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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8:30) 누가 주의 영의 인도를 받는가?

이요나 2006. 11. 10. 18:20

(사도행전 8:30) 누가 주의 영의 인도를 받는가?

 

(행:8:26)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홀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사도행전 8장은 예루살렘에 초대교회 탄생 후 복음이 이방 세계로 전파되는 최초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에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말씀이 성취되어 가는 과정이라 하겠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8장을 통하여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이어지는 복음전도의 길목을 목격하게 된다. 또한 복음전도와 함께 나타난 훼방의 복병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인도하시는 성령의 특별한 역사를 목격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부르심은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여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복음 전도는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역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권위는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으며 그 무엇으로도 살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I. 교회의 핍박과 사마리아 전도(1-13)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더니(12)

 

A. 스테반의 집사의 순교와 사울(1-3)

8장은 7장에 소개된 스데반 집사의 장렬한 순교로부터 전개된다. 그 당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전세계 속으로 흩어졌던 유대인들의 후손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자기들이 살던 출신지역별로 회당을 갖고 있었다. 

 

초대교회에서 성도들의 식탁을 봉사하기 위해 선발된 스테반 집사에게 특별한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 그가 각 회당을 돌며 전도를 하자 그를 통하여 나타나는 지혜와 성령의 말씀과 표적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초대교회 쪽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에 리버리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 지도자들이 일어나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하여 스데반을 공회에 고소하여 결국 돌로 쳐 죽였다.

 

7장 56절에는 스데반을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서 사도 바울의 모습을 처음 보게 된다. 사울은 그의 주장과 같이 그 당시 가잔 존경받는 랍비 가멜리엘의 제자로서 공회에 헌신한 유대교 열성신자였다.

 

흥미롭게도 핍박의 선봉에는 장차 이방인의 사도로 택함을 받은 바울 곧 사울이라는 유대교 관원이었다. 그는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기점으로 삼아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잔멸하는 선두에 서 각 집에 들어가 예수 믿는 자들을 폭력을 동원해 잡아들였다.

 

B. 빌립의 사마리아 입성(4-8)

뜻밖의 사건으로 기회를 잡은 유대교 사람들이 사울을 선두로 초대교회 성도들을 핍박하자 사도들을 제외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어디를 가던지 복음의 말씀을 전하였다. 이때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빌립도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백성에게 전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초대교회에서 식탁을 봉사하던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할 때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났던 표적이 나타나던 것이다. 성경은 귀신들이 소리를 지르며 떠나고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들이 고침을 받게 되어 사마리아 성은 기쁨으로 가득찼다(6-8) 고 기록하였다.

 

원래 사마리아 사람들은 야곱의 후손이지만 환난 중 이방 속에서 유대인의 혈통을 지키지 못하고 이방인들과 혈연 관계를 맺으므로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던 족속이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사마리아 수가 성에 들어가 여인을 만나고 그를 통하여 나아 온 수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친히 복음을 전도하신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이 종교적 관심이 지대했던 것은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C. 마술사 시몬(9-13)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특별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는 사마리아 성에 유명한 마술사 시몬이라는 사람이다. 시몬은 치료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그가 마술사라는 것으로 보아 특별한 잔재주를 통하여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병을 고쳐왔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마술사 시몬은 사마리아 성의 낮은 자에서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다 그의 말을 따를 정도로 높임을 받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다. 그런 중에 빌립집사가 이 성에 나타나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자 그를 통하여 나타난 여러 가지 성령의 표적들을 보고 놀란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침례를 받게 되었다. 이에 마술사 시몬도 믿고 침례를 받았다. 성경은 시몬이 빌립을 전심으로 따라 다녔다고 기록하였다(13). 이것으로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신비의 종교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II. 성령세례와 사마리아의 역학관계(14-25)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이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을 받을 뿐이러라(16)

 

A.     베드로와 요한의 파송

오늘 우리는 아주 특별한 내용을 접하게 된다. 우리는 앞에서 빌립집사를 통해서 나타난 놀라운 성령의 능력을 보았다. 중풍병자와 앉은뱅이를 일으킨 역사는 예수님과 사도들 가운데 나타나던 이적이다. 일개 식탁을 준비하던 집사 빌립에게 이런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로 하여 마술사 시몬에게 쏠렸던 사마리안 사람들의 민심은 모두 빌립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사마리아 사람들 속에 성령이 임하지 않은 것이다.

