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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5:29)교회를 망하게 하는 사람들

이요나 2006. 10. 12. 16:50
 

(사도행전5:29)교회를 망하게 하는 사람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사도행전5:29)

 

북한의 핵실험 이후 세계의 눈은 온통 아시아의 작은 땅 한국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이 일이 어떻게 전개되어 갈지 세계 정치 판도를 쥐고 폈다하는 강대국들은 모두 자기나라의 손익과 맞물려 서로 눈치를 보며 북한의 추이를 예시 주의하고 있습니다.

 

나는 최근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는 국제정세를 바라보며, 여러 가지 성경의 예언들과 관련된 일들을 생각해 봅니다. 과연 앞으로 중동사태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러시아의 배고픔은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전세계를 삼켜버릴 듯 확장되어 가는 중국의 세력은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과연 유럽 통합국은 옛 로마의 판도를 재현할 것인가? 사실 이 모든 일들은 이미 성경에 언급되어 있고 앞으로 전개될 모든 현실은 그대로 성취되어 갈 것이다. 

 

 이러한 세계 정세 속에서 우리의 시선을 이끌어 가는 또 다른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오늘날 세계 속에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신흥교회(the emerging church movement)들의 에큐머니칼 운동입니다.  이들은 사실 바울이 이미 언급한 배교의 무리로서 이들은 세계 평화를 표방하며 복음의 지상명령이라는 도약대식의 성경해석으로 선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감정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5장에서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접하게 됩니다. 5장에는 크게 두 가지 주제를 갖고 있는데 그 하나는 아나니야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과 진리의 복음의 핍박입니다. 29절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 답하였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5장에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한마디로 말하여 우리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외적인 요소가 아니라 내적인 문제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위협도 외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 곧 정치적 문제에 있습니다.

 

 우리가 동서고금의 역사를 볼 때 어느 나라가 외세로부터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게 되면 백성들은 국가와 민족 정기를 수호하기 위하여 일치 단결합니다. 오늘날 북한의 김정일도 이것을 이용하여 미국의 침략으로부터 한반도를 수호하자는 어처구니 없는 구호를 내 걸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세의 침략은 국가를 붕괴 시킬 수 있지만 민족의 정기와 이념을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그 증거를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국가나 사회나 교회를 훼방하고 무너뜨리게 하는 가장 큰 누룩은 양상군자(梁上君者)입니다. 다시 말하여 대들보 위에 앉아 있는 도둑놈이란 말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조직의 뿌리를 썩게하는 악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5장에서 훼괴한 일을 만나게 됩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이 글을 읽을 때 심히 두려워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말 한마디에 부부가 졸지에 죽음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문제의 발단은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요셉이라는 사람에게서 비롯됩니다. 이는 후일 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를 세워 사도의 반열에 오른 바나바로서 바울과 함께 세계전도의 기틀을 놓은 사람으로 마가의 삼촌이기도합니다.

 

그는 성품이 온전하고 성실하여 성도들을 섬김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성도들을 보살피는 그의 헌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으로 나타나 사도들은 그 사람을 가리켜 바나바(권위자) 곧 권면과 위로의 사람이라 불리었습니다.

 

바나바는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주를 섬기다가 뜻을 세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일생을 헌신키로 하고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말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과 함께 탄생된 교회의 출발은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표적과 이적들이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가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행5:12,13)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주께서 세우신 사도들의 권위가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초대교회 회중 속에 아나니야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재물을 갖고 있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바나바가 사도들의 인정 속에서 회중들에게 칭송을 받게 되자 아나니야과 삽비라도 교회에서 존경을 받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두 부부는 의논하여 땅을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아마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교회를 위해 땅을 팔았다고 떠벌렸을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아니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에 그대로 있을 때에도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에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 말을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하고 책망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자 아나니야의 혼이 떠나 청년들이 그의 시신을 싸매고 가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또 세시간 쯤 후에 그 아내 삽비라가 들어 왔을 때 베드로는 '땅 값이 이것 뿐이냐' 물었습니다. 그녀는 '예 이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였습니다. 정말 창졸지간에 두 부부가 죽음을 당한 일로 듣기조차 두려운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매우 넌처해집니다. 사실 이러한 일들이 우리 교회 안에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 성도들 중에는 바나바처럼 진정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께 자신의 재물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의 믿음은 세상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회중 속에 자기 이름이 들어 나기를 바라고 교회 지도자들 앞에 재물을 내어 놓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어쩌면 교회 지도자들이 은연중에 이런 것을 부추기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장로나 권사의 직분을 받기 위해서는 작게는 몇 백 만원에서 천 만원의 헌금을 준비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돈으로 직분을 사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로 하여 그들은 교회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의 명부에 등록하게 됩니다. (사실 이러한 일들은 교회의 관행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의 요점은 교회를 인간적인 관점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교회가 하나님의 집인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기의 감정과 생각을 따라 움직이려 한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매우 미묘하여 어느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어느 것이 사람의 생각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교회에는 사람의 마음이 개입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시며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인격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가르치시고 주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며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판단하시리라 하셨으며 진리의 영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장래 일을 말씀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은 인격을 갖고 우리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하였으면 다시 너희가 육신으로 살면 반듯이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롬8:13) 하였습니다. 이를 돕기 위하여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탄식하시는 것입니다(롬8:26).

