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4:31) 성령 충만한 교회
(행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쓰믈 전하니라”
오늘 사도행전 4장에 나타난 사건들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강림으로 탄생된 교회의 출발과 함께 발생된 문제와 그 문제들을 직시하며 완벽하게 해결해 가는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의 우리 교회의 문제들을 돌이켜 보며 그 문제의 중심에 선 배후 세력을 살피고 또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살펴 보기로 하자.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2)
이 일은 베드로가 성전 문 앞에 앉아 구걸하던 40세 된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으로부터 이어진다. 그 이후로 사도들은 성령의 도우심과 성경의 말씀을 힘입어 만인의 주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에 이르렀다.
사도들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미처 알지 못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말씀하신 바와 그로 말미암아 모든 이방이 복을 얻게 하기 위해 보내신 구속주로서, 하나님께서 만유를 회복하실 때에 다시 오실 것이니 이에 너희는 모두 회개하여 그의 날을 예비하라’ 담대히 외쳤다.
이로서 수 천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유일 종교 유대교를 이끌어 오던 종교 지도자들 곧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은 초비상에 걸리고 말았다. 그 이유는 사도들이 백성들을 가르치며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여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사실 그 당시 유대교는 두 세력으로 나누어졌는데 하나는 사두개인을 중심으로 한 제사장 세력이며 다른 한 쪽은 서기관 중심인 바리새인들이다. 이들은 모두 예배와 율법 수호를 원칙으로 유대교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성령의 강림과 함께 놀라운 표적과 가사들이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나자 오순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수만의 백성들은 모두 사도들에게 모여들었다. 더욱이 사도에 의해 일어선 40세 된 앉은뱅이의 이적으로 다른 변론의 여지들이 무색하게 되었다. 또한 사도들의 증거로 믿는 자의 수가 남자들만 어림잡아도 오 천명이나 되자 당황한 성전지기들과 제사장들은 우선 사도들을 감금하기에 이르렀다.
II. 영적 전쟁 (5-22)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8)
이튿날 긴급 소집된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 회의에는 관원(70인 공회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모였는데 그 중심에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가 섰고 요한과 알렉산더를 포함한 대제사장의 문중들이 모두 참여하였다. 아마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에 가담했던 세력들일 것이다.
A. 무슨 권세, 누구의 이름
그들은 사도들에게 먼저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 물었다. 이것은 이러한 권세는 자신들 밖에 가질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 그들은 어떤 일을 행할 때 최고 책임자의 이름으로 행하였다. 심지어 성경을 가르칠 때에도 그 당시 권위자인 랍비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논증을 했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많은 목사들이 설교를 할 때 세계적인 명사들의 말을 많이 인용한다. 사실 그들이 그 명사들의 제자라면 그건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말들을 인용하여 자신의 설교를 돋보이려 하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서 우리는 기존 세대와 신세대의 마찰을 보게 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러한 기 싸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비단 서로 다른 이념을 표방한 조직과 세력의 다툼만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다. 다시 말하여 율법을 고수하며 자기 세력을 지키려는 종교지도자들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간의 영적 싸움이다.
나는 가끔 텔레비전을 통하여 여러 가지 토론회를 즐겨 본다. 대부분 어떤 일이나 사상에 대한 보수세력과 개혁세력의 찬반 논쟁이지만 그들의 논쟁을 살펴 보면 그들 속에서 서로 다른 영적 충돌이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정치적 문제나 사상과 이념에 속한 논쟁일 경우 그들의 다툼은 더욱 치열해 진다.
B. 성령충만이란?
흥미롭게도 8절에서 성령 충만이라는 단어가 다시 나온다. 이 단어는 2장에서 성령의 강림과 함께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현상이다. 말 그대로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특별히 성령충만이라는 단어를 다시 언급하고자 하는 이유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세례와 관련하여 성령충만이란 말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성령세례에 대한 지식들을 알고 있다. 베드로는 이것을 가리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의 선물이라 증거하였다(행2:38). 베드로가 선물이라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과 관련된 헬라어 전치사다. 성령이란 단어는 전치사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진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의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역적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라 하겠다.
요한복음 14장 17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말씀하시며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하셨다. 여기서 ‘함께’ 라는 헬라어는 ‘파라’(para)로서 성령께서 옆에 함께 한 상태이다. 또한 ‘속에’라는 헬라어 ‘엔’(en)은 성령이 몸 속으로 들어 온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컵과 물 주전자가 함께 놓여 있는 상태를 ‘para’ 라고 하고 물 주전자에서 컵에 물을 부은 상태를 ‘en’이라 한다. 물을 성령이라 가정할 때 성령이 컵(몸) 안으로 들어 간 상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옆에 계시고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다. 이것은 보혜사 성령의 사역적 역할의 다양성을 설명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성령에 ‘에피’(epi)라는 단어가 붙을 때가 있다. 이것은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에서 ‘임하시면’ 에 해당하는 단어다. 이것은 위에서 붓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성령이 오순절에 각 사람 위에 임(부어)하였다(행2:3).