 

누가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며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뿐이러라(14-16) 증거하였다. 이 일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목사들은 이 부분을 가리켜 집사들은 침례를 줄 수 있고 그들에게서 성령의 능력은 나타날 수 있지만 성령세례는 오직 사도들에게 주어진 권세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성경적 원리일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모든 족속에서 성부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말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명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성령세례의 권위가 사도들에게만 국한 것이라면 오늘날 교회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베푸는 침례는 무익한 의식이 되고 말 것이다. 지금 우리는 사도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 본문 뒤에서 소개되는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빌립이 베푼 침례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사도들의 기도로 임한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사마리아에 발생된 문제점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7절에는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와서 저희가 성령 받기를 기도하며 저희가 안수하매 성령이 임하였다 기록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사도가 안수하였다는 것은 개인적인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사도들이 기도하자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손을 얹어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안수를 받은 사람들은 분명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자들일 것이다.

1.      사도의 안수

18절에는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 지라기록되었다. 여기서 안수를 개인적이다. 이것은 공중 의식이 아니라 사도들이 각 사람에게 손을 얹어 안수를 하며 성령이 임하시기를 기도하자 성령이 임했던 것이다. 이것을 목격한 시몬이 돈을 갖고 나와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달라(19)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몬은 처음부터 무엇인가 자신의 목적을 갖고 빌립을 따라다닌 것이였다.

 

 2. 베드로의 책망

이에 베드로가 그에게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20) 책망하였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다. 계속하여 베드로는 시몬에게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도 될 것도 없다(21)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믿고 침례를 받아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나 역시 수년동안 예수를 믿고 침례를 받았지만 내 마음 속에서는 악한 마음이 가득하였고 바른 마음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 보면 참으로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B.     하나님의 분깃을 받지 못할 자

이와 같이 오늘날 우리는 많은 성도들이 성령세례를 받고자 노력하며 또 교회 지도자들도 성도들에게 성령세례를 받을 것을 권장하고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성령을 받지 못하면 성도가 아니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목적이다.

 

혹시 성령을 받고자 하는 우리 마음 속에 시몬과 같이 자신도 교회와 사람들 가운데 능력을 행하여 큰 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속히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시몬에게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22) 권하며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23)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불의에 매였다라는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하나님의 선물을 자기 사로이 사용하고자 하는 사단의 마음이라 하겠다. 이미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성령의 선물을 자기를 위해 쓰는 이들을 향하여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마7:21-23)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하여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 생전에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들이다. 사마리아 여인을 통하여 메시아를 발견하였고 또 그들은 예수님을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요4장 참조).

 

원래 사마리아 성은 사람들은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다.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에 의헤 세워졌고 여로보암은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단을 세워 백성들이 남유다로 행하는 것을 막았다. 이로하여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남 유다보다 먼저 멸망을 받았다.

 

포로생활 때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유다 사람들과 달리 이방 중에서 이방인들과 혈연관계를 맺었다. 이로하여 포로귀한 후 그들은 이스라엘로 들어 오지 못하고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섬기며 그리심 산을 중심으로 예배활동을 하여 왔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4:22) 하셨다.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구원의 근거와 확신이 없는 종교활동에 빠져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초대교회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종교적 의식주의가 되어 버렸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배타적 종교성은 예수님 때에도 발견할 수 있다. 예수께서 영광을 얻기 위해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제자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환영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사마리아 방문이 자기들과 무관히 예루살렘에 올라 가심을 알고 거절하였다. 이때 요한과 야고보는 주님께 우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심판하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술사 시몬의 문제를 통하여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교중 사람들은 마음을 바로 볼 수 있는 지혜를 주어 사람들 마음 속에 역사하여 교회와 그 사역을 훼방하는 사단의 책략을 차단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약 빌립집사를 통하여 나타난 표적을 보고 무분별하게 달려오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면 그들의 믿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도들이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으로 모두 각 사람의 마음을 직감할 수 있는 통찰의 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한 복음의 전개에 있어 초대교회의 사역을 훼방하려는 사단의 역사를 차단하셨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무분별한 성령운동을 펴는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되는 말씀이다.

 

III. 성령은 누구에게 어떻게 역사하는가?(26-40)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뢰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26)

 

A. 이해할 수 없는 사자의 지시

이 장면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바라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각도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러한 지시는 열정을 갖고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김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때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서 사실상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물론 사도들과 같이 성령이 임하게 하는 능력은 받지 못하였지만 그의 복음전도와 함께 나타난 성령의 능력은 가히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므로 빌립은 사마리아 성의 큰 기쁨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의 사자가 나타나 여기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 한 것이다. 사실 그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였던 것이다.