 

본문에서 베드로는 아나니야에게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느냐'(3)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베드로는 이와 같은 말로 예수께 책망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어느 날 주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나서 '주여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않됩니다' 간하였습니다. 이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서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느냐' 책망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헌금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들은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저주하신다 말하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재물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라 하였습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하나님을 향한 성도들의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상당히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었고 그들을 보살펴야 하는 데는 많은 물질이 필요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모두 한 가족과 같이 되어 서로의 재물을 나누어 쓰게 되었습니다(행2:44-46).

 

그런데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게 되므로 주께서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주신 성령의 은사대로 각각의 직분이 수행되었습니다.  이때는 아직 사도 외에 다른 직분이 수여되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는 봉사의 손길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바나바의 순전한 헌신이 교회 안에서 칭송을 받게 되고 사도들은 그의 봉사를 귀하게 여겨 권면의 사람이란 칭호를 주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사랑의 나타남이었습니다. 이를 본 아나니야가 그만 자기도 교회 가운데서 유명해 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자신을 나타내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게 헌금과 관계가 깊습니다. 또한 어떤 교회에서는 많이 낸 사람을 믿음의 사람인 것처럼 과장되게 부추기어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로 하여 어떤 사람은 십일조를 드림에 있어서도 마치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재물을 많이 드린 것처럼 으쓱대기도 합니다.

 

미국 갈보리채플 척 스미스 목사님은 개척 당시 교회가 크게 부흥되는 바람에 새로운 교회로 이사를 가지 않으면 안되었을 때 어느 부자 성도가 백지 수표를 갖고 와서 교회서 필요한대로 사용하여도 좋다고 제안하였다고 합니다. 척 스미스 목사는 그에게 당신의 제안은 고맙게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재물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고 정중히 거절하였다 합니다. 만약 그의 헌금을 받아 교회를 지었다면 그는 교회 안에서 큰 사람이 되어 교회를 좌지우지 하였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큰 얼굴을 하며 교회를 좌지우지 하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그들은 자신의 재물을 교회에 드려 자기의 이름을 크게 낸 사람들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로 하여 교회는 분열되고 또 목사들은 이들의 눈치를 보며 목회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에 헌금을 내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헌금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물은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자발적인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즐겨내는 자를 축복하신다 하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마게도냐 성도들이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다(고후8:2) 하였으며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예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도 주었도다(고후8:3-5)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재물이 많다고 드리는 것이 아니요 또 적다고 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많은 부자들 가운데 겨우 두 두렙돈을 헌금한 과부를 보며 제자들에게 저 과부가 가장 많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 하셨습니다. 그녀는 심히 어려운 가운데서 자기 생활비를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를 꼭 내야 하는가 망설이기도 합니다. 나는 십일조에 대해 마음을 꺼리는 사람은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확신하건 데 그 사람은 성경에 약속된 십일조의 축복을 체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알 것은 십일조는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행함과 그에 대한 축복을 위해 구별하여 두신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나는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온전한 재물을 드린 사람들이 축복을 받은 것을 보아 왔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충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교회의 어려움을 기억하고 자신의 생활비를 털어 부족한 종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 나는 주께서 그 사람의 고운 마음의 헌신을 축복하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끝으로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조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신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5:31,32)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살피십니다. 설혹 오늘날 이런 마음을 가진 당신이 아나니야와 같이 죽임을 당하지는 않을지라도 당신의 영혼은 이미 사단에게 던져진 것입니다. 이 일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께서 당신에게 이 메시지를 주신 것은 당신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아직 회개의 시간이 남아 있을 때 주 앞에 바로 서시게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