은 오늘 당신에게도 하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만약 오늘 주께서 똑같은 질문을 하신다면 당신은 무엇을 요구하시겠습니까? 만약 최고가 되게 해달라고 한다면 당신의 경쟁자들이 이를 갈고 왕따를 놓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당신이 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헌신하였다고 해도 주님의 대답은 'NO'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예수에게 있어 야고보나 요한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예수께서 친히 부르신 사도라해도 그 영광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그 영광의 자리는 따로 예비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일까요? 난 그것이 당신이 되기를 바랍니다. 혹시 나일 수도 있겠지요. 주께서는 그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렇다면 누가 그런길을 가려고 하겠습니까? 목숨바쳐 헌신해도 부귀영화를 누릴 수 없고 하늘나라에서 최고의 영광을 누릴 수 없다면 누가 주의 제자로 헌신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그에 대한 대답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경 바디메오입니다.


   

<십가가의 모델>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 10장 마지막 단락에서 특별한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마가복음 10장은 주님이 오시기전 교회안에 발샹될 많은 문제들입니다. 그 중에 제일 첫 문제가 성경 말씀에 대한 의문과 오해였습니다. 그 결과 두 번째가 무너진 부부관계였고 세번째가 자녀들의 문제였습니다. 이처럼 말씀과의 관계에서 떨어질 때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됩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은 물질세계에 빠지게 되고 물질주의의 권력과 합류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난 인생 속에 나타나는 인생구조입니다. 주께서는 이러한 세상풍조 속에서 살아가야할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권세에 대하여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11장부터 이어지는 말씀입니다만 먼저 그러기 위하여는 자신들의 헌신의 정체성을 깨달아야 할 것을 일깨웠습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을 박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친히 우리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명예란 무엇인가?>

    오늘 본문 속에는 소경 바디메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여리고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디메오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디메오라는 이름의 뜻이 "명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디메오의 가문은 명예를 중히 여기는 집안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그 자신에 걸맞는 이름을 갖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 대개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망과 관련하여 분수에 맞는 이름을 지어주게 마련이지요, 만약 디메오의 집안이 형편없는 가문이었고 또 바디메오가 태어날 때부터 소역으로 태어났다면 그 아들을 바디메오 즉 명예의 아들이란 이름을 지어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디메오는 거지였습니다. 어떤 사유로 바디메오가 소경이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질병일수도 있고 또 전쟁 또는 어떤 종교적 투쟁으로 소경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어떠했던지 간에 그의 현실은 거지이며 앞 못보는 소경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앉았던 바디메오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자 소리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다윗을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얼마나 처절하고 애절한 장면입니까? 그는 예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방향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고 있을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지요.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에수를 만나고자 하면 그 주변의 사람들이 제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입니다. 오늘 바디메오의 외침은 앞에서 들어 보았던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마가복음 7장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이 외치던 소리입니다. 그 때도 그 여인은 "다윗을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외쳤습니다(마15:22). 그때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향하여 자녀의 떡을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거절하였습니다. 사실 그녀는 이방인 여인으로 다윗의 자손 메시야를 알지도 못하고 부를수도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는 네가 나와 무슨관계냐? 하신 것입니다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장면은 다릅니다. 비록 장님이었지만 바디메오는 이스라엘의 백성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명예를 중요시 하던 가문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다윗의 자손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다윗의 아들 즉 메시아를 고대하고 소망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기막힌 환경에 처하고 그 어떤 것으로 구원의 소망이 없고 오직 메시아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에게 소망을 갖어 보실 것입니까? 대개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면 인간은 포기를 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오실자 메시야에 구원의 소망을 두었습니다. 결국 그 소망의 날이 이르렀고 예수는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은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답하였습니다. 얼마나 솔직한 대답입니까? 소경으로서 보기를 원한다는 것은 최선의 대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바디메오가 예수를 부른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는 "선생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나세렛 예수가 하나님의 기름부은자로 자 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이 고대하는 메시아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가 자기를 부르자 나의 구원자라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그의 제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그의 소망이며 메시아에 대하여 아니 창조자에 대하여 그리고 인생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고통 중인 영혼의 울부짖음입니다.


   

<개눈에는...?>

    여러분은 지금 주께서 부르시면 무어라고 하시겠습니까? 나의 구원자, 나의 메시야, 나의 영광, 나의 반석, 많은 호칭이 있겠지요. 그러나 "나의 선생님"이란 호칭은 참으로 얼마나 명예로운 이름입니까? 결국 바디메오는 그의 제자가 되어 그 길에서 따랐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나를 따르라는 주의 명령을 듣고도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소경 바디메오는 누더기 옷을 내어던지고 그의 선생 예수를 따랐습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 보게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이 되게 하려 함이라"(요9:39) 하셨습니다. 이 때 바리새인들은 무어라고 하였나요? "우리도 소경인가?" 그렇습니다. 오늘 이 글을 보는 당신이 바로 소경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41)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기자는 우리에게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과연 눈뜬 장님이 아닌지 생각해 볼 때입니다. 이 말을 깨닫지 못하면 혹시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우리 속담은 아시겠습니까?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