 

만약 내가 빌립과 같은 상황에 있을 때 누가 와서 그런 말을 전하였다면 나는 아마 콧방귀도 안뀌었을 것이다. 지금 목전에서 복음전도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하던 일을 중단하고 광야로 내려 가라니 그건 말도 않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유명 교회의 담임목사에게 아프리카 어느 마을로 내려가라는 말과도 같을 것이다.

 

또 여기서 우리는 주의 사자라는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29절에는 성령이 빌립더러 말하였다 기록되었고 또 39절에는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갔다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그런데 왜 주의 사자라 하였고 성령이라 하셨고 주의 영이라 기록되었을까?

 

주의 사자란 아마 어떤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된다. 어쩌면 사도 베도로나 요한일 수도 있다. 아니면 두 사도와 함께 내려 온 장로들일 수도 있고 함께 사역하던 동역자일 수도 있으며 빌립이 존경하던 사람일 수도 있다. 어쨌든 사자란 메신져란 뜻으로 실제로 빌립 앞에 나타나 주의 말씀을 전한 사람일 것이다.

 

B.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의 때

또한 29절의 성령이 말씀하셨다는 것은 빌립이 광야에 이르자 성령께서 그 마음에 직감을 통해 내시가 탄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셨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광야에 도착했을 때 예배에 참여하고 돌아 가는 이방인 내시의 행렬을 보았다면 그것은 당연한 지시일 것이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가 탄 병거 앞에 달려가자 그는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다. 아마 그는 예루살렘 예배에 참여하였다가 어쩌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허전한 마음을 앉고 돌아 가는 길이였을 것이다.

 

만약 그가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의 사도들을 만났다면 또 달랐을 것이나 먼 이방에서 에디오피아 여왕의 명을 받고 예루살렘에 예배를 참배하러 왔으니 그 의전 절차가 대단하였을 것이고 성전의 제사장들은 그들을 융슝히 대접하여 많은 선물을 챙겼을 것이다. 그러나 예배 의식 외에 얻은 것이 없는 내시로서는 귀하게 얻은 선지자의 글을 읽으며 그 내용을 알 수 없어 허전함을 달래고 있었을 것이다.

 

   C. 지도하는 사람의 필요성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위로하고 또 그를 통하여 행하실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다. 그리하려 빌립을 이곳에 오게 하신 것이다. 빌립은 내시에게 다가가 지금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냐 물었다. 그러자 내시는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는가? 하고 빌립을 마차에 태워 같이 앉았다. 그가 손님을 받아드림으로 그는 천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이사야서 중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였고 톨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한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사3:7,8) 기록된 부분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빌립에게 선지가가 말한 이 사람은 자기를 가르침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이냐 물었다.

 

우리는 가끔 성경을 대하며 많은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그 내용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전날 어느 부분을 이해할 수 없어서 밤을 새운 일이 있었다. 또 여기저기 다른 주석들을 살펴 보았지만 그들의 말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요즘 성경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기쁨에 빠진다. 그것은 그 말씀의 깊이를 더해가기 때문이다.

 

주님은 진리의 성령이 임하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장래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하셨다. 그는 우리를 가르치시고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그로서 우리는 평안과 기쁨을 얻게 된다.

 

빌립은 그가 펴든 책을 기점으로 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누가가 말한 복음이라는 말의 뜻을 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 내시에게 있어 가장 기쁜 소식이기 때문이다. 내시도 이제는 주의 제자가 되어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D. 성령세례의 기쁨

빌립의 지도로 주의 도를 깨우치자 내시는 마차가 물가에 이르자 빌립에게 이것에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꺼리낌이 있느뇨(36) 하였다. 이것은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침례를 받을 수 있으며 당신은 내게 침례를 베풀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자기에게 임할 하나님의 기쁜 소식 곧 복음의 길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그는 에디오피아 민족에게 임할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며 흥분에 쌓였을 것이다. 이에 빌립과 내시는 마차에서 내려 둘이 함께 물로 들어가 빌립은 내시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38절에는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였다기록되었다. 성경에는 내시가 침례를 받은 후 성령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내시의 믿음의 확신으로 보아 그는 능히 주로부터 오는 성령의 능력을 받았을 것이다.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갔다는 기록은 참으로 흥미롭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함을 받아 복음을 전한 후에 주의 영의 임재하심을 체험한 사람은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주의 영의 여운이 주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E. 나의 기도

주님 오늘 나로 하여 이 말씀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이제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전2:9) 하셨고 다시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5)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어린 종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하시고 오직 그 비밀한 말씀으로 주의 나라를 예비하게 하옵소서. 내가 이제 주 앞에 있나이다. 아멘