다시 말하여 주전자의 물을 컵에 넘치도록 계속 부어 넣는 상태를 말한다. 이로서 사람들에게는 성령은사가 나타나게 된다. 성령을 그 사람에게 부어 주므로 그 능력이 흘러 넘쳐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알고자 하는 ‘성령의 충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성령의 에피의 지속 상태를 말한다. 성령이 넘쳐서 사용되는 만큼 계속 채워진 상태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과 성령은사는 서로 동의어이다. 따라서 성령세례가 없으면 성령충만도 없고 성령의 은사도 없는 것이다.
C.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성령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그들 앞에 담대히 일어나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 하였다. 여기서 베드로는 자기 손으로 일으킨 앉은뱅이의 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평범한 증거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는 분명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손으로 일으킨 사람의 일에 대하여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을 건강하게 선 것이라 증거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으로 나타난 놀라운 능력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이러한 증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베드로는 유대교에 의해 정죄되어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처형 될 각오로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다. 이 모습은 지난번 예수께서 잡혀가실 때 줄행랑을 하던 베드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나타난 능력의 결과다.
주님은 생전에 제자들에게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으로 끌고 가거던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눅12:11,12) 하셨다. 사람 앞에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살고자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극한 상황에 몰리면 자기 목숨을 위해 굴복하게 된다. 그 어떤 이념과 명령도 죽음의 두려움 보다 앞설 수는 없다. 따라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대적하는 권세 앞에 설 때 무엇으로 대답할 것을 생각하지 말라 하신 것이다. 그때에 그의 성령이 마땅히 하실 말씀을 가르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베드로는 자신의 의지와 생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말하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속에서 주께서 하신 말씀이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삼위일체 중의 한 분이신 성령께서 자신이 행하신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이 일은 성령께서 하신 일인데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하셨다 증거했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베드로는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느니라”(11) 증거하였다. 이 말씀은 시편기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미리 하신 말씀으로 예수께서도 증거하신 바 있다. 여기서 성령은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이 말씀의 성취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 와 있음을 증거한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음으로 증거하느니라” (요15:26,27) 하셨다. 이것은 성령의 사역적 질서와 그 목적을 언급하신 것이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축복하려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지금은 삼위일체이신 성령이 역사하는 시대이므로 성령의 이름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신세대주의적 발상이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하게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 하였노라(요16:14,15) 하셨다.
베드로는 계속하여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12) 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선포이다. 이 세상에 이러한 선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은 하늘에 속한 지혜로서 그 지혜와 예정된 지식을 알 수 있는 자만 선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 또한 성령께서 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이미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16:13) 하셨다. 이와 같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또 장래일을 그의 제자들에게 알리시는 것이다.
D. 놀라운 복음의 지혜와 지식
베드로의 증언을 듣던 종교지도자들은 베드로의 입으로 증거되는 지혜로운 말에 위압되어 더 이상 무엇을 물을 수 없었다. 그들은 학문이 없는 보통 사람들인 베드로가 미처 자기들도 깨닫지 못한 복음의 비밀을 쏟아내자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이후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위협하고 풀어 주었다.
이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19,20) 답하였다. 정말 백절불굴로 다져진 요지부동의 자세였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베드로와 사도들 속에 역사한 성령의 능력인 것이다. 이를 위해 성령의 충만함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나타나심은 방언이나 예언(점) 그리고 병고침으로만 알고 있다. 모두가 사람들의 문제점과 관련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전12:28) 하였다.
III. 성령 충만한 교회의 모습(23-37)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고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 지게 하옵소서”(29-30)
A. 하나님 찬양 – 통치의 대주재
사도들이 풀려나자 형제들 가운데로 돌아와 그 동안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당한 일들을 모두 고하자 그리스도의 성도들이 모두 일어나 소리 높여 찬미하여 “대주재요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이시요,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하였다.
지금 이들은 여기서 천하만물의 창조자이신 주께서 천하를 친히 통치하시는 절대 군주이심을 송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눈 앞에서 조상 다윗을 통하여 성령으로 미리 말씀하신 일들이 천 년이 지난 오늘에 실제로 성취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찬송은 신비에 쌓인 비밀한 지식들이 실제로 눈 앞에서 터득될 때 나타난다.
그들은 계속하여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와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27,28)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대적자 곧 진리의 복음을 대적하는 무리가 누구인 것을 알 수 있다. 다름 아닌 이방의 권세자들과 깨닫지 못한 부패한 백성들이다. 그들은 모두 권세와 물질로서 자기의 권위와 명예를 쌓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자기의 권위와 영광을 지키기 위해 진리의 수호자이시며 천하만물의 지배자이신 주를 대적하는 것이다.
B. 하나님 말씀의 전파 – 그리스도의 종을 세움
이를 위해 그리스도의 교회는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고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 지게 하옵소서”(29-30) 간구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며 무소부재 하심을 알 수 있다. 또한 어제나 이제나 언제까지라도 그의 종들을 보살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켜 달라는 기도와 함께 ‘종들로 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이 세상에 핍박을 받는 이유이며 또 그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기도 한다. 이것은 사역자들의 기름부음을 위한 중보기도이다.
바울은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니 우리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기도하였다(히13:18). 오늘날 정말 안타까운 것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위협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로서 오히려 교회는 세속화하여 진리의 복음이 왜곡되어 도리여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고 있다.
나는 최근 한국교회에서 배도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다. 최근 한국교회가 향방을 알 수 없는 곳을 향하여 단합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목적이 이끄는 삶을 주장하는 미국 새들백 교회의 릭워렌 목사가 한국교회를 흔들고 지나갔다. 그런데 그 주최자들은 다시 또 오는 10월10일 윌러 크리닉 교회의 빌 목사를 다시 초청하였다.
이들이 초청한 목사들은 모두 교회성장을 교회의 최우선 목적으로 하는 성경적 가르침을 왜곡하는 신흥종교의 선두주자들이다. 이들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며 이로서 이 땅에 평화가 성취된다고 외치고 있다. 갈보리채플의 척 스미스 목사는 2006년 목회자 컨퍼런스에서 이들의 가르침에 동조하는 목사들은 갈보리채플에서 나가라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의 권면을 따르지 않은 그의 아들 척 주니어 목사를 갈보리채플 연합회에서 제명하였다.
바울은 이미 우리에게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먼저 배도(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라’(살후2:3) 전하였다. 나는 이미 이 땅에 불법의 아들이 임하였음을 느낀다. 그러나 문제는 진리를 따르던 교회들의 배교행위다. 그들의 배교는 마치 문선명 교도가 되는 의미와도 같다.
C. 질병의 치료와 표적과 기사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이 충만한 성도들의 세 번째 기도제목은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였다. 나는 오늘날 왜 우리 가운데서 질병의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매우 궁금하다. 척스미스 목사님은 미국에서 주의 기적이 멈춘 것은 교회의 범죄로 그 믿음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제 우리 교회는 회개하며 다시 주의 긍휼하심이 나타나기를 기도해야 한다.
D. 공존의 생활 – 부활의 도를 힘입어
32절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2) 이것은 성령이 충만한 교회에 나타난 네 번째 능력이다.
사실 이러한 일은 성령이 아니면 사람들 임의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모두 재물의 귀중함에 사로잡혀 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 돈을 위해 사는 것 같다. 물론 남을 돕기 위해 나누기도 하지만 식탁에 떨어진 부스러기 빵 조각을 모으듯이 구호품 모금함에 헌 옷이나 잔돈을 내 놓으며 생색을 내려 한다.
이러한 일은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 하므로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자신의 재산들을 교회에 헌납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하여 그의 성도들에게도 주어진 큰 영광의 지혜의 말씀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에 헌납을 하는 이유와 상당한 거리가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명예와 가족의 축복을 위해 교회에 많은 물질을 헌납한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 나타난 일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지혜를 터득한 성도들이 그 얻은 은혜에 대한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얻을 영광된 기업을 바라본 것이다. 그들은 모두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장막임을 깨달은 것이다.
E. 바나바의 헌신
끝으로 바울과 함께 사도가 되어 이방인의 교두보가 된 바나바가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성령충만한 교회의 역사 가운데 나타난 가장 큰 열매이다. 바울은 “이 복음이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1:6) 하였다.
바나바는 구브로에서 난 레위인으로 요셉이란 사람이었다. 사도들은 그에게 바나바 곧 ‘권면의 아들’라는 이름을 더하였다. 아마 그의 봉사로 사람들이 많은 권면과 위로를 받았는가 싶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이러한 사람이 필요하다. 각박히 살아 가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을 권면하여 상한 심령을 위로하는 일은 매우 귀한 사역이다. 이것은 자기 희생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각 사람의 상황과 필요에 합당한 것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 자기에게 남은 재산인 밭을 팔아 사도들 앞에 내어 놓았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주께 헌신하는 과정이다. 주님은 두랩돈은 연보궤에 넣는 과부를 보며 저는 전 재산을 하나님께 드렸다 하셨다. 아마 바나바는 자신의 소유의 밭을 모두 교회에 드리므로 자신의 생명을 주 앞에 내려 놓은 것이다. 그는 후일 안디옥 교회를 세워 바울과 함께 이방교회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의 위대한 권능을 찬양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이처럼 유구한 역사 속에서 살아 있는 것은 주께서 주의 영광을 위해 부으신 성령의 역사로소이다. 이제 우리로 하여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현실의 위협으로부터 담대하게 하옵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옵소서.
또한 당신의 종들의 손을 내밀어 질병을 치료케 하여 표적과 기사들이 거룩한 종의 이름이 이루어지게 하옵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도가 증거가 선포되는 곳마다 긍휼하신 은혜가 나타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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